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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ㅣ 김지목 ㅣ 2024-05-19

by 김지목 posted May 19, 2024 Views 2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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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05-19

하늘뜻펴기 20240519 성령강림주일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2:1-21 104:24-34,35b 8:22-27 15:26-27,16:4b-15

 

오늘로 새로운 신앙의 절기를 시작합니다. 성령강림의 사건을 기억하며 성령과 함께하는 삶,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삶,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삶을 소망하는 계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오십일, 오순절 사건으로 기념하고 있는 성령강림절은 유대 히브리의 농경축제 명절에서 유래된 절기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던 것을 히브리 유대민족이 기억하면서, 이날을 칠칠절이라는 명절로 기념했습니다. 칠칠절은 히브리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밀농사를 추수하고 첫 열매로 빵을 만들어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야훼 하나님을 기억한 명절인데, 이 절기가 오순절, 성령강림절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절기를 맞이하며 성령의 임재를 기다립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우리 마음의 어려움, 그 거끌거끌하게 메말라버린 우리 심령에 촉촉한 은혜의 단비가 부어져서 생기를 회복할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우리네 공동체적 삶에 평화를 실현할 수 있도록 우리를 사랑으로 엮으실 성령의 역사를 기대합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평화와 정의가 있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믿으며, 우리 사회의 집단적인 운동에 성령의 임재를 소망합니다. 성령의 살아 숨쉬는 불길 같은 역사가 이 시대를 생명과 정의와 평화로 변화시켜 주는 힘임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성령 임재의 사건은, 하늘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으로 내려오심 입니다.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며,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의 희망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성령 임재의 사건입니다. 성령강림의 믿음 안에서 교우 여러분의 삶에 생기가, 우리 공동체에 넘치는 사랑, 이 나라와 민족 위에 정의와 평화가 새롭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하나님의 호흡으로 불어오는 진리의 영을 우리가 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그 나라를 희망하는 이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최초의 성령강림 사건, 곧 교회가 처음으로 경험한 성령강림절에 대해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에서 보도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사건으로 공동체가 변화되고 생동하는 경험이었습니다. 변화란 편협함에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한계에 갇힌 편협함에서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깨달은 변화였습니다. 자기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지경을 넓혀서 더 큰 자기를 형성할 수 있게 합니다. 이같은 사랑의 역사가 많아짐으로써 하나님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순절 최초의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변화와 생동으로 하나님나라를 만들어갈 수 있음을, 우리 교회에게 그 사랑의 사명이 맡겨져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으로 유대민족의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는 절기로, 그리고 유월절 후 50일이 지난 오순절은 성령강림의 절기로 바뀌게 됩니다. 처음의 그리스도인은 야훼사상과 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재조명하며 하나님나라 운동을 개시했습니다.

 

성령 임재의 사건이 그 발판이었는데, 하늘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온 집안을 가득 채웠고, 이내 불길이 일더니 혀같이 갈라져서 제자들 위에 내려 앉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성령에 충만하여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최초 성령강림사건인 이 장면은 하늘과 땅, 곧 하나님과 제자들이 연결됨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임함으로써 연결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글롯사)이 이 연결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불길의 혀로 묘사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연결되자 저마다 방언을 말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가 연결되는 놀라운 사건이 이어지게 됩니다. 제각기 자기 지방의 말, 본문에는 최소 15개 지역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 생생하게 알아듣는 신비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이 사건을 놀라움의 사건으로 보도합니다.

 

하늘과 땅의 연결, 그리고 사람과 사람 간의 연결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된 이 종교적 사건은 실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놀라움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는 일,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사람과 사람이 한 뜻을 품을 수 있는 일, 이러한 일은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질 때가 많은 일들입니다. 하늘과 땅이 분리되어 비극이 시작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반목과 갈등이 우리 현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이러한 비극과 고통은 우리가 체험하는 일상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가 처한 비극의 현실과 고통의 일상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임재하였습니다. 비극과 고통이 지배하는 이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서 하늘과 땅을,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 곧 교회입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을 교회의 생일로 기념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사명이 하늘과 땅의, 사람 간의 연결이니 우리 신앙인이 주력해야 할 것은 소통이겠습니다. 소통은 방언으로 이루어집니다. 때문에 방언은 소통을 가능케하는 놀라운 언어, 소통을 증명하는 공동체적인 합의, 공동의 지혜의 선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방언은 하늘과 연결되어 성령(글롯사)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사람 사이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나열하는 것을 방언의 은사라고 평가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어떤 입신상태를 증명하는 체험으로만 이 방언을 이해한다면 성서가 말하는 이 방언의 본질을 간과하게 됩니다. 방언의 본질은 하나님과 연결되고 또 사람들 간에도 연결된다는 소통에 있습니다.

