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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광야를 희망하는 공동체 | 박정범 | 2023-12-10

by 박정범 posted Dec 10, 2023 Views 9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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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12-10

20231210 대림절2, 인권주일

 

광야를 희망하는 공동체

이사야 40:1-11, 시편 85:1-2, 8-13, 베드로후서 3:8-15a, 마가복음 1:1-11,

 

 

 

안녕하십니까? 처음이라는 것은 참 여러모로 긴장감과 설레임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난 4월에 향린에 온 이후로 처음 이 자리에 서게 됩니다. 떨리고 긴장됩니다. 그래도 시작해야겠죠? 제 마음이 긴장에서부터 해방되어 열리고, 여러분들의 마음도 열려서 오늘 이 시간 함께 아주 조그마한 부분이라도 소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 우리는 김지목 목사님의 하늘뜻펴기를 통해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 지구공동체의 평화를 희망하며, 깨어 기도하는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다들 그리하셨지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 이사야서 40장은 제2이사야서이며, 2이사야서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을 위로하면서 해방과 구원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 한편 민족적인 신앙을 넘어 보편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비로소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 예언서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는 지난주 하늘뜻펴기에 대한 복습이었습니다.

 

2이사야서의 또 다른 특징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에 대한 희망을 선포하는 반면, 그 하나님의 섭리를 마침내 이루게 될 고난의 종을 연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승리의 신과 고난의 종은 참 어색한 조합입니다. 이사야서의 이러한 어색한 조합은 오늘 본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구원의 길을 예비하라고 선포합니다. "광야에 주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 길을 곧게 내어라."

 

그런데 이상한 것이, 도성이나 성읍으로 이어지는 큰 길이라면 앞뒤가 맞을거 같지만, 사막에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 오실 큰 길을 곧게 내라는 것은 조금 어색하게 들립니다.

 

왜 이사야는 도성이나 성읍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광야와 사막으로 가는 길을 닦고 내어라 라고 외치는 것일까요?

 

포로생활을 마감하였으면 저 위대한 예루살렘 도성으로 이어지는 16차선 도로를 개간하라! 뭐 이렇게 외쳐야 가오()이 나는거 (가 좀 서는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광야와 사막에 승리의 주님을 위한 길을 예비하라는 선포를 이렇게 당당히 외치냐는 것입니다.

 

본문이 지난주와 같은 이사야서이기 때문에 지난 주 설교와 연결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연재까지는 아니지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해 이스라엘로 돌아가려는 귀환파가 마주해야 할 여러 산중에서 척박한 이스라엘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동족들을 설득하는 일도 그 중 하나였다고 배웠습니다.

 

자신들의 위치가 자유의 몸이 아닌 포로임에도 불구하고, 척박하기 그지 없는 광야의 우뚝 선 예루살렘보다, 페르시아의 기름진 땅이 좋아지는 건 또 한편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사야서는 그러한 동족들에게 오늘 7-8절 말씀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제 식대로 표현하면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페르시아의 기름진 땅도 영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의 깊은 성찰을 통해서 고백되어진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왜 포로가 되었나? 우린 왜 이러한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들의 성찰은 그들 나름의 신앙 고백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왜 포로가 되었고, 우리는 왜 이러한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이사야서 답은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이 명령하신 정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린 우리의 자유를 잃고 치욕의 광야를 건너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다시 광야로, 다시 사막으로, 다시 하나님으로 향하는 길을 내어야 한다. 그 길을 예비함에 있어 계곡이 있다면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길을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서라도 우리가 그 길을 예비 해야 한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401-10절의 내용을 이렇게 제 식대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를 박탈당하고 포로로 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린 그 고난에 주저앉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길을 예비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시 일어선다면,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길을 닦고 그 길을 예비한다면 모든 만물은 시들고 사라지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꿋꿋이 살아 영원히 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 본문 이사야서의 고백입니다. 이사야서의 이 고백은 현실의 굴레와 절망의 상황에서 그것을 헤치고 새로운 미래를 이스라엘에게 제시하는 희망의 선포였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처럼 여기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 외치는 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는 회개의 세례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교 성전이 아니라 광야로 나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당시 교회권력이 위로하지 못했던 사람들, 그들의 종교가 포용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성전이 성전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에 새로운 신앙을 갈망하던 사람들이 광야로 세례요한을 찾아 온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오늘 본문에서 그를 소개하는 단어 광야, 낙타 털옷, 가죽띠, 메뚜기와 들꿀이 암시하는 그 사람, 당시 사람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져온 엘리야의 재현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날 이 세상을 정리할 것이라는 선조들의 예언을 떠올렸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신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서 세례를 주었지만, 나의 뒤에 오실 분은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을 찾아 광야로 몰려온 온 유대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현재의 상황이 새롭게 개편되길 바랬던 것 같습니다.

 

유대교 성전도 싫고 광야에서 외치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보이니 가서 죄사함을 받고 그를 따르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그 마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훗날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의 다수도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이 상황에서 물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로 자기와 그리스도를 구분합니다. 물의 세례, 성령의 세례, 다른 공관복음서에선 불의 세례 등등 참 해석하기 쉽지 않은 말들입니다.

