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않아도 우주 시대에 교회는 이분법적이고 부족적이고 우월적이고 차별적인 행태로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고 있는데, 오늘처럼 교회에 대한 회의와 허무가 극심한 적이 없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코로나바이러스 펜데믹(전염병의 범유행)이 선포되었고, 군중집회를 자제해야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교회들은 일요일 예배를 강행하고 있다. 하느님과 예배가 바이러스 펜데믹을 막을 수 없다. 이 위기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든 국민들이 공동체적으로 협력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참 신앙의 삶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예수는 세상을 세속적이고 더러운 것으로 치부하고 차별하는 종교, 사람들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종교 그리고 전통적인 교리와 관념적인 믿음에 대해 지독한 회의주의자와 허무주의자였다. 기독교인들은 진심으로 예수를 따른다면 그가 무엇에 대해 가장 처절하게 회의와 허무를 품었는지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성서에서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듯이 예수가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전통적인 종교의 가시적인 거룩함과 경건,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폄하하는 이분법적 교리와 온갖 차별주의였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오늘날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는 교회는 예수가 가장 혐오했던 것들을 철저하게 맹신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교회 안밖으로 참 사람 예수를 새롭게 발견한 이성적인 사람들은 무당집 같은 중보교회의 가식적인 거룩함과 경건에 식상하고 심각한 회의와 허무에 빠졌다. 불행하게도 교회는 위선적인 권위에 대해 의심과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회의주의자 또는 허무주의자 또는 염세주의자로 정죄하고 추방했으며 이것때문에 교회는 지난 2-3세기 동안 쇠퇴하고 시들시들 죽어갔다. 그러나 양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가 예수의 인도주의적 정신을 신앙의 핵심으로 채택하고 그것을 실천적으로 살아내야 한다고 용감하게 도전한다. 역사적 예수는 당시에 전통적인 종교가 98%의 민중들이 가난과 질병 속에서 사람답지 못하게 살아가고 있는 고통과 절망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오직 물질적인 축복과 이분법적이고 내세적인 구원을 위한 바리새적 거룩함과 경건에 심각한 회의와 허무를 느꼈다. 따라서 예수는 성전(교회)종교 즉 중보종교(교회)를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예수는 과거의 패러다임의 제도와 교리와 전통에 대해 허무를 느끼고, 종교의 전체적인 개혁을 선포한 현실적이고 능동적인 허무주의자였다.
미래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그 교회는 실제로 무엇을 할 것인가? 과연 우리 사회에 여전히 교회가 필요한가? 교회 안에 가식적인 거룩과 경건이 썩은 냄새를 풍기면서도 교회일 수 있나? 교회에서 참 사람 예수의 가르침과 삶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대신 만들어진 예수의 믿음체계가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하게 짓밟아 버리고 거짓과 은폐로 내세를 팔아먹으면서도 교회라고 할 수 있나? 무엇보다도 21세기의 우주진화 세계관을 무시하고, 138억 년의 우주 이야기에 대해 무지한체 고대 삼층 세계관의 믿음을 절대적인 것으로 맹신하는 것이 21세기의 교회일 수 있나? 결론적으로, 교회 안에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종교가 가능한가? 교회는 언제까지 우주진화 세계관의 세상과 단절하고 초자연적인 하느님에 대한 망상과 삼층 세계관의 내세 신앙에 사로잡혀 있을 것인가? 교회 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는 참된 종교인가 아니면 예수를 팔아먹는 사이비 종교 집단인가? 오늘날 왜 교회 없는 사회, 하느님 없는 기독교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외침이 높아지고 있나?
약 2세기 전까지만 해도 우주세계를 마치 시계같은 기계로 보았으며, 인간의 삶은 고정된 무대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그리고 진리와 가치는 이 세계 밖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이미 계획하고 창조한 질서와 규범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갹했다. 이 낡은 삼층 세계관적 우주론은 21세기에 실재론 혹은 플라톤주의 혹은 형이상학적 이원론으로 여전히 우리의 사회를 혼돈과 두려움과 불안에 빠트리고 있다. 그러나 현대과학이 밝히는 공개적 계시에 따르면 우주 전체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작은 전체들과 개체들 모두는 우연적이고 자연적이다. 우주세계는 인간의 언어에 의해 인간적으로 가정되고 계시되며, 끊임없이 역사적으로 진화한다. 이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흐름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 세계 너머에 우리의 모든 의미와 진리와 가치를 결정하는 어떤 초자연적인 질서의 다른 세계는 없다.
21세기 우주진화 세계관의 사회에서는 초자연적인 신과 절대적인 권위가 사회 전체와 사회를 구성하는 개체들을 통제하고 멋대로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비상식적인 일로 인식되고 있다. 과학을 일상화하고 있는 현대인은 우주의 불확실성을 겸손하게 수용하며, 따라서 어느 곳에도 영원한 고향이 없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부족적인 삼층 세계관의 교회는 회의주의 또는 허무주의는 전통과 제도와 권위와 믿음체계에 대한 과거의 패러다임을 파괴하며 자신들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고 두려워한다. 한편 우주진화 세계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살아내는 사람들은 더 이상 낡은 교조적인 진리가 필요하지 않으며, 우리와 분리되어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확실한 것이나 절대적인 것이란 없으며 또한 이것들에 대해 중개인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종교와 교리와 믿음이란 통로가 필요없다. 만일에 누군가 그 통로를 제시한다면 그것이 예수이든 교회이든 성직자이든 이 모든 것들은 상업적인 거짓과 정치적인 술책에 불과하다. 우리의 가장 확고한 근거와 출발점은 전형적인 현대 매체에 표현되는 일상 언어와 일상생활의 어휘들과 과학이 발견한 공개적인 계시(Public Revelation)와 우주진화 세계관이다. 오늘날 일상생활를 인도하는 일상 언어와 분리된 거룩한 종교적 언어는 설득력과 효력을 잃고 무용지물이 되었을 뿐만아니라 인류사회를 혼돈과 분단에 빠트렸다.
