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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지는 삶 | 김희헌 | 2021-03-14

by 김희헌 posted Mar 14, 2021 Views 61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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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03-14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지는 삶 (21:4-9, 2:1-10, 3:14-21)

2021.03.14. 사순절 넷째 주일

 

[사순절을 지나며]

우리는 사순절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의 고난을 생각하며, 우리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자기 삶이 위태롭지 않은지 살펴보는 일은 믿음이 약한 사람만이 아니라, 자기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를 지나오면서, 대부분 종교가 욕망을 위해 봉사하면서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성서에서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라고 하는데, 그 문자적 의미는 자신을 사로잡은 정신(nous) 너머로(meta)’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를 비우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자기를 비워서 낮은 곳을 향하고, 자신을 넘어서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는 것은 삶의 부정이 아니라 참된 긍정입니다. 자기를 넘어서는 것은 삶의 실종이 아니라 참된 자기를 찾는 일입니다. 자신을 비워내야지만 하나님의 뜻을 담을 수 있고, 현재의 자기를 넘어설 때 더욱 큰 자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여정은 집착에서 벗어나는 일과 깊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집착할수록 세속적 경험에 갇히게 되며, 자기를 넘어설수록 거룩한 경험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넘어 서면서 성숙해집니다.

코로나 사태로 시작되어 길어진 낯선 시간, 어쩌면 지금 우리는 역사의 사순절을 지나는 것만 같습니다. 과거의 어둠은 여전히 짙어서, 현실을 질곡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오늘의 세계는, 탐욕과 소비로 가득 찬 문명을 비워내고, 차별과 약탈로 구성된 질서를 넘어서라는 부름을 안고 있다 하겠습니다. 생명의 기쁨과 평화를 위해, 과거를 벗고 새로운 은총의 세계로 나가야 할 때입니다.

 

[해방의 꿈을 잃은 세계의 불행 / 민수기 214-9]

1성서 민수기의 본문은, 종교적 믿음이 냉엄한 현실 속에서 진행되는 치열한 삶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해방의 꿈을 잃은 사람들, 과거의 기억을 핑계로 삼아 현재의 과제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당한 불행을 보여줍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광야의 백성들은 해방의 감격이 식자마자 현재의 삶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제국으로부터 당하던 억압의 먹구름이 사라지자, 자기 안에서 솟구친 욕망의 폭풍우를 맞게 된 것입니다. 해방된 지 사십여 일이 지났을 때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차라리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때,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 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 (16:3)

이런 자기 기만적 불평은 광야 생활에서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영광을 보고도, 열 번이나 거듭 하나님을 시험하고,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14:22)

오늘 본문은 이런 불평과 불만의 절정에서 생긴 일입니다. 그들의 원망은 커져서, 이제는 모세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기까지 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도대체 이런 원망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무엇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과 모세에게 퍼부은 광야 백성들의 원망은 단지 배고픔이라는 생물학적 욕구(need) 때문이라기보다는, 해방의 꿈에서 멀어지며 생겨난 욕망(desire)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커녕, 공동체의 분열마저도 개의치 않는 무모함을 담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광야의 보잘것없는 음식에 진저리가 난다고 외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자비로운 보살핌을 베풀지 않고, 불뱀을 보내서 물어 죽이는 처벌을 합니다. 성서는 이렇게 심판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서, 삶의 엄중한 책임에 관한 교훈을 줍니다. 역사적으로 그런 신의 형벌이 실제로 도모되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광야에서 겪은 고통의 교훈을 통해서 하나님의 처벌을 깨달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무튼,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 모세를 찾아가서 하나님께 빌어달라고 간청하였고, 백성들을 살려달라는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은 살길을 열어주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았고,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살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들어 올린 뱀은 치유와 깨달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구리 뱀 전통은 오래도록 이어졌습니다. 성서를 추적해보면, 약 오백 년이 흐른 유다 왕 히스기야 시절에 이르기까지 이 구리 뱀의 전통이 흘러간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치유와 깨달음의 상징이던 구리 뱀은 점차 그 기능을 잃고 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개혁을 단행할 때, 사람들이 분향하던 구리 뱀을 산산조각내서 깨트려버립니다. (왕하 18:4)

사람을 치유하던 것도 시간이 흐르면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삶에는 늘 새로운 성찰이 필요합니다.

