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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하나님께로 가까이 | 김희헌 목사 | 2021-09-19

by 김희헌 posted Sep 19, 2021 Views 15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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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09-19

하나님께로 가까이 (31:10-31, 3:13-4:4,7-8, 9:30-37)

창조절 3, 한가위 감사주일 (210919)

 

추석을 앞두고 감사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현실은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 피로감이 누적된 소상공인들의 고통이 큽니다. 벼랑 끝에 몰린 자영업자들의 극단적 선택이 이어지고 있다는 뉴스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사회적 불균형을 해소하는 과감한 처방을 만드는 지혜가 우리 사회에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거리두기 4단계가 계속되어서 떨어져 지내는 가족들과 함께 모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명절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다 보니 울적한 마음도 생깁니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죠. 가부장적인 문화가 고스란히 나타나는 때가 명절이다 보니 그 후유증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명절 기간에 벌어지는 뜻밖의 사건들마저 그리워집니다.

마음을 풀기 위해 우스갯소리를 하나 하겠습니다. 나이가 들어 몸이 불편해진 어머니에게 세 자녀가 있었답니다. 고생하셔서 눈도 잘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위해 자녀들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첫째는 큰 집을 사드렸고, 둘째는 고급 승용차와 운전사를 보냈으며, 셋째는 말동무가 되기를 바라며 잘 훈련한 앵무새를 보냈답니다.

선물을 받은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고맙다 하시면서, 첫째와 둘째의 집과 차는 돌려보냈습니다. 식구 없는 자신에게 큰 집은 필요 없고 관리하기도 어려우며, 승용차는 탈 일이 없고 운전사도 부담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선물은 참 맘에 들었다며 말씀합니다. “셋째야, 네가 보낸 닭은 정말 맛있었다.”

때로는 서로의 기대와 바람이 어긋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사랑이 익어갈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각자의 삶에서, 가정에서, 우리들의 일터와 신앙공동체에서 때로는 바람대로 되지 않고 엇갈리는 현실을 경험합니다. 그럴 때도 생명을 품은 지혜가 우리 삶을 사랑의 힘으로 이끌어가기를 바랍니다.

 

[생명력 있는 지혜 / 잠언 3110~31]

오늘 제1성서 본문은 오해가 많은 내용입니다. 저자의 교훈과 독자의 해석이 어긋나기 쉽습니다. 특히, 명절에 부엌에서 수고해야 했던 주부들에게는 탐탁지 않은 내용도 많습니다. 여성 예언자로 의인화된 지혜의 목소리가 그 마지막 장을 이렇게 끝맺는 것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이 찬양하는 유능한 아내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부지런히 손을 놀려 일하기를 즐거워하며”(13), “먼 곳에서 먹거리를 구해오며(14),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식구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며”(15), “허리를 동여매고 억센 팔로 일을 하며”(17), “밤에도 등불을 끄지 않고일합니다(18). 그런데, “남편은 원로들과 마을회관을 드나들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라고 하니, 마치 가부장제가 심한 시골의 명절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젠더 감수성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표현이 있습니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오늘 본문이 아내의 윤리나 여성의 처신에 관한 계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근본적인 지혜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잠언의 첫 장에 나온 내용과 대구(對句)를 이루며 마지막 장인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데(31:30), 그것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1:7)”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잠언은 지혜를 뜻하는 히브리어 여성명사 호크마를 의인화하여 말을 이어가고 있는데, 오늘 본문은 그 지혜에 관한 결론적인 내용입니다.

