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희망은 무엇인가 (창 18:1~15, 롬 5:1~8, 마 9:35~10:8)
230618. 성령강림절 3, 향린공동체 성평등주일
지난주에 건축 준공 승인을 마치고 입당 예배를 드리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수년간 어려운 일을 헌신적으로 감당해주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직 잔여 공사가 남았는데, 집을 가꾸어가는 마음으로 함께 힘을 모으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의 삶도 든든히 세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 예배당에 들어온 우리는 보이는 건축만이 아니라 마음의 예배당도 잘 지어야겠습니다. 광화문 시대에 무엇을 할지 그간 여러 방식으로 논의해왔는데, 이제는 하나씩 펼칠 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준비되셨습니까? 이곳에서 어떤 신앙공동체를 세우고, 무슨 일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저 개인적으로는 새 예배당에 입당하자마자 안식년을 떠나게 되어 민망합니다.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는 시간에 반드시 해야 할 역할이 있는데, 하지 못하고 떠나려니 미안하고, 뜻하지 않게 지체된 공사 기간이 야속하기도 합니다. 이제 저에게는 이번 주와 다음 주 두 번의 하늘뜻펴기가 남았습니다. 이 시간은 성서 말씀을 풀이하는 것보다 지난 6년의 경험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무엇을 했는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배웠는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간 향린에서 보낸 시간을 회고하면 저에게 보람과 고통이 교차합니다. 부족한 제가 받기에는 과분한 사랑도 많았고, 견디기에는 너무 큰 고통도 있었습니다. 특히 진보적 교회를 지향하는 신앙공동체의 생활을 통해서, 향린에 오기 전에는 이론으로만 가진 생각이 6년간의 목회 경험에서 확연해지기도 했습니다. 돌아보니, 그걸 배우기 위해서 6년을 지나왔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한, 그것을 배웠으니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준비를 해야 할 때라고도 느낍니다. 오늘은 그 내용을 나누면서, 우리 교회가 광화문에서 펼쳐갈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기후재난 시대의 교회 / 마태복음 9장 35절 ~ 10장 8절]
제가 나눌 말씀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생태적 전환’이라는 과제에 관한 것입니다. 이 과제는 오늘날 가장 중요한 화두라고 할 수 있는 기후 위기의 현실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저에게는 지난 교회 생활에서 뚜렷하게 느껴진 문제이기도 합니다.
도심지 진보적 교회를 표방한 우리 교회에는 비교적 비판적 문제의식을 품은 기독교인들이 모입니다. 그러다 보니, 민주적 교회를 구성하려는 열망이 크고, 그것이 때로는 격렬한 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고민이 컸는데, 저에게는 그 모습이 위기의 전환 시대를 거치는 현상처럼 느껴졌습니다. 미래를 열어가려는 서로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지요.
여러 모양의 목소리를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가 진보를 꿈꾸며 실험해 온 삶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서 몇 년 전 하늘뜻펴기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항적 삶, 해체적 삶, 생태적 삶. 저는 교회에서 경험한 이 삶의 유형을 정리하여 여러 자리에서 발표했고, 얼마 전 교단 창립 70주년 신학대회에서 앞으로 기독교 신학의 방향에 대해 제안할 때도 그 아이디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저항적 인간은 낡은 체제를 전복하려는 변혁적 투쟁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해체적 인간은 억압적 질서에 숨은 폭력성을 민감하게 느끼고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이 두 유형의 인간은 한국 사회가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한편의 잘못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함께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는 기후 위기와 같은 현실 앞에서 그 ‘투쟁과 비판’만으로는 생명 현실을 지탱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하게 된 것이 ‘생태적 삶과 신앙’이었습니다.
