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처럼 장사꾼 목사들과 사이비 종교 교주들이 가정과 사회를 파괴하는 긴급한 상황을 주시하면서 또다시 한번 교회를 잃더라도,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요즈음 코로나 바이러스 19로 전세계가 혼란에 빠져있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지구적인 긴급한 상황에서 바이러스 감염을 공동체적으로 협력하여 함께 노력해야하는 데 교회들은 감염의 가능성이 심각하게 높은 집단적인 예배모임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사실상,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이 바이러스 감염을 막어준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군중집회가 바이러스 감염에 가장 위험한 장소라는 사실을 무시한체 일요일 예배를 강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느님의 징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하루에 들어오는 헌금수입을 놓치면 재정상 막대한 손해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교회 기독교는 현재 가파른 몰락 속에 있다. 생존의 몸부림을 치면서도 겉으로는 잘되고 있는듯 자신을 속이고 은폐하는 교회들은 새로운 종교개혁의 욕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런 개혁을 발전시킬 것 같지도 않다. 오랜 세월동안 교회는 부족적이고 이기적인 옹졸함때문에 인종차별 성차별 빈부차별 종교차별 생태계파괴를 거룩한 믿음으로 합리화했다. 그리고 질병과 빈곤과 불의로 인한 혼돈과 고통과 절망에 빠진 세속적인 현세를 멸망할 더러운 세상으로 정죄하고, 이 세계를 못본체 무시해버리고 죽음 이후 내세만을 위해 준비하는 망상에 빠졌다. 따라서 교회는 그 자신과 그들이 만든 교리와 전통에 관한 터무니없고 돌이킬 수 없는 주장들을 늘어놓았다. 다시 말해, 교회의 행동과 그 가르침은 틀림이 없도록 하느님이 보장하고 보호한다는 멍청한 주장이다. 교회는 결점이 없고, 오류가 없다는 억측을 뻔뻔스럽게 주장한다. 교회는 자아도취에 빠져서 모든 우주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제도로 착각한다. 따라서 교회의 도그마는 확실하고 움직일 수 없는 진리라고 맹신한다. 교회가 그런 자기 이미지에 도취해 있었기에, 교회의 우주론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갈릴레오에게 사과하는 데 350년이나 걸렸다. 17세기 이래로 지금까지 교회는 방어적인 입장을 취해왔으며, 종교나 신학에서 어떠한 새로운 운동도 그것이 교회의 정통을 재확인해주는 것이 아니면 결코 교회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지도 못했다. 따라서 개신교 전통 안에서 경건주의, 복음주의, 그리고 오순절 운동들이 모두 신정통주의적이었다. 이처럼 교회는 전통에 대해 매우 방어적이며, 교회 안에서의 신앙의 정치학은 항상 기존의 정통주의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자유주의 신학은 실패를 거듭했다.
오늘날 교회는 성서에 관한 학문적 연구와 성과에 대해 둔감하거나 무지하며 심지어 너무나 무식하다. 지난 200여 년에 걸친 신약성서에 대한 철저한 비판적 연구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들은 성서의 오류와 모순에 대해 아무런 두려움 없이 매 일요일마다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말했다” 라고 선언한다. 그들은 역사적 예수를 간단하게 무시해버리고, 전통적 신앙의 신적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교인들에게 주입시킨다. 학문적 신학과 교회 사이에는 죽의 장막이 쳐졌으며, 더욱 기묘하게도 학문적 신학의 작은 세계 안에서조차 신약학자들과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고 저술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죽의 장막이 세워졌다. 최근 일부 젊은 신학자들은 신정통주의자들로서, 신약성서 비평학자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지함과 무식함에 빠져 자아도취적인 저술을 자랑스럽게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최근에 신약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에 관한 다량의 휼륭하고 방대하며, 폭넓게 읽혀지는 새로운 기초신학을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미국의 로버트 펑크는 예수 세미나 학회(www.westarinstitute.org)를 설립해서 역사적 예수 학자들의 저술활동을 격려하고, 일반 기독교인들에게 잃었던 참 사람 예수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종교문맹퇴치 운동을 시작했다.
