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는 예수가 가르치고 몸소 살아낸 비교리적이고 우주적인 하느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예수가 가장 혐오하고 반대했던 고대 성전의 하느님을 믿고 있다. 교회가 믿는 부족적인 하느님은 참 사람 예수의 하느님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는 1세기에 살았던 평범한 촌부였다.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은 예수의 인간성, 참 사람의 인간성을 통해서 하느님의 의미를 깨닫고 긍극적인 체험을 신약성서로 기록했다. 하느님이란 말은 인간의 언어이다. 인간의 언어는 인간 체험 밖의 실재를 서술할 수 없다. 따라서 하느님의 의미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막연한 상상 내지는 망상에서 찾을 수 없으며, 오직 우리가 인식하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하느님은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21세기 우주진화의 세계에서 하느님은 과학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는 우주의 법칙을 깨트리는 기적을 일으킨다는 거짓 하느님 즉 미신을 쫓고 있다. 물론 하느님이란 어느 특정 종교와 인종이 독점하는 인격적 존재 또는 믿어야 하는 상대적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이란 말의 의미는 호모싸피엔스 인간이 내면적으로 느끼는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종교적 요청이다. 즉 하느님은 삶의 비전이고 방식이고 표현이다. 신약성서는 분명히 예수의 하느님을 소개하고 있는 데, 교회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기 때문에 엉뚱한 하느님 즉 망상의 하느님을 숭배하고 있다. 예수가 죽은 후 교회기독교는 만들어진 하느님으로 인간의 본성과 존엄성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교회의 노예로 전락시켰다. 교회는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고, 사람들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박탈하고 혼돈과 절망 속에 빠트렸다. 따라서 교회는 인종차별, 종교차별, 성차별, 성적본능차별, 빈부차별, 생태계 파괴, 종교전쟁과 테러를 정당화하고 있다.
예수의 비이분법적인 하느님은 신약성서에 전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한 가지 좋은 예로, 예수는 탕자의 비유 이야기 중에 이렇게 말했다: “...집으로 돌아 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 가 아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었다...” (누가복음서 15:1-3, 11-32) “탕자의 비유”는 성서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들 중에 하나이다. 교회를 오랜 세월 동안 다닌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수 백 번은 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담겨있는 중요한 비유가 원초적인 예수의 뜻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이야기로 해석되고, 간단하게 가볍게 읽여지고 있다. “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에서 탕자는 으례히 자신의 재산을 챙겨서 가족을 배신하고 떠나버린 작은 아들로 단정해 버린다. 심지어는 교회를 떠났거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을 작은 아들로 생각한다. 그리고 작은 아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용서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구속론의 교리를 들먹인다. 이런 방식으로 예수의 비유를 읽는 것은 마치 그림 한 폭을 감상할 때에 그림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작은 한 쪽 구석에만 시선을 집중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인들은 21세기에 성서를 새로운 렌즈를 끼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시 새롭게 읽어야 한다. 옛날 이야기를 가볍게 듣고 대충 기억하면서 즐기는 것이 성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주일학교 시절에 암기식으로 배웠던 성서 이야기를 성인이 되어서도 잊지 못하고 버리기가 아까워서 새롭게 읽고 새롭게 생각하는 것이 대단히 불편하고 두렵기만 하다.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해석해 온 것을 부정하거나 새롭게 읽으면 믿음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이단으로 몰리기 십상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양심의 고민과 혼돈이 따른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 없다. 진화하는 신앙과 인성(人性)에 대한 인식과 인간의 존엄성인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은 믿음체계의 교회가 강요하는 교리적인 믿음 보다 더 소중하다.
교회 나가는 사람들은 예수의 비유에 대해서 지금까지 교회에서 들어온 모든 것들을 내려 놓고, 마음을 비우고, 다시 한번 새롭게 읽어야 한다. 우선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은, 탕자의 비유를 기록한 누가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이 예수의 비유가 21세기에 살고 있는 나에게 어떻게 들려지고 있는가?에 대해 솔직하게 생각해야 한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의 이미지와 회개에 대해서 너무나 교리적이고 편협적으로 배워왔고 심하게 세뇌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질문하고 고민하면서 깨달음에 이르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한 신앙생활을 박탈당한체 앵무새처럼 가르쳐 주는대로 암기하고,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잘못 배워왔다.
누가의 공동체는 예수의 비유를 통해서 부족적인 생존의 경계선을 허물어 버렸다. 다시 말해 자신들은 잘못된 신앙과 가치관과 세계관에 세뇌되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 기독교인들은 탕자의 비유를 예수의 의도와는 달리 잘못 왜곡하여 이해하고 있다. 즉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하느님이고, 작은 아들 탕자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 비기독교인들이고, 큰 아들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기독교인들로 착각하고 있다.
누가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 예수공동체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이제 기독교인이 된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시각에서 이방인이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믿는 하느님과 유대교가 믿는 하느님은 여전히 동일한 하느님이었지만,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깨달았던 하느님의 의미를 인식하고 체험하면서 과거에 자신들이 믿었던 유대교 성전의 하느님과 예수의 하느님이 180도로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새로운 하느님, 새로운 신앙, 새로운 인간에 대한 비전과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오늘날 예수를 따른다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반대했던 고대 유대교의 이분법적이고 폭력적이고 제국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느님을 믿는 큰 모순과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배반하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는 죄인이 유대교의 하느님에게 또는 기독교의 하느님에게 또는 교회에 나와서 회개하고 구원받는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비유라고 불리우는 대단히 특별한 이야기다. 비유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비유는 가시가 돋힌 날카로운 이야기다. 비유는 기존의 신앙관과 가치관을 180도로 뒤집어 엎는 이야기다. 비유는 교회에 나가고,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교리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탕자의 비유에 가시가 어디에 있나? 어느 대목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가?
