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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기다리는 사람들 ㅣ 김지목 ㅣ 2023-12-03

by 김지목 posted Dec 03, 2023 Views 7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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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3-12-03

 

20231203 대림절1

 

기다리는 사람들"

64:1-9  80:1-7,17-19  고전1:3-9  13:24-37

 

66권으로 전해진 제1성서는 크게 율법서(토라)와 예언서(네비임), 그리고 성문서(케투빔)로 구분됩니다. 첫번째 율법서는 모세오경의 다섯 권의 책입니다. 전승과 전래 자료를 기반으로 야훼사상의 기초를 놓은 성서입니다. 두번째 예언서는 여호수아기,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와 이사아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그리고 호세아서 이하 12개의 작은 문서들이 예언서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예배와 절기 때 주로 읊어지고 낭독되었던 시편, 잠언, 전도서를 비롯한 지혜서, 또한 나머지 역사서들을 묶어 성문서로 지칭합니다. 1성서를 이해하는 첫 걸음이 이와 같은 구분입니다.

 

1성서 예언서에서 예언,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점을 쳐서 신적 권능을 내세워보려는 의도로 선포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이 직면한 시대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처신하는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밝히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代言)”의 의미가 강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그룹이 율법서를 중심으로 야훼사상을 전승하는 일에 매진했다면, 예언자그룹은 야훼사상을 삶에 실현하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단순하게 본다면 제사장은 야훼사상의 문화를, 예언자는 야훼사상의 정치경제를 담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직무를 감당했던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예언자들은 왕과 협조하거나 갈등하는 역동적인 관계망 안에서 수 세기에 걸쳐 야훼사상을 실험하고 정립하였는데,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승된 제1성서입니다.

 

1성서 예언서의 하나인 이사야서는 한권의 성서로 우리에게 전수되었지만, 학자들은 이사야로 통칭되는 예언자그룹이 펴낸 세 권의 책으로 이해합니다. 1장부터 39장까지를 제1이사야, 40장부터 55장을 제2이사야, 56장부터 66장을 제3이사야로 구분합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사야서가 기록하고 있는 시간이 200여년이 되기 때문입니다. 1이사야는 주전 8세기 앗시리아 제국의 시기에 예언되고 편찬된 내용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되던 위급한 때 제국의 힘에 편승하려는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강조하였습니다. 2이사야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을 위로하면서 해방과 구원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3이사야는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의 시기에 편찬된 것으로, 페르시아의 유대인 귀환정책이 펼쳐지던 시기에 저술된 것입니다. 파괴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의 희망이 이 시기의 주요 과제였습니다. 오늘 봉독한 이사야서는 제3이사야에 해당합니다. 3이사야를 저술한 예언자그룹은 이스라엘이 귀환하던 시기에 제2이사야를 추종하며 활동했던 귀환세력의 하나였습니다.

 

