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지구촌 전역은 코로나바이러스 19 펜데믹(범유행)으로 긴급한 상황에 빠졌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은 종교와 사상과 문화의 경계 넘어 공동체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우주적인 통합의 노력을 거부하고 몰상식하고 비상식적인 언행을 부끄러움 없이 일삼고 있다. 오늘 새삼스럽게 19세기의 사상가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이 가슴에 와닿는다. 니체의 선언은 한국 기독교 교회의 성서근본주의와 종교문맹이라는 무지함과 무식함에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 하느님은 전쟁과 테러와 전염병과 기근의 위기와 온갖 차별과 탄압과 착취의 인류사에서 무용지물이 되어 죽었다.
1세기 전에 니체는 교회 기독교를 향해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고 선언했는데 여전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특별히 바이러스 팬데믹의 지구적 위기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21세기의 종교적인 상황이 오랜 세월동안 전통적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우겨대고 있으며, 삼층 세계관의 초자연적인 하느님과 내세지향적인 과거의 패러다임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치고 있다. 오늘 사회로부터 설득력과 신뢰를 상실한 교회는 새로운 시대의 부름을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하였던 니체의 급진적인 사상과 도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새로운 시대의 탁월한 예언자라고 할 수 있다. 마틴 부버는 니체를 가리켜 새로운 문화의 길을 처음 발견한 사람, 새로운 삶의 가치와 새로운 세계 경험을 일깨웠고 창조한 사람이라고 했다.(<Martin Buber, the Life of Dialogue> Marius S. Friedman) 니체는 엄격한 루터교회의 경건한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그의 의식이 깨어나면서 그는 일찍이 교회의 바리새적인 경건과 부족적인 민족주의와 교회가 아부하는 부유층의 편협성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문화적 및 종교적 개혁의 필요성과 근본적인 성격을 인식했다. 그는 과거의 패러다임이 죽어가는 시대와 태동하기를 기다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대 사이를 살아가고 있었다. 니체는 기독교 제국의 시대는 끝났음을 알았다. 1세기 전에는 니체의 생각이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거슬리는 것이었지만, 과학이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의 기초가 되고, 우주진화 세계관이 주류 사회의 원동력이 되고 있는 21세기에 이르러서는 그의 통찰력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니체는 자신의 처녀작 <비극의 탄생>(The Birth of Tragedy)에서 인간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와 허무에 대해 긍정적인 해답이 있다고 인식했다. 다시 말해, 모든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삶을 대면해서 그 삶을 가치 있는 어떤 것으로, 심지어는 아름다운 것으로 긍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니체의 사상은 안주하고 고정되고 낡은 과거의 패러다임을 흔들어 깨우는 데 있었다. 그는 독자들에게 전통적인 교리와 믿음체계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말고, 자율적으로 생각하라고 독려했다. 물론 니체의 책들은 쉽게 편안하게 읽을 책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책들은 씨름을 해야 하고 깊이 생각해야 하며, 응답해야 하는 책들이다. 따라서 그의 책들은 삶의 양면성 곧 창조적이며 또한 개혁적인 요인들이 모두 삶의 과정에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니체가 보여준 심층적이고 급진적인 사고 방식들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니체는 천명하기를, 절대적인 진리 또는 불변하는 영원한 사실들과 궁극적인 실재는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었으며, 우주 전체와 우주를 구성하는 개체들은 우연히 자연적으로 출현했고, 앞으로 미래에 어떻게 변화될지 불확실하다고 했다.
니체는 유신론의 종말과 함께 새로운 종교 시대의 성격을 자신의 저서 <The Gay Science>에서 “광인의 비유”(Parable of Madman)라는 이야기로 재미있게 표현했다: 한 광인이 밝은 아침나절에 손전등을 들고 시장을 뛰어다니면서 하느님을 찾고 있노라고 외치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구경꾼들은 하느님이 길을 잃었느냐, 아니면 하느님이 항해를 떠나 안 계시냐고 놀려대면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광인은 맞받아서 대답했다. 하느님이 살해된 것은 모두가 다 인간의 책임이라고. 하느님은 죽었고, 죽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는 마치 지구가 태양계를 벗어나 이미 광활한 우주의 차겁고 어두운 빈 허공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아직 빛이 있는 낮이지만 손전등을 켜고 다니는 것이다. 구경꾼들은 광인의 대답에 침묵하였고 놀라움으로 광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광인은 잠시 조용한 채 있다가, 그의 손전등을 땅에 던져 버렸다. 전등은 산산이 부서지고 불이 꺼지게 되었다. 이 때에 광인이 외쳤다. ‘내가 너무 일찍 왔어. 내 때가 아니야. 이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들을 준비가 안 됐어!’
