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뜻펴기 20230903 창조절1
“생명을 나눈 사랑"
출3:1-15 시26:1-8 롬12:9-21 마16:21-28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광야에서, 마를 대로 다 말라버린 작은 떨기나무는 그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발화하여 타버리곤 합니다. 왕왕 발화하는 떨기나무를 피해 양떼를 몰던 양치기 모세는 호렙산을 오르는 광야길에서 발화된 하나의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합니다. 놀라운 비일상의 시공간으로 빨려 들어간 모세는 그곳에서 야훼 하나님을 만나고 야훼의 일을 대언하는 대행자가 됩니다. 오늘 출애굽기 본문,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 나타나신 야훼 하나님이 모세를 지도자로 부르시는 이 장면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인간이 신의 힘을 사용하려면 그 신의 이름을 알아야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밝혀 주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나는 곧 나다." 라고 답하십니다. 이 대답은 대화를 성립시킬 수 없는 대답입니다. 다른 성서 번역본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는 모세와의 대화를 성립시키는 대답이 되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라고 하는, 없는 단어를 가져다 붙인 오역입니다. “나는 곧 나다.” 라는 하나님의 대답은, 다른 신들처럼 내 이름을 안다고 해서 인간이 함부로 남용할 수 있는 그런 신이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신명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은 간악한 인간으로부터 망령되게 활용되는 것을 방지한 것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타자를 노예로 삼고 전쟁까지도 불사하는 그런 반종교적인 헤게모니에 이용될 수 없는 신임을, 야훼 하나님은 자기소개 첫머리에 강하게 내비친 것이 “나는 곧 나다.” 라는 표현입니다.
성서는 야훼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의 잇속에 이용당하지 않는, 독립된 의지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진보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을 때 얻게 된 성찰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했을 때 자기 백성이라도 심판하시는 정의의 신이다." 라고 고백했던 진화된 신앙을, 성서 전승자들은 오늘 본문에도 그 성찰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나는 곧 나다.” 라고 독립된 의지를 가진 신임을 밝히고 나서, 하나님은 “당신은 어떤 신이십니까?” 하는 모세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한 신이다." 라고 답하십니다. 여기에서 야훼가 어떤 의지를 가진 신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세상을 약속하신 하나님, 떠돌이들을 보살피시고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 연약한 자들에게 사회보장법이 되도록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이, 모세가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서 만난 야훼였습니다. 그런 야훼이셨기에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며 고통당하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견디지 못하시고 모세를 찾아 떨기나무에 태우지 않는 불길로 현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곧 나다.” 하는 하나님의 서두의 대답은 “나는 너희 떠돌이(히브리)와 함께하는 신이다.”(I am who I am with you.) 라고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14절,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에서 강조된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행하셨던 사건들이 함축되어 있는 상징언어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존재를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로만 한정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하셨던 사건들의 동영상 파일들이 “나"라고 하는 폴더에 저장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물 주변에 처소를 얻지 못해 일용할 양식과 한 모금의 물을 얻지 못하면 연명할 수 없었던 가련한 사람들의 생명을 보살피며 새로운 희망으로 격려하셨던 하나님의 사건들이, “나"라고 하는 상징어에서 재생되어야 합니다.
모세에게 밝히신 야훼의 “나", 그 종교적 상징어 안에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 생명과 사랑, 약속과 희망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나"로 소개된 야훼는 백성의 아픔에 공명하는 신입니다. 그러한 야훼 “나"는 자비로운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은총의 하나님이며 백성의 생명을 회복시키는 정의의 신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고하는 복음서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마태복음서 한 권의 성서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대목은 오늘의 수난예고 설화입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서와 누가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난예고 전과 후로 복음서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일례로 전반부에서 예수님의 멍에와 짐은 쉽고 가볍고 마음에 쉼을 얻는 것으로 묘사된 반면, 후반부인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고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수난을 예고하자 베드로가 펄쩍 뛰며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며 만류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고 말씀합니다. 복음서 전반부에서 베드로는 “반석", 곧 믿음의 초석으로 칭찬받던 터였는데, 후반부 들어서자 걸림돌로 혼쭐이 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제자를 꾸짖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헌신과 희생입니다. 자신을 나누는 헌신과 희생, 나뉘어진 존재의 틈에서 생명이 돋아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다름아닌 생명의 소생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사건, 억눌렸던 생명이 회복되는 사건,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이를 위해 헌신과 희생, 곧 십자가의 길이 제시되었습니다. 십자가, 그 헌신과 희생을 결단하는 사랑으로 생명을 살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인 구원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일, 곧 생명을 잉태하는 사랑을 수행하기 위해 예수님은 수난을 결단하고 제자들에게 예고했건만, 베드로는 헌신과 희생의 결과를 자기목숨의 소진으로만 여겼습니다. 자기 생명만을 생각하기에 그것은 사람의 일이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십자가의 길을 결단하지 않으면, 생명이/구원이 잉태되지 않기에,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사탄의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희생, 몸과 목숨을 드리우는 그 헌신으로 하나님의 일을 결단하신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길을 만류하였으니 베드로는 꾸지람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참 생명을 잃게 되고, 예수님(“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은 참 생명을 찾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출애굽기에서 야훼 하나님의 “나"가 있었듯이,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나"가 등장합니다. 야훼 하나님의 “나"와 예수님의 “나"에 보유된 사건들의 내용은 일맥 상통합니다. 백성의 생명을 소생시키기 위해, 세상의 구원을 위해 고통을 공명하고 십자가의 헌신과 희생을 감내하는 사랑입니다.