제가 향린에서 배운 단 한 가지를 뽑으라면, 앞으로의 교회는 생태적 신앙에 기반한 생태적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교회 생활 경험에서 확연해진 일인데, 그것은 우리 교회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라, 앞으로 점차 가중될 기후재난 상황을 맞을 모든 신앙공동체가 준비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노력은 갈수록 계층과 분야를 망라하여 광범위하게 이루어질 인류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국가 정책을 담당하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정부 정책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인류는 이미 이 위기를 저지할 한계선을 넘었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또 다른 영적인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5년 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1.5℃ 특별보고서>를 발표할 때만 해도 일정한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후 위기를 통제할 수 있는 범위로 최소화하기 위해서 2050년까지 탄소중립(Net Zero)을 달성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커진 듯합니다. 7년 후인 2030년에는 1.5℃를 돌파할 것이고, 2050년에는 2℃, 2100년에는 3℃ 상승할 것으로 추정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2100년에 경험하게 될 ‘거의 확실한’(very likely, 5~95%) 기온 상승 범위는 2.3~4.7℃로 예상됩니다. 만일 기온이 3℃ 상승하면 인간이 견디기 힘든 재난이 닥칠 것이고, 4℃ 상승하면 인간 문명의 종말이 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간 중시한 진보적 화두는 거대한 지구 생명의 위기 앞에서 한낱 작은 문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길 잃은 사람들에게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 하시는데, 정작 앞으로의 세계가 정말 하늘나라에 가까울지 우리는 회의하고 있습니다. 1992년에 IPCC가 지구온난화에 관한 <1차 보고서>를 발간하고, 그 영향으로 ‘유엔 기후변화협약’(UNFCCC)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협약에 따라 매년 ‘당사국 총회’(COP)를 통해 국제 협상을 진행하지만, 지난 30년간 기후 위기에 대한 인류의 대처는 실패했습니다.
앞으로는 어떨까요?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으니 이제는 삶의 방식을 바꿔낼 수 있을까요? 어쩌면 더욱 각자도생의 시대를 파괴적으로 살아가게 되지 않을지 염려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시는 예수의 나눔과 연대의 말씀도 어쩌면 더는 들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최근 심리학회에서 ‘기후 우울증’(climate depression)이라고 표현한 증상이 있습니다. 암울한 미래에 대한 전망이 삶을 덮치고, 무력감과 상실감에 빠지는 경험입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기존의 자기 경험이 쓸모없게 되었다고 느끼는 농부들, 기후 문제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과학자와 환경운동가에게 자주 나타나는 이 증상은 정신건강만이 아니라 몸에도 질환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문제는 자연을 어머니의 품(Mother Nature)처럼 경험했던 기성세대보다 기후로 인한 재난 상태의 자연을 경험한 젊은 세대에게 더욱 민감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미래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자녀를 두지 않는 ‘출산 파업’이라는 용어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인류는 앞으로 어떤 진보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간의 진보는 ‘풍요’와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모두가 더 풍요로운 축복받은 미래를 그려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한국인의 소비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구가 3개 이상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온 상태에서, 더 큰 풍요를 바라며 삶을 계획하는 것은 도덕적 무감각이자 영적 무지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더 가난해지면서도 더 충만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배우지 않으면, 참혹할 미래를 피하기 힘들 것입니다.
기후재난의 시대를 맞는 종교는 그간 설파해온 번영신학과 성공의 약속을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축복을 받는 일은 희망이 되지 못하며, 그 축복을 받는다 한들 실제로는 남에게 짐을 지우는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단지 과학 기술의 발전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습니다. 물질적인 소유의 문제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의 삶 자체에 관한 영적 자세가 더욱 시급한 일이 되었습니다.
[사라의 웃음 / 창세기 18장 1~15절]
창세기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는 ‘절망과 약속’ 사이에서 살아가는 불안한 믿음의 시대에 생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길을 나선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험한 삶을 살았습니다. 기근을 만나고, 가족 해체의 위험과 원주민의 습격 등을 겪으면서 25년을 떠돌이로 살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땅과 자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는 희미해지고 절망과 회의감이 밀려왔습니다. (창 17:17)
그때 야훼께서 나그네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의 장막을 찾아옵니다. 아브라함은 정성껏 그를 환대합니다. 빵을 굽고, 송아지 요리를 준비하여 나그네를 대접합니다. 대접을 잘 받은 나그네는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맘때에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곁에서 이 말을 들은 사라는 ‘늙은 나이에 그런 일이 있겠냐?’ 생각하며 웃습니다. 추궁당한 그녀는 웃지 않았다고 거짓말하지만, 그녀의 웃음은 여전히 남습니다. 이 ‘사라의 웃음’은 현실이 빚어낸 ‘의심의 미소’입니다. 그 미소를 짓지 않았다고 하는 그녀의 부인은, 거짓을 감추는 핑계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아직 저버리지 못한 신비로운 기대를 머금고 있습니다.
