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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부활의 공동체 | 김희헌 | 2023-04-30

by 김희헌 posted Apr 30, 2023 Views 7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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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04-30

부활의 공동체 (2:42~47, 벧전 2:19~25, 10:1~10)

2023.04.30. 부활절 넷째 주일

 

지난주 미국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를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국제사회는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가 지닌 불평등과 불안정한 관계를 개선하려고 다극적(多極的) 질서로 재편되고 있기에, 균형 잡힌 외교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현 정부는 미국만을 일방적으로 추종하면서 편향된 정책을 밀어붙이고, 그 결과 한반도 전쟁위기만이 아니라 경제 위기도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정상회담을 마치고 발표한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공동성명은 제정신을 가진 국가지도자라면 합의해서는 안 될 내용이었습니다. 공동성명에 담긴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을 구축과 인도-태평양 전역에서의 협력 확대, 철통같은 양자 협력 강화의 약속은 모두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에 순응하는 내용입니다. 지난 70년을 정전 상태로 위기를 반복해서 겪어온 한반도에 긴장과 불안을 가중하는 악독한 계획입니다.

국가 간의 동맹이란 서로 동등한 주권에 기초한 평등한 관계여야 하는데, 이 정부는 국가의 자주권을 포기하고,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국민과 국토를 외국의 이해관계에 예속시키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습니다. 갈수록 평화의 길에서 멀어지는 현실에서, 우리는 멀쩡한 자기 땅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식민지 백성과 같은 처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씨가 더는 국민주권을 위임받은 대통령의 역할을 할 수 없겠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반복되는 굴종 외교와 일관된 미국 사대주의 정책만 보더라도, 그는 2천 년 전 유대 사회의 바리새인이 해괴한 논리로 로마제국에 봉사했던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이 말하듯이, 그들은 낯선 목소리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도둑이요 강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위기의 시대에 찾은 생명의 문 / 요한복음 101-10]

요한복음에 나오는 양과 목자의 비유는 겉으로 비친 목가적인 모습과는 달리, 그 내용은 자기 시대를 어둠으로 몰고 가는 바리새인과의 대결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은 로마제국의 압제로 신음하는 민중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모세의 율법을 명목으로 삼아 양두구육의 논리를 펴면서, 실제로는 생명의 눈을 뜬 사람들을 계속 협박합니다. 요한복음 8장과 9장은 이런 바리새인의 위선을 가리켜, ‘진리를 왜곡하는 비뚤어진 사람이요 눈먼 인도자라고 비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됩니다.

당시는 어두운 시대요 갈라진 논리로 삶이 피폐해졌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들려준 양과 목자의 비유는 먼 옛날 유대가 바빌론 포로 생활을 할 때 에스겔이 전한 이야기입니다. 에스겔은 당시의 포로민을 으로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기 시대의 고통을 말합니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 내 양 떼가 약탈을 당하고, 온갖 들짐승에게 공격을 당하고 살육당하여 그것들의 먹이가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다.” (34:8)

이때 에스겔이 전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참으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나의 양 떼를 찾아서 돌보아 주겠다. 양 떼가 흩어졌을 때 목자가 자기의 양들을 찾는 것처럼, 나도 내 양 떼를 찾겠다. 캄캄하게 구름 낀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하여 내겠다. 헤매는 것은 찾아오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은 싸매어 주며, 약한 것은 튼튼하게 만들겠다. 그러나 살진 것들과 힘센 것들은, 내가 멸하겠다. 내가 이렇게 그것들을 공평하게 먹이겠다.” (34:11~12,16)

에스겔이 바빌론 낯선 땅에서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에게 들려준 이 위로의 말씀은, 시간이 흘러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자기 땅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들려집니다. 하지만, 앞이 캄캄한 어두운 시대에 이 생명의 말씀은 말해도 들리지 않고, 들려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본문 6절은 그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왜 그들은 제국의 억압과 바리새인의 위선을 보면서도 삶을 깨닫는 데에는 더뎠을까요? 이런 질문은 2천 년 전의 유대인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전쟁과 불평등으로 앓고 있으며, 파국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길을 찾지 못한 우리 시대의 모습을 가리켜, 한 시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공동의 침체를 상식이라 하고, 공동의 나태를 평화로 여기며, 공동의 타락을 질서라고 여긴다라고 말입니다. (김영민, 동무론, 198)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미국 성공회의 주교 존 쉘비 스퐁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가리켜 유배 생활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근본이 되는 믿음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종교적 공간에 머물러 있지만, 자신의 신앙을 지탱시키는 근본 믿음이 흔들립니다. 교회 안에서 감정은 뜨겁고 행동은 분주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도 잃어버린 신념을 되살리려는 몸부림에 가깝습니다. 스퐁은 신앙고백의 힘을 잃은 교회의 모습을 가리켜 그런 척 가장하고 놀기(a game of let’s pretend)”라고 표현합니다. 낡은 교리를 신봉하는 보수적인 교회만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절과 6절에서 두 번 반복하며 간절한 심정을 표현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원문을 보면, ‘아멘( Ἀμν), 아멘하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간절함이라기보다는, 그의 말씀을 되새기는 요한 공동체의 갈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그토록 원했을까요?

