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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죽는 것과 사는 것 ㅣ 김지목 ㅣ 2024-02-18

by 김지목 posted Feb 18, 2024 Views 5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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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02-18

 

하늘뜻펴기 20240218 사순절1

죽는 것과 사는 것"

9:8-17  25:1-10  벧전3:18-22  1:9-15

 

홍수심판은 세계 도처에서 전승되는 유명한 설화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고대 근동의 길가메쉬 서사시, 아트라하시스 서사시, 수메르의 홍수설화 등에서도 발견되는것입니다. 이중에서 창세기 노아의 홍수설화와 유사한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쉬 서사시는, 신 에아(Ea)가 노아에 비견되는 우트나피쉬팀에게 나타나서 최고의 신 엔릴(Enlil)이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미리 알려주고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합니다. 방주를 만들어 생물의 종자를 방주에 싣고 6일동안 계속된 폭풍우를 피해서 멸망에서 살아남습니다.

 

비가 그친 후 비둘기와 제비를 얼마간의 차이를 두고 방주 밖으로 내보냈는데 다시 방주로 되돌아 왔습니다. 새들이 머물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홍수 물이 빠지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까마귀를 내보내자 방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물이 마른 곳을 찾아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니, 신들이 냄새를 맡고 희생제물 주위로 모여들었습니다. 제사에 만족한 신들은 또다시 홍수를 내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우트나피쉬팀 그를 영생하는 존재로 만들어 데려가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같은 메소포타미아 바벨론의 홍수설화를 창세기 기자가 가져와서 노아의 이야기로 재구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다만 한 번 내리기 시작한 폭풍우를 바벨론의 신들은 제어할 수 없었지만 야훼 하나님은 통제할 수 있었다는 점, 폭풍우가 휘몰아쳐서 홍수가 일어난 기간이 일주일이 아니라 40일이었다는 점, 홍수 계획의 비밀을 들었던 우트나피쉬팀은 제사 후 불멸의 존재가 되었지만 노아의 경우에서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일로 결말을 짓게 되었다는 점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큰 맥락에서 여러 전승의 홍수설화는 인간의 악함에 대한 신의 대 심판이라는 점에서 공통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화가 만들어지고 세계 각 처에서 전승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인류 문화가 진화해 나갔는데, 그럴수록 인류는 포악해지고 염치를 모르는 사악함도 짙어졌다는, 인간종의 일반적인 습성이 양심에 의해 고발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내버려 두었다가는 결국 사피엔스 전체가 공멸하고 말 것이라는 교훈을 공유하기 위해서, 신에 의한 대 심판의 이야기가 전승되었습니다.

 

제동 걸리지 않고 무한으로 증식하는 인간의 욕망은 인류의 공멸을 초래하는 어리석음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죄악임을, 창세기 기자 역시 다른 홍수설화의 교훈에 동의하며 성서 안으로 가져왔습니다. 그것을 각색하면서 야훼사상을 바벨론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투쟁하는 하나의 종교로 자리매김 시키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다신관과 다르게 유일신 사상을 확고히 하면서 차별성을 부각시켰습니다. 강한 신이 약한 신을 지배한다는 다신관의 이데올로기는 강자의 권력과 약자의 복종을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유일신의 사상에는 인간의 계급화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신들끼리 대결하는 혼돈을 정리하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함으로 역설하는 야훼사상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신이 강한 신인가, 그의 질서에 줄을 서게끔 하는 운명론적 종교가 아니고, 야훼종교의 유일신 사상은 목적론적으로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인간에게 명확하고도 구체적으로 선포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노아의 홍수설화로 재구성하면서 창세기 기자는무지개", 다른 사상과 구별하는 가장 큰 차별점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야훼종교의 하나님은 대 심판 후 인간에게 약속하시는 신이라는 점입니다. 바벨론 신화에서 인간의 위치는 신들의 노역을 대신하는 대체재일 뿐입니다. 노아에 비견되는 우트나피쉬팀은 신들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신들을 즐겁게 해주었다는 이유로 우트나피쉬팀을 신들과 함께 영원히 사는 존재, 즉 자기들과 같은 신으로 승격시켜 줍니다. 인간은 감히 신들과 공평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은 노아와 무지개의 계약을 맺으며 약속하십니다. 야훼사상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하나님나라로 일구어가는 존재입니다. 신과 함께하는 존재로 인간을 승격시키고 노아와 맺은 계약의 내용은, 큰 비가 내리면 언제나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다시는 홍수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영원히"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이 무지개에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홍수심판은 인류의 멸종을 의도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창세기는 품고 있습니다. 야훼종교가 힘주어 강조하는 차별적인 사상은 노아의 홍수설화에서 무지개로 상징화되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인간과 사랑으로 관계하신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는 하나님의은총"을 떠올리면서 은총의 신앙을 특별한 의미로 되새기고 있습니다.