본문을 더 가까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10절에서 유능한 아내’(capable wife)로 번역한 내용에 관한 부연설명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어 단어 에셋 하일’(ê·šeṯ ḥa·yil)은 본래 강인한 여성’(strong woman)이라는 뜻입니다. 지혜를 여성으로 의인화한 잠언의 맥락에서 이해하자면, 그것은 생물학적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강건한 지혜에 관한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지혜는 가부장적 힘의 논리가 아니라 마치 모두의 종으로서 고난은 자처하는 여성의 통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잠언은 용기 있게 난관을 헤쳐가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서 생명을 살리는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부분은 생명을 살리는 지혜하나님을 경외하는 삶과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본문에 표현된 강인한 여성의 부지런함은 세상에 대한 종속이 아니요, 그녀가 보여주는 관대함은 강요된 굴종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을 생명력 있게 섬기는 것이요, 궁핍한 사람을 향해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잠언의 이 가르침에는 인생의 물음과 도전이 있습니다.

 

[누가 큰 사람인가? / 마가복음 930-37]

복음서 본문을 보면, 예수의 제자들도 큰 물음을 갖고 논쟁을 했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관심은 스승의 뜻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은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것이었는데, 제자들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두려워서 묻지도 못했습니다. 대신 그들을 사로잡은 질문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가부장제도의 힘의 문명, 약자를 억누르는 강자의 문화가 빚어낸 물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주신 가르침은 제자들의 관심과 물음의 방향을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가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약자를 용납하는(δέχομαι, accept/welcome) 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낮추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것은 그동안 인류문명이 누가 큰 사람이냐고 묻는 강자의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관심은 제자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비 문명으로 파괴된 생태계를 경험하면서 과거의 기준을 유지할 수 없음을 느낍니다.

기후위기가 더욱 깊어진 내일에는 어떤 사람이 큰 사람으로 여겨질까요? 지난 시대의 큰 사람은 더는 큰 사람으로 여겨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큰 사람이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코로나로 답답했던 지난여름은 세계적으로는 산불의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시베리아에서 170차례나 발생한 산불은 묵시록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여름 기온이 섭씨 38도까지 올라가며 무려 16만 제곱킬로미터, 남한 면적의 약 1.5배에 이르는 면적이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었고, 그 연기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북극까지 흘러갔습니다. 캐나다 서부에서는 50도가 넘는 폭염이, 이상기온, 미국과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거대한 산불이, 중국의 홍수와 일본의 산사태, 동토층이 녹는 극지방에서 이산화탄소보다 온실가스 효과를 30배나 더 내는 메탄가스가 방출되는 등, 오늘의 기후위기는 요한계시록이 그려낸 묵시록의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미래는 어떻게 다가올까요? 과연 인류의 노력으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의미 있는 희망을 만들어내기에는 이미 늦은 걸까요? 아마 우리의 길은 그사이 어디쯤 있을 것입니다.

다음 달에 출간될 책의 서평을 부탁받고 미리 읽은 책이 있습니다. 제목은 <묵시록적 종말에 맞서서>입니다. 저자는 몇 년 전에 우리 교회를 방문한 미국 신학자 캐서린 켈러 교수입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일곱 장면으로 구분하여, 오늘의 기후위기 상황을 대입하여 깊이 있게 그려냅니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은 미래에 대한 일곱 가지의 그림을 그린 뒤에 열린 물음을 던지며 마칩니다. 그것은 어떤 미래를 향해 살아가겠느냐는 물음입니다. 그 책이 인류의 미래로 그려낸 일곱 가지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모든 인류의 멸종입니다. 인류가 이제껏 해오던 방식대로 살아갈 경우 불가능하지 않은 미래입니다. 여태껏 인류는 다른 생명체와는 다른 예외적인 존재로 여겨졌고, 인간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라면 다른 생명체의 멸종도 불가피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인류 예외주의로 인해 인간 자신의 종말을 맞게 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그림은 가까스로 멸종을 피한 일부 생존자들이 야만에 가까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대한 파멸 이후, 문명과 예술은 사라지고, 종교와 경전은 거추장스러워지며, 기술공학도 사라진 원초적 생존의 야만 시대를 맞는 것입니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극소수의 부유층이 자신들만의 사유지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죽게 되지만, 모두 죽지는 않습니다. 땅을 경작할 노예와 특권층을 보호할 군대와 반란을 진압할 무기에 의존한 반() 인도주의 시대가 오는 것이지요. 그것은 계급과 인종 차별이 노골화된 체제입니다.