 

저는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봅니다. 계속 같은 굴레속에서 살아가면서 회개하고 용서받는 물로서의 세례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 우리의 정신이 뒤바뀌어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 말입니다.

 

어떠한 종교 권력으로서의 유대교 성전이 아니라, 한 종교 지도자, 엘리야이건 엘리야의 재현으로 나타난 세례요한이건, 그리스도이신 예수라고 하더라고 한 지도자의 카리스마로 바뀌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사야서가 강조하는 고난의 종을 통한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 고난 받는 자들의 연대를 통해 나도 다시 태어나고 세상도 변화한다는 믿음. 그 영적 변화를 일깨우는 것이 그리스도가 주시는 성령의 세례가 아닐까요?

 

매일의 삶에서 저지르는 죄를 회개하기 위해 광야로 찾아 나선 그들의 마음 속 순수함도 존중 받아야 하겠지만, 그러한 종교성만 가지고 광야에 주님의 길을 예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검게 더러워진 옷을 새하얗게 만들어주는 구원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이런 잘못된 신앙과 풍조로 인해 죄를 만들어 내고 고난이 끊이지 않는 이 구조를 전환시키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권력, 한 개인의 카리스마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옛 성서에서만 존재하는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정의를 왜곡시키고, 사유화하는 것을 많이 봐왔습니다.

 

그렇지만 또 우리는 압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는 것을. 또 율법 중에 가장 으뜸인 율법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듭남이 없는 종교는 고난의 종을 통하지 않고 승리의 하나님에 취한 종교는 교리를 앞세워 생명의 권리를 짓밟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기 위해 다른이를 괴롭히고 상처주면서 그 행위가 마치 모든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일인듯 사람들을 속이고 끝내는 자기 자신도 속이는 행위를 일삼고 있습니다.

 

비단 종교만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 승리에 도취한 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생명의 존엄성을 짓밟고, 그들의 자유를 억압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 본문 베드로후서 33-4절의 사람들 같이 다른이들을 조롱할 것입니다.

 

3-4절의 내용을 제가 읽겠습니다.

 

마지막 때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욕망대로 살면서, 여러분을 조롱하여...‘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어디 갔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 때부터 그러하였듯이 그냥 그대로다.’”

 

우리가 사는 현실도 그렇습니다. 자기들의 욕망대로 살면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조롱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땅이 도대체 언제 온다는 말이냐? 이 시대의 풍조는 변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그 변화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불의한 자들의 유혹에 휩쓸려서 자기의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베드로후서 3장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희망의 절기, 대림절 둘째주일, 그리고 오늘은 인권주일입니다.

 

우리가 오늘 다짐해야할 것은 광야의 길을 예비하고, 사막의 길을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억해야 할 우리의 희망은 절망의 세월이 천년과도 같이 느껴질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계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무시하는 어떠한 행위에도 휩쓸려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혐오를 무기 삼는 어떠한 행위에도 휩쓸려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을 베푸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37회 인권상 시상식에서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가 인권상을 수상했습니다. 축하드리면서도 한편 어떤 사회여야 참사로 돌아가신 분들의 가족들이 인권운동의 선봉에 서서 한 해의 가장 기억해야 할 단체가 되었을까 씁쓸해집니다.

 

한 노동자가 일하다 죽음을 당했는데, 마땅히 책임져야할 사람들에게 죄 없다 판결하는 이 세상에서 죄란 무엇일까?

 

그와 반대로 거대한 교회권력이 한 목회자가 사랑의 마음을 담아 행한 축복의 행위를 세상 어떠한 죄보다 큰 죄인냥 들고 일어나 자신들의 교단에서 출교결정을 내렸는데, 이러한 결과들 앞에서 진짜 죄인은 누구이고 생명에 대한 사랑은 무엇이며, 종교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깊어집니다.

 

아름답다라는 말의 어원이 나답다라는 설이 있습니다.

 

아름답다라는 말의 진짜 어원을 따지기 전에 누군가에게 선택되어지고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아름다워지기 위해, 나를 찾고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생명들을 사랑합시다.

 

생명을 존중하고, 그 생명 스스로의 모습을 사랑합시다.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피어날 것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정의가 주님 앞에 앞서가며, 주님께서 가실 길을 닦을 것이다.

 

생명을 짓밟고, 사랑을 왜곡하는 세상입니다.

 

그 속에서 정의를 위해 광야에 길을 내어가는 그 지난한 일은 천년이 걸릴 듯 느껴질때도 있겠지만, 우리 함께 불편하지만 자유로운 광야를 희망하는 공동체가 되어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 나아갑시다.

 

우리 앞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둑과 같이 나타날 것입니다.

 

잠시 침묵하시겠습니다.

(파송사)

광야로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참으로 주님의 구원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있으니, 주님의 영광이 우리 땅에 깃들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눈물 흘리며 하나님의 의를 심는다면,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쁨으로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광야에 길을 닦는 마음으로 한 주간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축복의 기도를 함께 나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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