탕자의 비유를 새롭게 다시 읽으면 다음과 같다:
(1) 첫째로, 이 비유는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사랑했고, 두 아들을 찾아 밖으로 나갔고, 두 아들에게 자비로웠다. 아버지가 주인공이고 두 아들은 조연들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탕자는 작은 아들이 아니라, 사랑을 함부로 헤프게 낭비하는 아버지가 탕자다. 그래서 이 비유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아버지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두 아들 중에 어느 누구도 배척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모두 사랑했고, 둘 중에 한 아들을 더 특별히 사랑하지 않았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누구에게만 주어지는 특혜가 아니라, 만인에게 골고루 주어진다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2) 둘째로, 이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지만, 아버지는 무섭게 화를 내거나
용서한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탕자의 비유는 성전에 희생재물을 바쳐야하고 교회에 주일헌금과 십일조를 바쳐야 용서받는다는 보상관계의 이분법적 회개의 교리를 뒤집어 엎는 이야기다. 하느님은 입술로 회개하는 대상이 아니다. 무엇때문에 회개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나? 지옥행을 면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그런 하느님과 지옥은 없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죄와 용서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신뢰의 관계다. 하느님은 인간의 뉘우치는 말과는 상관없이 아무 조건없는 무한한 사랑이다. 예수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 ‘너의 죄가 무엇이냐? 당장 회개해라. 그렇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다’ 는 준엄한 말 대신에 ‘돌아가서,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사랑으로 감싸주었다. 사랑은 모든 잘못과 분쟁을 해결하기 보다는 잘못과 분쟁이 사랑의 실천장으로 변화되게 한다.
그렇다면 이제 탕자의 비유는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들리고 있는가? 그리고 이 이야기가 어떻게 기독교인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나? 이 비유는 예수가 하느님의 의미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리고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탕자의 비유를 말하는 역사적 예수는 기존 종교가 세운 경계선들을 허물어 버리고, 전통적인 신앙과 교리와 사회의 진부한 가치관을 뒤집어 엎으려고 했다. 예수는 새로운 하느님, 새로운 신앙, 새로운 인간에 대해서 가르쳤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진실하고 희망에 찬 새로운 세상이 도래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예수는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스럽고 성스러운 자녀들이라고 선언했다. 예수는 하느님의 사랑은 만인을 차별없이 조건없이 평등하게 품에 안아주는 사랑이라고 밝혔다. 예수는 나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하느님의 징벌을 받아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하지 않았다.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구원 못받는다는 이분법적 구속론의 교리는 예수의 정신이 아니라 성전과 교회가 창작한 정치적인 교리 내지는 상업적인 미신에 불과하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다른 인종들, 다른 종교인들을 배척하면서 나의 마음에 높은 장벽을 쌓으면 우주적이고 조건없는 하느님의 사랑이 나에게 들어올 길이 없게 된다. 포용적이고 통합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누리려면 내 자신을 개방하고 비워야 한다. 새로운 세상, 희망에 찬 세상, 하느님이 통치하는 세상은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고 배척하는 곳이 아니다.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공동의 운명을 인식하면서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하느님의 나라이다. 내가 행복하게 의미있게 살려는 것이 기독교인이 된 목적이라면 나혼자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 다른 인종들과 다른 종교인들과 다른 교파 사람들과 북한 동포들을 조건없이 포용하며 함께 사는 방법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온 작은 아들을 위해 벌린 잔치에 참석했는지에 대해서 아무 말이 없다. 교회 나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큰 아들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러나 나와 종교와 신앙과 인종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류공동의 운명을 인식하고 함께 살 것인지 아니면 이기적으로 나혼자 잘 살아보겠다고 포용적인 아버지의 초청를 거부하고, 여전히 집 밖에서 불평하고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의 탕자의 비유는 부족적 경계와 종교적 경계 넘어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하느님을 선언한다. 예수는 교회의 안밖으로 보편화된 비교급 신앙과 상대적 가치관을 180도로 뒤집어 엎는다. 예수는 새로운 하느님의 의미, 새로운 세상, 참된 행복, 새로운 신앙과 가치관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다: 예수의 하느님의 의미가 우주적인 사랑이듯이 기독교인들도 다른 종교인들과 인종들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또한 예수의 하느님은 조건없는 용서이듯이 기독교인들도 다른 사람들을 조건없이 용서하고 포용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대안은 불편한 진리이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믿음이 있니 없니, 믿음이 크니 작니, 구원받았니 못받았니 하는 따위의 관념적이고 형식적이고 교리적인 이분법적 믿음의 노예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모든 사람들을 부족적 생존의 경계 넘어 조건없이 공평하게 포용하는 포월적(包越的)인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예수의 말대로 자유인이 되는 선택의 결단을 내리는 것에 무엇이 두려운가? 여전히 하느님의 징벌과 지옥이 두려운가? 부자가 되어 잘먹고 잘살지 못하게 될까 두려운가?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 욕심을 내려 놓는 용감한 자유인이 되면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은 나와 후손들과 다른 사람들과 세상의 운명을 위한 중대한 선택이고 결단이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