네 번째는 오늘날의 북반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선택된 사람들만이 하이테크 기술문명이 통합된 사이버-유토피아를 구축하여 포스트-휴먼 시대를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신체 한계를 기술공학적으로 극복하여 멸망의 시대를 견딘다는 발상인데, 그런 기회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며, 인류는 진화한 호모 데우스와 그렇지 않고 멸종해가는 사람들로 양분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 시나리오는 대멸종의 시대에 볼 수 있을 부정적 모습입니다. 이와는 다른 세 가지의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그것 역시 비록 묵시록적 현실을 피할 수는 없지만, 의미 있는 대처가 시도되는 방안들입니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는 기후 재앙으로 문명이 붕괴한 후 공공성의 윤리가 대부분 파괴된 상태에서, 최소한의 도덕적 공간이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시들보다는 작은 규모의 농업 공동체, 생태 마을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그림은 요한계시록이 그려낸 우주-묵시록(Cosmocalypse)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인간과 자연이 끔찍한 대격변을 겪은 후 근사한 새 하늘과 새 땅이 건설된다는 시나리오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마지막 그림은 최악의 파국을 겨우 모면하지만 어리석은 행위의 대가를 치르면서 생태문명을 향해 비틀거리며 가는 것입니다. 녹색 정책을 도입하여 탄소 자본주의를 규제하면서, 지구 온난화를 2도 상승 정도에 머물도록 막아내는 것입니다. 땅에는 조율된 활기가 어느 정도 유지되도록, 사회적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나무를 심고, 인구 곡선을 조정하고, 핵전쟁을 피하면서, 도시와 시골이 서로 돕는 생태 문명의 방향으로 더듬더듬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앞에 미래에 대한 이런 가능태들이 있다고 할 때, 다시 복음서로 돌아가서, 예수의 제자들이 했던 논쟁 주제를 떠올려 봅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우리의 미래는 새로운 큰 사람이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따라 다르게 펼쳐질 것입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로 / 야고보서 313~ 43, 7~8]

야고보서 본문은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지혜롭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본문은 두 가지 종류의 지혜를 대비합니다. 하나는 땅에 속한 지혜요, 다른 하나는 위에서 오는 지혜입니다.

땅에 속한 지혜는 시기심과 이기적 야망이 만들어낸 지혜입니다. 그것은 결국 혼란과 악행으로 이어집니다. 반대로, 위에서 오는 지혜는 하늘의 지혜입니다. 그것은 순결하고, 평화스러우며, 친절하고, 온순하며,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며,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7) 그것은 정의의 열매를 거두는 지혜요, 그 씨앗은 평화입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평화를 뿌려서 정의를 열매로 거두는 지혜입니다.

본문은 이어서, 우리 가운데 싸움과 분쟁이 생기는 까닭은 위에서 오는 지혜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또 구한다 하면서도 쾌락을 누리는 데 쓰려고 잘못 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본문이 요청하는 마지막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위에서 오는 지혜를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화의 씨앗을 뿌려 정의의 열매를 거두는 삶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가 명동 예배당 건물 벽에 오랫동안 내건 현수막 가운데 하나는 오늘 야고보서 본문에서 따온 구절이었습니다. 가운데 현수막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습니다. ‘정의를 심어 평화의 열매를!’ 야고보서 318절 말씀을 바꾸어 다른 강조점을 둔 것입니다. 성서 본문은 평화를 심어 정의를 거두라고 했지만, 우리는 정의를 심어 평화를 거둘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정의가 강조된 정열의 시대를 보여주는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의 신앙이었습니다.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우리에게는 먼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본문은 그것이 정의의 열매를 얻을 때까지 평화의 씨를 뿌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위에서 오는 지혜로 살아가면서, 가까이 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위기의 시간을 지날 때는 위에서 오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얼굴로 정의가 임할 때까지 평화의 씨앗을 뿌리십시오. 창조절의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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