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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역사의 유월절 | 김희헌 | 2020-09-06

by 김희헌 posted Sep 06, 2020 Views 19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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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09-06

역사의 유월절 (12:1-14, 13:8-14, 18:15-20)

2020.09.06. 창조절 첫 번째 주일

 

[2020년 창조절 주제, 지구의 희년]

이번 주부터 교회력으로는 창조절이 시작됩니다. 이 기간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묵상이 중심주제입니다. 우리 교단은 오래전부터 삼위일체력을 따라 교회의 절기를 구분하여, 9월부터 석 달간을 창조절로 보내왔습니다. 이는 신학적으로 좋은 시도입니다.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그리스도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창조절을 별도로 지키지 않고 대림절 전까지 성령강림절을 연장하여 보냅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비롯한 기독교 연합기구들은 이러한 교회력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창조절에 관한 중요성을 점차 강조해왔습니다.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동방정교회 디미트리오스 총대주교의 제안이 있던 1989년부터입니다. 91일을 창조에 관한 묵상과 기도의 날로 공포한 것입니다. 개신교 주요 교단이 그 제안을 수용하기 시작했고, 2015년에는 가톨릭의 프란시스코 교종도 수용함으로써, 이제는 보수적 개신교를 제외한 22억 명에 이르는 세계 기독교가 창조절’(Season of Creation)을 지키고 있습니다. (2020 Season of Creation Steering Committee 제공 자료)

올해 세계교회가 묵상하는 창조절의 주제는 지구의 희년’ (Jubilee for the Earth)입니다. ‘희년’(Jubilee)은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율법의 가르침으로서 50년마다 완전한 해방과 평등을 선언하는 법령입니다. 가난해서 땅을 빼앗긴 사람들, 노예로 팔려간 사람들, 이들의 땅과 신분을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성서 공동체의 이상이 희년 정신에 담겨 있습니다. 이 사상은 포로기 시대에 만들어진 성결법전(17~26)의 핵심적인 가르침으로서, 포로기 이후 새 나라 건설의 꿈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전 지구적 재앙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구의 희년이라는 창조절 주제는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코로나의 감염인구는 3천만 명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충격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확진과 발병에 관한 두려움을 느끼는 만큼, 그 두려움 너머에는 문명전환의 거대한 요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청되는 변혁이 근본적인 것일수록 그것을 이루기 힘들 것이라는 비관적인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정말로 우리 세계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이 물음에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역설적으로 우리가 겪는 이 고통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비슷한 문제를 경험해왔고, 그 경험에 익숙할수록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을 암묵적으로 공유해온 것입니다.

사실 코로나 사태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만은 아닙니다. 자연을 약탈해온 소비 문명이 언젠가는 인류의 삶 자체를 파괴하는 지점에 이를 것이라는 불안은 오래된 것입니다. 지구온난화를 가속화 해온 산업 문명이 환경의 역습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경고 역시 자주 있었습니다. 각종 사회적 갈등의 뿌리에는 양극화된 빈부격차와 새로운 신분제도를 도입하는 자본의 악습이 있다는 사실을 이젠 누구나 압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익히 알면서도, 인류는 오랫동안 익숙한 무능에 빠져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맞고 있는 사회적 갈등, 기후환경 위기와 코로나 사태는 인류가 눈앞의 욕망을 좇아 살아온 결과입니다. 창조절 묵상 주제인 지구의 희년은 그런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을 요구합니다. 익숙했던 과거의 낡은 껍질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1성서의 본문 출애굽기의 가르침을 적용해본다면, 종살이의 시대를 끝내고 자유의 시대로 나아가는 역사의 유월절에 관한 믿음입니다.

 

[재앙의 시대를 건너가는 유월절 / 출애굽기 121-14]

유월절’(passover)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 제국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옛 시대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동시에, 세상에 불어닥친 총체적 파국 너머로 나아가는 길을 걷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이집트의 왕 파라오를 만나서 히브리인들의 해방을 요구하자, 파라오는 거부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으로 이집트를 심판합니다. 재앙이 열 가지나 된 것은 낡은 질서의 속박이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7장부터 11장까지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처음 난 자녀와 짐승의 죽음이었는데, 유월절 의식을 진행할 경우 이 재앙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유월절 의식은 이렇습니다. 흠이 없는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그 피를 집의 문틀에 바르고, 고기는 불에 구워서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빵과 함께 먹되, 마치 곧 떠날 사람처럼 채비하고 서둘러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집트 제국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오늘날에는 유대교인이 아닌 한 이런 유월절의 예식을 문자 그대로 따라 하지 않습니다. 다만 상징적인 예식이 주는 가르침은 이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유월절은 종의 시대를 마무리 짓고, 자유인의 시대로 나아갈 준비를 하는 시간입니다. 평등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인간이 새로 지어지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성서는 열 가지의 재앙을 통과한 후에야 가능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유월절은 특정 종교의 절기가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는 역사의 시간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고통을 겪는 지금이 마치 역사의 유월절을 지나는 시기처럼 느껴집니다. 욕망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열 개의 재앙을 지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촛불혁명을 통해 세워진 정부에서도 민중들의 고충은 변함이 없고, 사회적 갈등은 멈추지 않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쉽게 오지 않고, 낡은 시대의 재앙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월호의 진상규명 작업도 진전이 없고, 불타올랐던 검찰개혁도 지지부진해졌으며, 가짜뉴스를 양산하는 언론의 지형은 여전히 암담하며, 남북관계의 개선작업도 무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둠과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있을지라도, ‘역사의 유월절을 지나는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지어가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공동체를 이루는 본질적인 규칙 / 마태복음 1815-20]