그들은 눈앞의 현실인 로마의 평화에 머무르지 않고,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 얻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원했습니다. 대결과 갈등의 위태로움 속에서 선한 목자로서 평화를 주실 그리스도를 갈망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양들이 지나다니는 생명의 문이요, 그 문을 통해 들어가면 푸른 초장으로 인도받을 것이라는 평화의 약속입니다.

그것은 오래전 에스겔이 포로기라는 암흑 속에서 발견한 믿음이었습니다. 에스겔은 바빌론 포로로 함께 끌려갔기 때문에 포로의 비참한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대제국 바빌론이 지배하는 절망의 세계로만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믿음의 세계로 그려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믿음의 사람이 지닌 세계관입니다. (34:25) 비슷한 위기를 겪고 있던 요한 공동체도 그 믿음을 갈구했습니다.

 

[고난 속의 믿음 / 베드로전서 219-25]

어둠 속에서 생명의 길을 찾기는 어렵고, 고난 속에서 평화의 문을 통과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어둠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신서 본문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베드로전서 2장 본문은 종이 지켜야 할 윤리에 관한 내용입니다. 빼고 읽은 18절은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라라고 말하는데, 사회학적인 눈으로 읽으면 굴종의 윤리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실 본문은 노예제 사회에서 기록된 당시 생활의 한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해석하면, 그 의미를 달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말씀입니다.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고난의 현실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 관한 가르침으로 읽어도 좋겠습니다. 그것은 위태로운 삶에서도 믿음의 삶을 이어가는 길에 관한 교훈입니다.

본문은 그 삶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벧전 2:19~21)

본문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길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 고백을 따라 살아가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웠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으로 이해했습니다. 본문은 그 믿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주목받지 못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사람에 대한 불신이 마치 시대의 경향처럼 이해되는 현실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에서는 합리적인 지성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즉자적 욕망과 자기 이해관계를 따라 방황하는 반지성주의가 번성합니다.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기민하게 반응하지만, 자신만을 위해 사용되는 이기적 자유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을 자유로 변하고, 평등은 자기주장을 내세우기 위한 논리로 줄어들고 맙니다. 그것은 지성의 결핍이라기보다는 믿음의 상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시대를 함께 앓고 있는 오늘날 교회에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을까요?

 

[부활의 공동체, 신도의 공동생활 / 사도행전 242-47]

사도행전 2장 본문에는 역동적인 신앙공동체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것은 성서가 바라던 희년’(jubilee)의 꿈을 이룬 공동체입니다. 경외감을 품고 함께 지내며, 서로 물건을 나누어 쓰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나누어준 그 삶은 영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가능했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면서, 서로 나누어 먹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이 원초적 경험은 오늘날 많이 퇴색되었지만, 여전히 교회의 오래된 미래처럼 계속 호출되어 등장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부활의 공동체는 네 가지 모습을 지녔다고 본문 42절은 말합니다. 1)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케리그마) 2) 서로 사귀는 일에 힘쓰며 (코이노니아), 3) 빵을 함께 나누고 (디아코니아), 4) 그리고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네 가지 작업목록이라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사도들이 선포한 말씀, 헬라어로 케리그마’(κρυγμα)라고 합니다. 개인의 신앙이든, 교회의 정신이든, 인류의 문명이든 케리그마가 올바로 서야 합니다. 이 세계가 고통당하는 것은 살아갈 길에 관한 케리그마가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위기도 물질적으로 가난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요, 교인이 적어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케리그마가 바로 서면 위기 속에서도 나아갈 길이 밝혀집니다.

케리그마가 바로 서면, 신앙인들이 함께하는 공동체로서 서로 사귀는 새로운 관계방식을 구성하게 됩니다. 그것을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라고 합니다. 기독교가 인류문명에 등장하고 나서 생겨난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방식을 변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위대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공동체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행위에 앞서 존재 자체가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케리그마와 코이노니아가 바로 서면, 신앙공동체의 행동 양식이 달라집니다. 그것은 예수를 본받아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섬기는 디아코니아’(διακονια)의 삶입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이 세 가지, 케리그마와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를 뒷받침하는 것이 삶의 기도입니다. 참된 기도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묻고 거기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신앙인의 용기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신비롭게 경험합니다.

하비 콕스는 세속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종교를 가리켜, 예언적 종교와 신비적 종교라고 합니다. 종교가 성숙해가는 것은 그 지혜와 삶이 넓고 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숙의 방향은 예언과 신비, 두 가지 방향입니다. 그 지혜가 넓어져서 자신의 이해관계만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끌어안게 될 때 예언적품성을 익히게 됩니다. 또 그 영성이 깊어져서 자기 욕망을 호흡하기보다 자기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더 깊은 세계를 호흡할 때 신비의 감각을 키우게 됩니다. 성숙한 믿음은 예언과 신비가 분리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고 돕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부활의 공동체는 시대의 절망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믿음의 끈기, 평화의 길을 열어가고자 하는 소망의 슬기, 선한 목자와 같이 아픔과 고통을 싸매고 치유하는 사랑의 온기를 지닙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고자 하는 구원의 삶이겠지요. 예수의 부활이 비추어주는 이 새 삶의 길을 우리 모두 힘차게 걸어갑시다.

침묵으로 잠시 기도합니다.

 

[파송사]

그리스도의 약속을 들으십시오. “나는 생명의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왔다.” 예수의 이 약속에 힘입어, 믿음의 끈기, 소망의 슬기, 사랑의 온기를 지키며, 부활의 공동체를 이루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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