니체는 자신의 저서 <우상의 황혼>(Twilight of the Idols)에서 밝히기를, “전통적인 유신론과 하느님의 죽음은 이와 관련된 모든 가치와 진리의 절대성에 대한 종말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하나의 체계이다. 사물에 대해 일관성 있게 사유되고 완성된 입장이다. 만약 누군가 그 체계에서 하나의 근본적인 생각인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파괴했다면 그는 그 체계 전체를 산산조각으로 파괴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그 손에 남아 있지 않다.”
개신교인이었던 니체는 현대 기독교 세계가 붕괴된 가장 큰 원인은 개신교 종교 개혁자들의 책임이라고 지적했다. 즉 루터의 노력은 교회를 재건하려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기독교의 붕괴를 무심코 시작했다. 니체는 자신의 저서 <The Gay Science>에서 “그러나 가장 이상한 것은 스스로가 기독교를 가장 잘 보존하고 지키려는 사람들이 사실은 가장 유능한 기독교의 파괴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 . 루터는 그가 이룰 수 없는 이상을 박살냈지만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이러한 이상의 타락을 싫어하고, 그 이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애쓴 인물로 비쳐졌다.”고 했다.
니체는 불교를 기독교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월등한 종교로 생각했다. 그러나 니체는 기독교와 불교 둘 다 쇠퇴기에 접어든 낡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기독교 세계가 가장 깊은 차원의 기반마저 흔들리고 있고, 초자연적인 하느님에 대한 믿음체계는 서서히 훼손되고 있으며, 기독교는 마지막 생존의 사투를 벌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19세기 어떤 비평가보다도 더 매섭게 기독교를 고발하였고, 그 고발은 <적 그리스도> (The Anti-Christ)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나는 기독교를 저주한다. 나는 검사가 말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혐의를 죄목으로 해서 기독교 교회를 고발한다. 나에게 교회란 생각이 미칠 수 있는 최고로 타락한 집단이다. . .기독교 교회는 타락하지 않은 부분이 한 곳도 없다. 모든 가치를 부정적으로 하였고, 모든 진리를 거짓으로 했다. . .나는 기독교를 하나의 거대한 저주라 부른다. . .기독교는 인류의 한 불멸의 오점이다.”
그러나 사실상 니체는 기독교를 지독히 사랑했다. 그가 기독교로부터 배운 것은 진리에 대한 사랑이었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도 기독교를 비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비극의 탄생>에서 이렇게 외쳤다: “무신론자들과 반형이상학자들은 천년의 신앙의 화염에서 우리의 횃불에 불을 붙이자. 하느님이 진리이고 진리가 하느님인 기독교 신앙의 화염에서.” 니체는 기독교의 역사적 행태들이 와해되는 주요 원인은 기독교의 중심에 숨겨져 있던 진리에 대한 편견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계속해서 그는 “도그마로서의 기독교는 그 윤리 때문에 몰락했다. 마찬가지로 윤리로서의 기독교는 무너져야 한다. 우리는 윤리로서의 기독교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문지방 위에 서 있다.”고 밝혔다.