 

[움직이는 믿음 / 요한복음 314-21]

요한복음 본문에 나오는 316절 말씀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친숙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개역성경 구절에 익숙한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니고데모라고 하는 바리새인에게 주신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요한복음 3장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 내용입니다. 그가 밤중에 예수를 찾아와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이라고 고백한 이유는, 예수의 표적’(semeion)을 위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겉으로 보인 표적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기사와 이적이 만들어낸 가시적 효과에 관심했던 그는, 정작 필요한 것은 존재의 거듭남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에 대한 이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니고데모에게 믿음은 가시적인 표적에 있지만, 예수에게 믿음은 거듭나는 삶에 있습니다.

이런 대비는 요한복음이 의도하는 특징적인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관념의 대상이 아니라 생동하는 실체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이 믿음을 명사로 말하지 않고, 항상 동사로 표현하는 것과도 연관됩니다.

명사형으로서의 믿음(pistis)은 공관복음서에서 골고루 사용되지만, 요한복음에는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 8, 마가 5, 누가 11, 요한 0) 반면에, 동사형으로서의 믿음(pisteuo)은 마태가 11, 마가가 14, 누가가 10번 사용하는데, 요한복음은 92번이라는 압도적인 횟수로 사용합니다.

요한에게 믿음이란 머리로 이해하는 인지적인 행위가 아니라, 온몸으로 복종하는 전인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3장 마지막 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 (3:36) 여기서 믿음’(pisteuo)의 반대는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않는 것’(apeitheo)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믿음을 관념화시키지 않으며, 미래에 얻을 보상으로 대체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현재 실행되는 것이요, 믿지 않은 삶 또한 지금 바로 그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본문 18절은,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것이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19)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란 존재의 구조 자체에 반영되는 무엇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진리를 행하는 사람이요, ‘빛으로 나아오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21절 말씀입니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에서 시작된 삶의 전환 / 에베소서 21-10]

에베소서 본문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삶의 전환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삶을 변화시키는 근원적인 동력에 대한 성서의 묘사는 오묘합니다. ‘죄와 죽음을 넘어서 생명과 구원으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힘을 믿음의 행위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서 찾습니다. 여기에는 심오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선언하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전에는 죽었던 사람이었습니다’(You were dead). 이 죽음의 삶은 세 가지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허물과 죄, 둘째는 불순종의 영이요, 셋째는 육신의 욕망입니다. 그로 인해, ‘진노의 자식처럼, 세상의 풍조를 따르며, 공중의 권세를 좇으며, 욕망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며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근원적인 존재의 변화가 생겨납니다. 본문은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작품이 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행위의 변화보다 더 깊고, 도덕적인 변화보다 더 구조적인 존재의 변화입니다.

본문은 그런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삶을 뒤바꾼 이 구원의 사태는 믿음을 통해서’(through faith) 오지만, ‘하나님의 은혜로’(by grace)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일 뿐, 자랑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서의 이 설명은 어떤 사실에 대한 논증이라기보다는 실존적인 깨달음에 관한 고백에 가깝다고 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지는 삶의 경험에 관한 신학적인 논증은 항상 부분적인 진술이 되기 쉽습니다. 본문의 가르침은, 삶의 전환을 이루는 존재의 도약에 있으며, 그 가능성의 토대를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에 두고 있습니다.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고백에는 커다란 꿈이 담겨 있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깊은 믿음이 있습니다. 암담한 현실일수록 더욱 간절해지는 소망이 있습니다. 죄와 욕망이 얽혀 소용돌이치며 빚어내는 역사의 비극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물처럼 다가오는 구원의 세계를 향한 생생한 믿음의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도 해당합니다.

우리는 가히 역사의 사순절이라 할만한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깊은 현실의 질곡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더욱 벌어진 양극화와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중되는 고통들, 생명의 가장자리 맨 먼 곳까지 내몰려 절벽에서 떨어지는 성 소수자들, 군부의 악행에 억압당하는 미얀마 민중들의 열망들, 한미동맹이라는 분단시대의 적폐가 만들어내는 일상화된 전쟁들, 외면당한 세월호의 진실로 인한 절망과 분노, 이 위태로운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빕니다. 고난의 길을 걷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걸음을 지켜주셨듯이, 하나님께서 코로나 시대를 지나는 모든 이들의 발걸음을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사순절을 지나는 우리 삶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어지는 삶의 기쁨과 보람이 있기를 빕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고통과 위기의 시간을 지날 때,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속으로 들어갑시다. 주님께서는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믿음의 꿈을 안고 살아가면서, 고난마저도 축복으로 바꾸는 사순절의 은총을 우리 삶에서 펼쳐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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