교회 기독교는 치명적으로 몰락하고 있으며, 오늘날 그 신적인 그리스도는 뒤죽박죽된 모습이며, 결코 존재하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와 그의 하느님 나라 종교는 생기가 있고, 지루하지도 않고, 지적으로도 매우 흥미롭다. 물론 역사적 예수는 너무나 오랫동안 기독교인들의 의식 속에서 사라졌었기 때문에 심지어 그를 되돌려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 여파로 인해 역사적 예수가 아직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중보교회와 교회가 가르치는 기독교를 잃어버리는 것은 인류의 밝은 미래를 위해 별로 안타깝지 않다. 그러나 참 사람 예수를 잃어버리고, 만들어진 예수를 맹신하는 것은 훨씬 더 큰 불행이다.
예수에 관한 기억과 그 유산은 예수의 죽음 직후에 대규모적인 신학적 변형이 일어났으며 치명적으로 그리고 영속적으로 혼미하게 되었고 혼란스럽게 되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실상 신약성서의 공관복음서가 쓰여지기 이전부터 이미 예수에 관한 전통들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근대의 학문적 성과는 그것에 대해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성서가 언제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왜 기록되었으며, 성서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지만, 어떻게 수많은 사본들의 사본들이 필사되었고 또한 그 사본들이 어떤 언어들로 번역되었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성서가 어떻게 기독교의 경전이 되었는지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 결과를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필수적인 일이다. 다시 말해, 21세기의 기독교인들은 성서에게 솔직해야 한다. 은유적으로 기록된 신화적이고 시적인 성서는 문자적으로 읽고 공식을 암기하듯이 무작정 믿어야하는 교리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예수는 당시에 율법근본주의 즉 율법문자주의로 인간의 존엄성을 하찮은 것으로 폄하하고 민중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유대교 성전종교에 철저하게 반대했으며, 이것때문에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예수를 따르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성서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서의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은 예수가 철저하게 반대했던 반인륜적인 낡고 비상식적인 주장임을 인식해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는 만들어진 예수상 속에 감금되었다. 교회는 눈과 귀를 막고 진짜 예수, 참 사람 예수, 역사적 예수를 솔직하고 진지하게 수용하는 것을 매우 힘들어 한다. 결국 교회는 자신이 만든 관 속에 들어갔으며, 성서근본주의자들과 우매한 기독교인들이 교회의 관에 못을 박고 있다. 교회는 신학적 반지성주의를 거룩한 믿음으로 정당화하고, 맹신과 망상이라는 관 속에서 옴짝달짝하지 않고 있다.
138억 년 우주진화 세계관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삼층 세계관의 교회로부터 구출해야 한다. 예수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윤리관은 21세기 현대인들에게 낯설고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성차별과 성적본능차별과 빈부차별과 인종차별과 종교차별과 생태계파괴와 전쟁과 테러로 혼돈과 절망의 늪에 빠진 인류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역사적 예수의 포월적이고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정신이다. 기독교인들은 잃었던 역사적 예수를 되찾아야 하고, 예수의 흥미있는 삶의 이야기가 다시 들려져야 한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윤리적 교사로서의 참 사람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따를 수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오류가 없는 초자연적인 신으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참된 인간으로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삶의 길과 진리로 그를 이해한다면, 마음 상하지 않고 귀와 눈과 마음이 열리고 기쁘게 역사적 예수의 하느님 나라 종교를 수용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예수는 오랜 세월동안 이원론적 세계관과 내세지향적인 신학에 의해 박제되었다. 다시 말해, 교회는 육체와 영혼의 분리, 삶 속에서 시간과 영원의 분리, 이 세계의 단기적이고 임시적인 가치와 죽음 이후 다른 세계의 영원한 가치의 분리, 속된 사랑과 거룩한 사랑의 분리, 여성과 남성의 분리 등의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예수를 박제했다. 설상가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의 모든 가치는 단지 도구적일 뿐이라는 오래되고 낡은 플라톤적이고 교회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에 세뇌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인생의 최대 목적을 죽음 너머의 세계에 두는 것 대신에, 지금 여기에서의 삶 속에 우리 자신을 던지는 방식 안에서 지고의 선을 발견해야 한다. 