현실의 절망과 약속의 기대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라의 미소’는 긴 여운을 남깁니다. 그 미소는 일 년 후 아들 이삭을 실제로 낳게 되었을 때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겠지만, 또한 그 아들이 자라 아버지의 손에서 번제물이 될 위험에 처했을 때도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절망과 기대 사이를 지나는 모든 삶에 깃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성서는 이 ‘사라의 웃음’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불신의 웃음이 아니요, 약속에만 기대어 자신을 잃어버린 상실의 미소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생의 무게를 지고 살아온 인고(忍苦)의 삶이 자아낸 무언(無言)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낯선 이들의 모욕과 위협에 삶을 시달렸던 사라가 헛된 욕망에 지치지 않고, 견뎌내며 빚어낸 미소입니다. 저는 그것이 성서가 기억한 사라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모든 삶이 소중하지만, 또한 그 빛이 바래가는 운명을 피하기 힘듭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붕괴의 과정이요, 사랑한다는 것은 퇴색의 과정이요, 인생이란 소멸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퇴색과 소멸의 한가운데서, 우리 곁을 스쳐 가는 영원한 그 무엇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수밖에” 없기에 삶이 이어집니다. (박노해, “이 무서운 사랑”에서)
종교가 이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인간을 단지 성공과 실패, 축복과 번영의 대상으로 여긴다면, 인간이 맞닥뜨린 문제에 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강림의 사건을 경험한 초대교회의 전통을 기억하면서도, 오늘날 만 개의 교회가 한 개의 자본주의를 이기지 못한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갖지 못한 자들은 불안한 미래를 염려하고, 가진 자들은 체제에 깊숙이 매여 있기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도 한낱 구호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는 영적 실패가 반복됩니다.
앞으로 우리가 추구할 진보적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과거에 진보적인 신앙공동체에서는 체제 변혁적인 정치 행동이나 억압적 질서를 해체하는 비판적 인문 지성이 장려되었습니다. 그것은 해방과 구원을 꿈꾸는 종교의 자양분이었습니다. 그 유산은 여전히 소중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맞게 될 기후재난의 시기에는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앞으로는 삶의 영적 의미를 분별하고 자신을 훈련하는 수행적 삶을 사는 생태적 신앙이 요청됩니다. 교회의 길도 그곳을 향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NCCK와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의 공동포럼으로 진행된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발표자는 ‘미국 생태문명원’ 연구원으로서 대학원 동문인 잭 월시 박사였는데, 그는 앞으로 기후 위기 시대 50년은 기존 조직의 ‘와해와 붕괴, 재조직’의 사이클을 그리며 진행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를 살아가기 위해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mindset)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나만 살고 보자’라는 식의 태도가 일상화하면, 인류의 삶은 지옥(doomsday)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진보적 교회는 생태적 영성을 어떻게 갖출 것인지에 그 운명이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종교는, 자기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연대하되, 그 동력을 ‘자기 성찰과 수행’을 통해 구성해야 할 것입니다. 삶의 다양한 관심이 제각각 파편화되어 분열하지 않도록 묶어내며, 사람들이 저마다의 욕망과 취향에 만족하기보다는 공동의 선(善)을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종교가 필요합니다.
[영적 실천으로서 희망 / 로마서 5장 1~8절]
향린은 70년의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그 속에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 믿음으로 의롭다고 평가받기도 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롬 5:1) 때로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바울의 고백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합니다.” (롬 5:2)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환란을 자랑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단련된 인격을 낳고, 그 단련된 인격이 희망을 낳습니다. 바울은 이 희망만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광화문에서 펼쳐질 앞으로의 삶은 지난 70년과는 다를 것입니다. 과거에는 존경할만한 신앙의 선배가 세운 창립 정신이 있었습니다. 40주년을 맞아 함께 만든 교회갱신선언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과거에 이룬 것이요, 70세의 향린은 상처와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태하고 허약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을 살아왔기에 몸에 새겨진 ‘사라의 미소’와 같은 것입니다. 70년을 살아온 향린이 만일 40주년에 만들어진 경험에 매여 있다면, 우리는 그 후 30년을 허비하고 만 것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우리가 그려온 청년 예수가 지금 70주년의 향린 현실에 머문다면, 우리는 앞으로의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환난 속에 얻은 인내와 인격이 있다면, 희망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롬 5:5)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셔서, 위기의 시대를 지날 때에도 사랑을 잃지 않고 하늘나라를 지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에 힘입어 새 역사를 기쁨으로 써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바울의 고백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합니다.” 지난 70년 향린이 겪은 환난은, 우리의 인내와 인격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앞으로 살아갈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셨으니, 위태로운 시대에도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를 지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