 

오늘 하늘뜻펴기의 요절은 베드로전서에서 찾았습니다. 베드로전서 본문은 세례의 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개신교는 교회가 마땅히 거룩하게 드려야 할 세 가지의 성례전이 있습니다. 예배와 성만찬, 그리고 세례입니다. 그래서 성탄절과 부활절과 같은 그리스도교의 주요 절기에는 예배와 성만찬과 세례 이 3대 성례전을 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본문은, 성례전의 하나인 세례의 근본에 대해서 설명하는 중요한 한 대목으로,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정의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죄를 사함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를 결단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라는 확신을, 세례로써 기념하는 것입니다. 세례의례는 물속에 온몸을 담갔다가 나오는 행위로써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을 상징합니다. 세례문답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교회는 세례를 베풂으로써 수세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공표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공식적으로 입교하여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의 본문은 노아의 홍수심판을 세례신학의 한 전거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인간 중에는 노아의 가족만을 남기고 세상을 심판했던 홍수의 물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하는 세례의 물과 같다고 합니다. 노아 때의 홍수심판은 이 세계 전체에 세례를 준 우주적 세례예식이었던 것입니다.

 

창세기의 홍수심판을 바벨론 신화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베드로전서처럼 홍수심판을 세례예식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낳은 죄악의 세상을 도말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인간을 초대하고픈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 사건으로 홍수설화를 이해할 때, 홍수심판을 우주적 세례예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초대, 이것이 세례입니다.

 

여기에 선한 양심,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소망하는 우리의 믿음이 응답하여 세례가 완성된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 선한 양심이란 나 스스로가 죽기까지 다른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신 그 살림이 선한 양심입니다. 다시 말해 세례란 인간을 영원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다른 생명을 살리기를 소망하는 우리의 결단이 응답하여 이루어지는 거룩한 예식인 것입니다. 이것은 죽은 일과 사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 함께 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성례전의 하나인 세례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죽는 일과 사는 일, 곧 세례의 시종일관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삶,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우리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이를 위해 우리는 신앙을 고백하며 오늘의 삶을 결단 만들기 위해 우리는 신앙을 고백하고 오늘의 삶을 결단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사순절을 맞았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인류의 부활을 소망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 계절입니다. 지난주 재의수요일에 우리는 올해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우리 사회의 소수자의 인권과 생태정의의 신앙, 그리고 세상의 전쟁없는 평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가 정당화되는 후안무치의 세상이 되도록 방조한 죄, 기후위기로 멸종당할 수밖에 없었던 생물종들을 향한 우리의 죄, 한반도를 비롯한 전 세계에 전쟁과 전쟁연습을 용인하고 있는 우리의 죄를 참회하면서, 오늘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결단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제는 향린공동체가 군산 새만금 수라갯벌에서 생태정의기도회를 드렸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를 건설했다고 자랑하는 무지한 우리 인간의 욕심 때문에 수백수천의 갯벌 생명종이 멸종되어버린 새만금 수라갯벌에서 참회하는 기도를 드리며, 수십년동안 아무런 소득이 없이 진행되고 있는 새만금개발의 백지화와 신공항 건설반대의 마음을 모았습니다.

 

방조제에 갇혀버린 수라갯벌 앞에서 박희규 목사님께서 하늘뜻을 펴주셨습니다. 성서 본문은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어라"로 시작하는 시편 23편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필요와 안식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관한 말씀입니다만, 인간의 욕망으로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을 빼앗기고 멸종하기까지 한 수라갯벌의 입장에서 이 말씀은 슬픈노래 애가로 읽혀진다는 하늘뜻펴기에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박희규 목사님의 하늘뜻펴기 한 대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새만금 앞에서 시편 23편은 애가가 됩니다. 바빌론의 강가에서 고향을 바라보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애가처럼, 임진각 망향의 비 앞에서 북한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는 실향민들의 향수처럼, 새만금 앞에서는 시편 23편이 애가가 됩니다. 쉴만한 물가가 없어진 곳에서 여호와가 목자가 되셨던 때를, 부족함이 없던 그 때를 기억합니다. 푸른 초장이 없어진 이곳에서 나를 누이시던 주님의 따뜻한 속삭임을 그리워 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던 주님의 자연을 인간이 인간의 의로 파괴하고 있으니 의의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우리 앞에 펼쳐 놓았으니 우리가 저지를 자연에 대한 폭력의 댓가를 치룰 일이 두렵습니다.”

 

노아가 홍수를 다 겪고난 후 하나님이 노아에게 무지개를 보이시며 계약을 맺으실 때, 계약의 당사자는 노아와 그의 자손만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9 10너희와 함께 있는 살아 숨쉬는 모든 생물, 곧 너와 함께 방주에서 나온 새와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에게도, 내가 언약을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계약의 주체, 수많은 생명종이 사라져버린 수라갯벌에서, 시편 23편이 애가가 되어버린 수라갯벌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할 우리의 욕망을 확인하였습니다.

 

올해 사순절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일에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기를 바랍니다.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주제를 두고, 이번 사순절에 예정되어 있는 두 번의사순절 특강에 깊은 관심으로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사순절기 동안 매일 기후정의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카드와 영상을 교회 SNS를 통해 공유해 드리고자 합니다. 사라져가는 생명종을 기억하는 매일 묵상카드, 한반도 평화를 제목으로 매일 정오에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 3분기도 묵상, 그리고 탄소금식을 실천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실천카드를 온라인으로 받아보시면서, 일상 중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기회를 가져보시기를 바랍니다. 신앙 안에서 죽는 일은 곧 사는 일입니다. 이 신앙의 역설을 사순절기 동안 경험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

 

(파송사)

주님께서는 죄인의 죽음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악에서 돌이켜 살기를 바라십니다.

죽는 것사는 것은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평안히 가십시오.

신앙의 신비에 힘입어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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