민중신학은 예수라고 하는 ‘존재’보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사건’에 집중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서 건져내어 천국으로 옮겨주는 그런 구원론이 그릇된 신앙임을 역설했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사건 안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그 사랑의 사건 속에 내가 현재할 때 구원을 얻는다는 민중신학의 성찰입니다. 그러므로 25절에,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에서 “나"는 2천년 전에 사셨던 예수라는 존재를 가리키는 인칭대명사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종교적 상징어이기 때문에 “나"는 “사랑"으로 바꾸어 읽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25절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초월적인 힘에 의해 이 세상에서 건져진다고 믿는 그릇된 구원관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으로 변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재현하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헌신과 희생, 나를 베풀어 나눈 틈새에서 생명이 돋아나는, 사랑의 구원사건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일이 우리를 통해서 발현되기를 빕니다.
제1성서에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깊이 성찰하고, 그 히브리 전통에서 전승된 신적 사랑을 초대교회 헬라 문화권에 전승하기에 힘쓴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교의 “사랑"에 대해 특별히 강조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유명한 사도 바울의 저작인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습니다. 오늘 로마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사랑의 실천으로 그리스도교인의 본분을 잘 감당하도록 권면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21절 말씀은 오늘 서신서 본문을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거짓없는 사랑, 일관되고 신실한 사랑, 박해 마저도 이겨내는 진지한 사랑을 권면하는 본문의 내용은, 히브리 전통에서 교훈과 잠언으로 읽혀온 보편적인 내용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헬라어 “아가페"로 설명하고 있는 그 사랑은, 희생으로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조건없이 생명을 나누어주는 사랑입니다. 희생과 헌신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마치 해와 같습니다. 태양 자신을 활활 태워서 보내는 열과 빛은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보유하고 있는 에너지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처럼 조건없이 신실하게 제공되고 있는 에너지입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태양 에너지로 충분히 생명을 유지할 수 있건만, 인류의 욕심은 하나님의 은총에 만족하지 못하고 비축된 화석연료, 원자를 소멸시키는 핵발전 에너지를 꾸준히 끌어내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기후재앙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창조절기를 시작하는 오늘, 해결해야 할 기후정의의 문제가 우리에게 산적해 있습니다. 생태위기를 유발한 근원적인 악행, 그것은 인류의 탐욕에서 기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늘에서 매일 내리던 만나를 자기 텐트에 쟁여 두면서 공동체 전체에 썩은내를 진동시켰던 인간의 그 욕심으로 인해, 지구별은 신음하고 있고 수많은 생명종이 매일매일 멸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총에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 태양 에너지에 만족하지 못해 자멸로 치닫고 있는 우리 인류의 탐욕,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를 망각하고 배반한 결과입니다. 모든 생명을 정의롭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습니다.
하늘의 은총에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헌신과 희생의 십자가 결단으로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를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온전히 보전해 나가는 인류가 되기를, 창조절 아침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를 거스르는 것은 베드로에게서 비쳐진 사탄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순응하셨던 것처럼 생명의 순리인 “아가페"의 원리를 지키고 회복하는 일이 우리의 숙명입니다. 이같은 헌신과 희생의 엄중한 결단으로 기후위기를 극복해야 나가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섭리 “아가페" 실천은 기후정의뿐만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서 구현되어야 할 목표입니다. 오늘 로마서의 본문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를 공동체 내에서 충실히 수행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외부인이 아니라 교회 내 단합과 화해와 일치를 위해 독려하는 편지로 보내진 것입니다. 이 서신의 수신자 중에는 우리 공동체도 포함되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보내진 편지로 다시 한번 들어봅시다. 공동체 내에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를 충만하도록 한사람 한사람이 힘쓰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9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10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11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12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13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15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16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18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19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아가페" 하나님의 사랑은 성서가 증언하는 핵심 사상입니다. 성서를 두고 태동한 그리스도교를 세간에서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 무엇보다 우선할 수 없는 것, 우리의 근본으로 삼아야 할 그것, “사랑”입니다. “아가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우리는 공동체로 모였습니다. 사랑으로, 곤고한 우리 삶에 구원을 얻고자 우리가 오늘도 온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모였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잘못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설혹 완벽한 민주주의를 구현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백성의 울부짖음에 공명하신 것은 백성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그리고 십자가 희생의 그 사랑. 자기 생명을 나눈 그 사랑 사이에서 새로운 생명이 소생합니다. “아가페"를 회복합시다. 소생하는 생명의 사건 속에서 구원받으시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침묵합시다.
(침묵)
…......
(파송사)
아가페 그 사랑 안에 하나님의 깊은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 십자가의 신비가 있고 우리의 구원도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아프지만 그리스도를 따라갑시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사랑으로, 편안히 가십시오.
사랑으로,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
사랑
글 - 박노해
노래 - 조국과 청춘
슬픔 가슴 미어지는 비애 사랑은 분노 철저한 증오
사랑은 통곡 피투성이 몸부림 일치를 향한 확연한 갈라섬
사랑은 고통 참혹한 고통 사랑은 실천 구체적인 실천
사랑은 투쟁 쉼없이 가야 할 새날을 향한 눈부신 길이네
온 바다와 산과 들과 하늘이 들고 일어서 폭풍 치고
번개 치며 포효하여 피빛으로 새로이 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사랑은 고요의 빛나는 바다
햇살 쏟아지는 파란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