어떤 것이든 포월적으로 사랑하고, 행동하며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길 때, 그 모든 것은 그 자체를 위해서, 또한 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살아내어야만 한다. 교회적 플라톤주의에서는 이 땅 위에서의 생활의 모든 가치는 단지 임시적인 도구적 가치에 불과하다고 믿지만,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에게 모든 가치는 본래적이다. 다시 말해, 영원한 구원을 위해 이 세계와 오늘의 삶을 부인하던 과거의 패러다임은 이제 세상과 삶에 대한 순전한 긍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세속적 인도주의는 하느님에 대한 반역과 기독교에 대한 거부가 아니며, 우주적이고 통합적이고 포월적인 삶을 살아내는 삶의 방식이다. 분명한 사실은, 세속적 인도주의는 오늘 교회 안밖에서 일어나고 있다. 더욱이 좀더 이 세상적이고, 인도주의적이며, 삶을 긍정하는 세계관을 향한 움직임이 점차적으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우주진화 세계관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기초가 되고 있는 시대에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삶에 외부가 없으며, 이 세계는 우리에게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또한 주변에서 발전하는 세속 문화를 더러운 것으로 치부하던 오래된 나쁜 습관을 버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삶과 세상에 대해 긍정적이 되는 새로운 습관이 보편화될 수 있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과 영원한 구원을 막연하게 기다리는 대신에, 그것들을 지금 당장 붙잡아야 한다. 이것들은 선택이 아니라 우리의 의무이고 책임이다. 따라서 태양처럼 사심없이 자신을 헌신하며 정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 방법이다.
오늘날 이러한 현상으로서의 커다란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더 큰 종교개혁 즉 기독교 자체의 전체적인 개혁이 17세기 후반부터 진행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 서서히 추진력을 모아왔다. 그것은 주로 교회 밖에서 일어났지만, 그 영향은 불가피하게 교회 안에서도 느껴진다. 지난 수세기 동안의 거대한 역사적 흐름은 하느님 나라 종교에로의 점진적 진화를 통해 기독교의 개혁에 호의적이다. 사실상 초자연적 교리의 쇠퇴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결국 역사적 예수의 메시지가 다시 회복되는 쪽으로 진행될 것이다.
과거에 교회 종교가 사람들에게 강압적으로 주입시켰던 삼층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의 운명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 즉 죽음이 생명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죽음의 두려움때문에 교회 안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 종교에서는 죽음을 삶의 종말에 오는 두려움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 속에 있는 사건이나 마지막 말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기 위해 또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살지 않는다. 영원함은 시간적으로 무한한 지속이 아니며, 무시간성이다. 따라서 영생은 죽음 이후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다. 마치 우리의 눈에 보이는 평원이 끝이 없듯이, 우리의 삶은 끝이 없다. 죽음이 없으면 새로운 생명과 삶은 없다. 죽음은 징벌이나 저주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종교에서 삶은 끝이 없고, 그 너머가 없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삶의 우연성과 유한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 속에서 자신들을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헌신해야 한다. 육체와 분리된 어떤 형이상학적 영혼을 맹신하기 보다는 항상 자신을 완전히 그리고 끊임없이 오늘의 삶에 온전히 헌신하는 것이 참된 행복의 길이다. 항상 죽음으로써 매일매일 새롭게 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항상 사라져간다. 그리고 항상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 영원하지도 않고, 또한 어떤 영원한 것을 그들 안에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인식하면 예수의 도덕적 긴방성과 그의 종말론적 의식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산상설교(마태복음서 5:3-10)를 다시 신중하게 읽고, 태양같은 희생적이고 사심없는 삶에 대한 메시지를 심층적으로 살아내야 한다. 이것은 현대 기독교인의 신앙과 사상의 핵심이다. 따라서 오랫동안 교회의 관 속에 박제된 상태로 감금된 역사적 예수를 해방시켜야 한다. 역사적 예수에게 솔직하고, 그를 자유하게 해방시키기를 두려워하거나 주저하는 교회를 잃어서라도 그 예수를 구출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를 잃는 것보다 참 사람 예수를 잃는 것이 훨씬 더 큰 불행이기 때문이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