 

본문에서 방언은 성령을 받아 하나님과 연결되어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된 말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 글롯사'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사람들에게 들려질 때 각 지방의 말로 이해하게 될 때는 디알렉토'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7절과 8절에,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여기에서 갈릴리 사람의 말이 글롯사'라면,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은 디알렉토'가 됩니다. 즉 나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진실한 깨달음으로 글롯사'로 말하는데, 성령을 받은 다른 사람들은 나의 말을 디알렉토'로 듣는다는 말입니다. 나의 깨달음과 체험을 기반으로 하는 말을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놀라움의 역사, 이것이 방언의 역사입니다.

 

나의 말 글롯사'가 타인의 귀 디알렉토'가 되어 소통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는 성령의 임재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저마다 다른 환경에서 살아오고 인생의 다른 체험과 깨달음을 안고 이곳에 함께 모였습니다만, 성령이 우리에게 임재하시면 저마다의 글롯사'디알렉토'로 이해하면서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을 받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방언에 담긴 신비함입니다.

 

오늘 성령강림절, 우리 공동체가 방언'의 신비를 늘 체험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는 체험이 우리에게 더욱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서 우리 서로의 마음이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위하여 늘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서로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상황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을 더 내세우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늘과 연결되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러나 서로의 말에 차이가 있더라도 성령의 임재로 하나님의 마음에 닿아있는 사람들의 대화는 서로 통할 것입니다. 성령은 나를 바라보는 제3의 눈으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 자신을 살피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 앞에 자기 의를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의 의'마저 자신의 뜻대로 판단하면서 자기 의'를 고집하면 고통의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 가운데 우리 공동체가 늘 하나님과 연결되고 또한 우리 서로 소통하는 방언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성서에서 성령은 히브리어로 루아흐'로 명명합니다. 2성서 헬라어로는 프뉴마'라고 표기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세상의 창조에 관여하고, 세상 어느 곳에나 계시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깨닫고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하는 분입니다. 또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받게 되는 영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안내하면서 필요한 은사를 내려주시는 분이며 사랑의 열매를 맺도록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파라클레토스' 곧 보혜사로 성령을 소개하십니다. 곧 다시 오겠다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이 지연되자 그 약속을 확신하지 못하던 당시 상황에서 요한공동체가 대답한 성령론이 바로 보혜사(파라클레토스)였습니다. 526절에,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현실에서 그를 증언할 존재, 예수가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보이는 것 너머의 세상을 보도록 하며, 예수를 증언하는 삶을 살도록 옆에서 부르는' 존재가 바로 보혜사 성령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사랑, 말씀, 보여주신 행실, 하나님나라의 약속. 그 진리를 대변하고 깨닫도록 도우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신 분입니다. 성령강림을 늘 기다리는 우리는 이 진리의 영을 기다립니다. 13,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를 인도하실 진리의 영을 우리는 기다립니다. 우리가 판단하고 정의 내리는 영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의 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영,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는 영, 그래서 우리를 깨닫도록 가르쳐주시는 진리의 영을 우리는 기다립니다.

 

진리의 영은 고통으로부터 해방하는 길로 우리를 안내하십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에서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견디는 모든 피조물이 구원을 갈망하고 있고, 참고 견디는 가운데 성령께서 우리의 약함을 도우신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대받고 핍박받는 민중들과 함께하시면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던 것처럼, 성령은 구원을 갈망하면서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의 약함을 도우시는 분입니다.

 

이렇듯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은 우리의 약함 가운데 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때도 제자들의 가장 약한 때에 보내주셨습니다. 더이상 스승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될 때, 제자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때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진리의 영은 신음하는 피조물의 그 약함을 도와 주시기 위해 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영을 만나기 위해, 피조물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현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의 약함을 도우시는 진리의 영을 만나기 위해, 세상의 가장 중심 곧 아픔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세상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고통받는 피조물과 하나님을 연결하고, 메마른 마음에 생기를, 대립과 반목하는 곳에 평화의 방언을, 하나님의 질서가 무너진 곳에 정의를 위해 선교하도록 우리를 안내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성령님과 같이, 세상의 고통에 신음하는 피조물, 우리 이웃을 위하여 우리 또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연대해야 합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그렇게 우리의 발걸음이 옮겨집니다.

 

 

침묵하겠습니다.

 

.....

 

(파송사)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이 세상이 다시 창조됩니다. 일그러진 이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평안히 가십시오. 하나님나라의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의 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큰 일을 계획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호흡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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