흔히 중보교회에서 철학자 니체를 (부정적인) 허무주의자 또는 염세주의자로 치부하고, 그를 적그리스도의 선봉장으로 정죄한다. 또한 니체의 서적들을 금서목록의 첫 번째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오늘날 니체의 사상은 전통적인 교회 기독교에 식상하고 회의를 느끼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신선한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니체의 서적들을 전체적으로 신중하게 읽으면 그의 사상의 핵심은 부정적인 허무주의 또는 염세주의가 아닌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니체가 왜 하느님은 죽었다고 선언했는지 그의 심층적인 사상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니체의 사상은 안주하고 고정된 사고 방식들을 흔들어 깨우는 데 있었다. 그는 독자들에게 전통적인 교리와 믿음체계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말고, 자율적으로 생각하라고 독려했다. 또한 니체는, 사물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고, 내가 변화함으로써 세계가 달라진다고 했다. 그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은 표층적인 종교적 저항이나 반발이 아니었다. 그는 절대적 정의와 자유의 상실에 대한 허무를 외쳤고, 인간을 속박하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주의에 얽메어있는 교회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했다.
18~19세기에 회의주의(Nihilism)와 허무주의(Skepticism) 사상이 출현하게 된 주요 동기는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존엄성을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인간을 하찮은 존재로 폄하하는 초자연적인 종교체제에 대한 회의와 허무였다. 따라서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방식으로 인도주의가 등장했다. 오늘날 이성적이고 능동적인 허무주의자들은 성속의 분리 즉 세속적인 세상과 거룩한 교회, 거룩한 믿음과 더러운 불신앙 그리고 신자와 불신자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하는 교회 기독교의 유신론적 믿음체계에 회의와 허무를 느낀다. 따라서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교회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새로운 인식으로 지금 여기 이 땅 위에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자고 선포한다. 급격히 쇠퇴하고 있는 교회가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마치 동전의 앞뒤와 같은 허무주의와 인도주의를 살아내는 길뿐이다. 오늘날 낡고 오래된 전통적인 종교체제와 믿음체계에 대한 회의와 허무는 인류의 밝은 미래를 위해 긍정적이고,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채색된 베일 뒤에 은폐된 교회는 회의와 허무가 하느님에 대한 반역이라고 정죄하고 새로운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기 때문에 설득력과 효력을 잃고 시들시들 쇠퇴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 종교를 평범한 삶 속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서 복음서들 안에 하느님 나라와 관련된 구절이 400개 이상인 반면, 교회와 관련된 것은 단지 2개뿐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는 어떠한 교리나, 제도나, 규칙이나, 믿음도 없으며, 오직 우주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삶뿐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산상설교를 왜곡하지 말고,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 선언으로 인식해야 한다. 예수는 따르는 사람들이 백합화처럼 자연인으로 살기를, 등불처럼 암흑과 절망이 있는 곳에 빛을 비추기를 요청했으며, 또한 열렬한 자기비판 정신을 요구했다. 예수는 이분법적이고 폭력적이고 잔혹한 전통적인 종교체제와 제국주의 정치에 대해 심각한 회의와 허무를 뼛속까지 느끼고, 민중들의 고통과 절망을 함께 아파했다. 예수는 교회를 세우라고 명령하거나, 자신을 성상의 자리에 앉히고, 자신을 하느님으로 믿으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더욱이 예수는 자신의 신성을 온 세상에 전도하라는 선교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다. 예수의 신성은 예수가 죽은 후에 교회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예수는 오로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인도주의적 가르침과 사심이 없는 태양같은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내기를 원했다. 이분법적인 차별과 분리의 교리와 전통은 후대 사람들이 자신들이 세운 중보교회와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표층적인 수단들에 불과하다.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과 현대과학이 발전하기 전까지 중보교회의 흥행은 잘되었다. 그러나 지난 2-3세기 동안 초자연적이고 내세지향적인 교회종교에 대한 회의와 허무가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예수의 하느님 나라 종교와 인도주의적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주류 사회를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은 이제라도 늦지않았다. 회칠한 무덤과 같은 가식적인 거룩과 경건을 내려놓고, 내세지향적인 중보교회 종교에 회의와 허무를 느끼고, 예수의 인도주의적 하느님 나라 종교를 시작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더 이상 예수의 하느님 나라 신학을 반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왜냐하면 많은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다시 새롭게 읽기 시작했다. 아직도 성서를 마술책과 과학책과 교리책으로 생각하고 문자적으로 직역적으로 읽고 무작정 믿는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당장 중단하고, 마음을 활짝 열고, 새로운 렌즈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인식하고 성서를 은유적으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성서에 담겨진 메시지를 21세기의 우주진화 세계관과 현대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설득력과 신뢰를 잃고 쇠퇴하는 교회는 과거의 패러다임에 회의를 느끼고 더 큰 종교 개혁을 외치는 회의주의자들과 허무주의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예수의 인도주의적 하느님 나라 신학을 살아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과거의 패러다임에 대해 철저한 회의주의자와 허무주의자였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