이집트 제국을 견제해야 했던 페르시아는 유대인을 고국으로 귀환시켜 예루살렘을 재건시킴으로써, 이집트의 북진의 1차 저지선을 형성하고자 했습니다. 70여년의 포로생활 중에도 중단없이 민족의 경전을 낭독하면서 강한 민족성을 가진 유대인을 적절하게 이용한 정책이었습니다. 이에 동조한 이스라엘 귀환세력들은 페르시아의 숨은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야훼사상의 독립을 위해 귀환정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재건에 매진했습니다. 그런데 귀환세력이 넘어야 할 큰 산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재건을 위해 페르시아가 약속했던 물적 지원이 더디었습니다. 결국 23년 만에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었는데 귀환세력은 그 지난한 세월을 견뎌야 했습니다. 둘째는 유대인 중에 귀환에 동참하려는 동족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척박한 광야에 우뚝선 예루살렘 산지보다 페르시아 유프라테스 강가의 기름진 땅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귀환세력은 야훼사상으로 그들을 재촉하고 설득해야 했습니다. 셋째는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던,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의 갈등이었습니다. 귀환하면 땅을 차지해야 했는데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미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느헤미야, 그리고 에스라, 학개, 말라기, 그리고 제3이사야그룹 등 귀환세력의 지난한 노력 끝에 결국 예루살렘이 재건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풀어야 했던 산더미와 같은 과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배타적인 유대주의가 형성되고 말았습니다. 무너진 성전의 터, 그 무()의 자리에서 유()를 창출해내야 했기에 시온 중심성을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후대에 배타주의적인 순혈주의를 득세시키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물론 귀환세력이 원했던 것은 아니었겠습니다만, 예수님의 시대 때 유대인이 사마리아를 적대하며 터부시 하게 된 계기를 제공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재건을 향한 귀환세력이 끼친 영향력은 강렬했고, 그 이데올로기를 분파적으로 이용한 이기적인 세력들이 기득권으로 등극하는 역사가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이같은, 의도치 않은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만, 이스라엘 역사에서 귀환과 재건은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재건은 단순히 유대민족의 물적토대 복구에 그친 것은 아닙니다. 귀환세력이 강력하게 추진했던 그들의 순수한 목적은 야훼사상의 정립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포로지에서 새롭게 성찰한 야훼사상의 재정립이었습니다. 새롭게 성찰한 야훼사상은 야훼를 팔레스타인의 히브리 부족신에서 우주적 정의의 신으로 진화시킨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재건은, 자기의 백성일지라도 정의를 행하지 않으면 야훼는 심판하신다는 진화된 사상의 토대이기도 한 것입니다. 1성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포로기 시절에 등장한 성서편찬그룹으로 제사장(priest)그룹이 있음을 밝혀내고, 그들에 의해 각색되고 추가된 내용을 “P문서라고 구분합니다. 1성서는 전반적으로 “P문서로 업그레이드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것은 예루살렘 재건의 중요한 의미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본문 전반에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3절에서 5절까지의 본문에서,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놀라움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놀라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 백성이라도 정의를 실천하지 않은 백성에게 하나님은 심판하신다는 점입니다. 야훼는 이스라엘만을 지키는 신이 아니라 우주적으로 정의의 신임을 각성시킨 놀라움 입니다.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받았다고 성찰한 것입니다. 또 다른 놀라움은, 페르시아 고레스 황제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귀환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놀라움 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스라엘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오신 하나님이 예루살렘 재건이라는 또다른 놀라움을 보여주실 것이라는 기대감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정의의 길로 회개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레헴), 재건의 희망을 기대하는 제3이사야의 소망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전제되어 있지만, 3이사야에게는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와 같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더 큽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복음서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만, 1성서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경우는 오늘 이사야서 본문 외에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포로기 중에 성찰하여 새롭게 고백한 아버지,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그리고 백성이 회개할 때 구원을 베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아버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임을 믿기에 예루살렘 재건을 기대하고 희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부터 교회의 새로운 계절, 대림절기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기도하면서 신앙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아기 예수는 인류 구원의 희망입니다. 정의와 평화로 세상을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아기 예수님을 모실 우리의 마음을 따뜻한 말구유로 조각하는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이 기다림의 계절에, 이스라엘이 포로기 중에 새로이 성찰하며 야훼사상을 진화시켰던 것처럼, 그 같은 혁명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놀랍게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대림절,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고 한층 더 깊어지고 진화하는 절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희망은 절망으로 둘러싸인 것입니다. 숨막히는 심연과 같은 절망에서 희망의 숨통을 여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불가능한 가능성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길어올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한 제3이사야와 같이,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하시다는 믿음 안에서 우리의 희망은 가능합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이 계절에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대림절, 기다림 가운데 깨어있는 기도로 이 땅에 한 줄기 평화의 희망을 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쟁으로 물든 팔레스타인과 전쟁위협에서 해방하지 못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하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대림절이기를 바랍니다.

 

3이사야는 성전 재건을 목표로 한 본문인 반면, 복음서의 소() 묵시록이 되는 오늘의 마가복음서의 본문은,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배경이 된 본문입니다. 포로지에서 돌아온 순수했던 귀환세력의 열망과 다르게 배타적 순혈주의로 권력화된 성전체제를 향하여 예수님은 다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신 후 오늘의 묵시록이 이어졌습니다. 두 본문은 성전의 재건과 파괴라는 대조점이 있지만, 하나님의 섭리의놀라움신실하심은 대응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굉장한 건물 아닙니까?” 하며 제자들은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며 성전의 종말을 예언하십니다. 제자들과 같이 저 견고한 성전체제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랄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서 배우라고 하시면서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며 종말의 도래를 확약하십니다. 그 말씀에서 다시금 신실하심을 읽게 됩니다.

 

종말의 때에 불의한 체제는 종식되고 선택된 사람들과 함께 그의 나라를 시작할 것이므로, 예수님은 언제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림절, 기다림 중에 평화를 위해 기도하려는 것은 예수님의 그 말씀, “깨어 있으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이 대림절에, 깨어 있고자 평화를 위해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우리는 초대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초대, 그 부르심을 받아 우리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 은사(charisma)입니다. 나의 결의로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그 은사로 말미암아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은 사도 바울로부터 시작된 오랜 신앙고백입니다. 이 같은 신앙고백은부르심을 받고, 은사를 확인하여,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공동체라는 교회론으로 확장됩니다. 은사를 자기만족으로 여기며 자랑하는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은사를 자기의 것으로 도취하여, 부르심을 받고 보냄을 받는 것을 망각함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은사를 자랑하지 말고 은사를 주신 분을 찬양하기를 권면하였습니다. 선물에 만족하는 자기 감각에서 벗어나서 선물을 주신 분의 심정에 연결되도록 권면한 것입니다. 그리하면 부르심과 보냄을 받는 자임을 스스로 인지하게 되고 선물의 기쁨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깨어있음의 또다른 표현이겠습니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세상의 평화를 위해 깨어 기도하는 우리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마음자리에 아기 예수님을 따뜻하게 모실 수 있는 기다림의 계절이 되시기를 빕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게 해주셨습니다.” (고전1:9)

희망을 약속하신 분, 신실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계절

이 땅에 평화가 있기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기다림 중에 가난한 마음 가다듬고 기도하는 우리에게

더 큰 은사를 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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