오늘날 우주진화 세계관을 기초로하는 주류 신학계에서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우주의 법칙과 살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역사적 예수의 정신은 일치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원초적인 기독교의 핵심적인 신학과 신앙이다. 새로운 시대의 기독교는 우주의 법칙과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스스로 죽지 않으면 새로운 교회의 탄생은 불가능하다. 니체는 기독교 교회에 대해 심각한 회의와 허무를 드러냈지만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강렬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니체는 <우상의 황혼과 적 그리스도>(Twilight of the Idols and the Anti-Christ)에서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는 이는 유일하게 한 사람이 있었으며, 그 역사적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복음인 그 사람은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후부터 복음이라 불려졌던 것은 이미 그가 살았던 방식과는 반대의 것이 되었다.” 다시 말해, 예수가 죽은 후에 등장한 제도적인 기독교는 악한 천사나 악한 소식이 되었다. 또한 구원은 초자연적인 그리스도를 믿어야 가능하며, 믿지 않으면 천벌을 면치 못한다는 이분법적 구원론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믿음이 되었다. 그러나 니체가 생각한 진정한 기독교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가 살아내었던 삶을 구체적으로 사는 것이다. 즉 “이 복음을 가져온 예수는 그가 살고 가르친 대로 죽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인간이 살아야 하는지 보여 주기 위해서 죽었다. 그가 인류에게 남긴 유산은 그의 실천이고. . . 심판자들 앞에서 보여준 그의 태도였고. . . 십자가를 진것이다.” 니체는 오랫동안 교회에 의해서 추악하게 왜곡된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 주었다. 다시 말해, 예수는 가르치기를, 자신의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라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라고 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의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완전히 왜곡시켰다. . .개인의 불멸성은 커다란 거짓말이며, 삶에 유익하고 삶을 키우는 합리성과 자연스런 본능 전체를 파괴한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과 적그리스도>(Twilight of the Idols and the Anti-Christ)에서 사회의 종교적 상황의 완전한 세속성을 인식했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기독교 교회의 ‘저 세상성’은 참된 인간성의 실현에 큰 위협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니체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거부했다. 기독교인들은 이 이원론적 세계관을 오랫동안 절대적인 실재의 진리로 맹신했고, 이를 통해서 저 세상적인 목표를 추구하며 개인의 불명성을 희망했다. “하늘 나라는 마음의 상태이지, 이 땅에 임한다든지, 혹은 죽음 이후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다. 자연적인 죽음이라는 개념에는 복음이 없다. 죽음은 연결하는 다리도 아니고 전이도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죽음 이후에 우리가 기다리는 다른 세계가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어제도 내일도 없다. 하느님의 니라는 1000년 후에 오는 나라가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마음 속에서 경험하는 것으로서 어디든 존재하며,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는 말하기를, 저 너머 다른 세계로 상징된 영적 실재들에 대한 전통적 기독교의 관심은 인간을 완성으로 이끌어가기보다는, 모든 인간의 문제들, 즉 정치 사회 교육 종교 문화 철학의 문제들을 왜곡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삶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을 혐오하도록 했다.<Basic Writings of Nietzsche> 니체는 하느님, 영혼, 덕, 죄, 저 너머, 진리, 영원한 삶과 같은 개념들은 참된 실재들이 아니고, 단지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니체는 하느님이란 인생의 상대적 개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저 너머, 참된 세계라는 개념은 존재하는 유일한 현실 세계를 평가 절하하기 위한 수단이며, 이 땅의 현실을 위해서 어떤 목적도 이성도 과제도 갖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영혼, 영, 심지어는 불멸적인 영이란 개념들은 육체를 경시하고, 병들게 하는 것을 거룩한 것으로 간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음식, 거주, 영적인 양식, 환자를 돌봄, 청결, 날씨 등과 같이 삶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할 모든 것들을 아주 경솔하게 반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니체와 다른 사상가들이 예고한 이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초기 신앙의 여정과는 매우 의미가 다른 심층적인 신앙의 여정을 걸어야만 한다.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은 ‘믿음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아무 의미도 없는 고백의 말을 중단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이제 과거에는 존재했다고 믿었던 신적이며 초자연적인 하느님 없이(godless) 살아야만 한다. 하느님이 계시한 신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이며 반석처럼 견고한 확실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의 보좌는 비어 있고, 실제로 천국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땅의 현세적인 삶이 전부이고 최종적이다. 더구나 이 땅에서 인간 실존의 현재와 미래와 관련하여, 수동적으로 외부적인 신성에 의존했던 믿음을 이제는 인간이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