마태복음서의 본문은 공동체의 삶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용서의 규칙에 관한 것으로서, 만일 잘못을 저지른 형제가 있으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절차를 거치라고 마태는 말합니다. 먼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진심으로 충고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을 경우, 한두 사람을 증인으로 데리고 가서 그가 하는 말을 남기라고 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는 동안, 그 뜻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오늘 본문과 연관된 내용은 마가복음에는 없고,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어록자료(Q복음서)입니다. 문제는 마태가 왜 내용을 길게 편집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내용은 본래 간략합니다.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 주어라.”(17:3) 그런데 마태는 세부항목을 늘려서 내용을 확대했습니다.

마태의 편집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은 마지막 절차에 관한 예수의 말씀입니다.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는 건 작은 규칙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는 이방인의 친구였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도 받아들인 분입니다. 그런 예수가 작은 규칙에 매여서, 누구를 정죄하는 일에 핏대를 세우지는 않으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마태가 정말로 중요하게 여긴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으려면,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고유한 목소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18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저는 이것이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공동체를 이루는데 필요한 핵심규칙이라고 봅니다.

마태는 앞에서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16장을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그를 축복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있었던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은 세 개의 공관복음서 모두에 나옵니다. 그러나 땅과 하늘이 서로 매고 풀리는 관계에 대한 언급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없습니다. 오직 마태만 그것을 큰 축복으로 전하고,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공동체를 이루는데 필요한 핵심사항으로 제시합니다.

마태가 중요하게 여긴 규칙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세리처럼 취급하며 질서를 잡는 작은 정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가 본질적으로 생각한 문제는 땅의 일을 하는 것이 하늘의 뜻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더욱 큰 정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적인 집착으로 인해 공동의 선을 망쳐버리는 관계의 실패에 대한 교훈입니다. 필요한 것은 진영논리에 얽힌 작은 충성심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탄력 있고 정의롭게 세우는 삶입니다. 그것은 하늘에서도 매고 풀릴 것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를 위태롭게 몰고 가는 것은 단지 코로나 사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집단의 과도한 행위입니다. 종교적 가르침마저 목적달성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일부 교회의 모습은 우리 시대의 깊은 위기를 대변합니다. 하늘과 땅의 조화를 이루는 삶을 통해 시대의 위기를 이겨내고자 했던 마태의 가르침이 오늘 우리의 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율법의 완성 / 로마서 138-14]

성서가 요구하는 삶을 명쾌하게 전하는 바울의 가르침은 오늘 로마서 13장 본문에 나옵니다. 바울은 그것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표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8~10)

그런데 이 사랑은 때를 분별한 지혜로운 사랑이어야 합니다. 깨어있는 종교는 를 분별한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충실한 신앙공동체는 지금이 무엇을 해야 할 때인지를 분별합니다.

메시아의 시간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감추어진 시간, ‘카이로스’(καιρός, 11)입니다. 교회는 어두운 역사 속에서도 카이로스의 시간을 분별함으로써 살아갑니다. 그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이 완성됩니다. 그것은 고난받는 이들의 한숨 속에서 하나님의 탄식을 듣고, 고통에 흔들리는 세미한 바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지혜로운 종교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시적으로 표현합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말입니다.

반면, 사랑의 계명을 갖고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차별과 혐오에 휩쓸리는 한국교회는 잠에서 깨지 못한 종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낡은 교리와 초보적인 관념에 매여서, 고난받는 이웃과 차별받는 소수를 저주하는 일에 맛을 들인 교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수의 향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깨어나야 합니다. 전광훈 씨가 얼굴이 된 한국교회,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며 혐오 종교의 보루가 된 한국교회, 큰 각성과 전환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지난주에 교회 앞에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행진을 하겠다는 작은 선언입니다. 역사의 유월절을 지나는 때를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다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첩된 어려움은 삶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의 행실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은 믿음의 공동체가 새날을 낳을 것이라는 역사의 기대는 더욱 커졌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창조절의 은총을 누리면서,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힘쓰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역사의 유월절을 지나며 겪는 진통이 큽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생활이 부서지는 중소상인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일할 곳을 잃은 청년들, 인생의 황혼을 쓸쓸하게 달래는 노인들, 친구를 잃은 아이들, 사회적 고통은 크고 역사의 어둠은 깊어 보입니다. 그러나 창조절의 은혜를 힘차게 누립시다. 빛의 갑옷을 입고 어둠의 시대를 넘어가는 이들을 통해 새날이 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믿음의 행진을 멈추지 말고 이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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