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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다시 세울 말씀 | 김희헌 | 2021-03-07

by 김희헌 posted Mar 07, 2021 Views 16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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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03-07

다시 세울 말씀 (20:1-17, 고전 1:18-25, 2:13-22)

2021.03.07. 사순절 셋째 주일

 

[말씀으로 세우는 삶과 세계]

연초에 미뤘던 교육부 진급 예식을 경칩을 거친 봄의 문턱에서 가져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자라나는 이들이 있음을 보는 것은 기쁨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위해 함께 다음과 같은 축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 안에 당신의 은총을 따라 자라나는 푸르른 생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이들의 삶을 이끌어주시기를 바라며, 그 이름을 불러봅니다. 유아부에서 유치부로 자라난 고승현, 이수아, 황주혁, 유치부에서 어린이부로 자라난 오율, 어린이부를 마치고 청소년부로 올라선 김예현, 나해솔, 안소현, 고등학생이 되어 삶을 펼치게 될 맹은채, 박새봄, 전치우. 이들이 자라나며 경험하게 될 세계는 앞선 세대가 지나온 세상과는 다르겠지요? 지난 세대가 겪었던 고통과 위기를 이겨내는 지혜뿐만 아니라, 앞선 세대가 거둔 기쁨과 감사까지 이들의 마음에 채워주셔서, 평화롭게 자신들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시련을 회피하지 않고, 고통에 무릎 꿇지 않으며, 헛된 욕망의 유혹을 따라 살아가지 않도록 주님의 말씀을 그 마음에 담아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들과 함께 배움과 나눔의 공동체를 지어가는 많은 이들의 보살피는 손길을 도와주셔서, 주님의 뜻을 받드는 복된 가정과 교회 되게 하소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공동체 안에는 다양한 세대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세대를 이어주는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큰 기쁨이자 축복일 것입니다. 반면에, 서로 단절되어서, 이어갈 말씀을 갖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고 슬픈 일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나온 어떤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문화적으로 다채롭습니다. 하지만, 지난 한 세대 동안 삶의 모든 영역을 훑고 지나간 신자유주의 광풍으로 인해, 진리의 말씀을 잃어버린 시대의 공허를 느끼고 있습니다. 경제 지상주의에 물든 세계에서 사람들의 꿈은 획일화되고, 각자도생의 생존영역에 내몰리는 이들이 늘어가면서 두려움과 혐오는 일상화되었습니다. 우리도 그 세계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일 아침에 예배드리는 우리 마음에는 어떤 물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확신의 모습이든 회의의 모습이든 간에,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물음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사순절 아침에 묵상 자료를 접하는 시간에도 문득문득 생각합니다. 무엇이 나를 이끌고 있는가?

이렇게 생각이 깊어지면 물음도 더욱 커지고,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는 생을 바쳐 밀고 갈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구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이 알게 모르게 우리 삶에서 반복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소유물이 되기를 거부할 때, 더욱 자유롭게 세상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랑과 진실에 허기진 영혼으로 메마르지 않기 위해서는, 이번 주일 시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님의 교훈은 완전하여서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고, 주님의 증거는 참되어서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준다. 주님의 교훈은 정직하여서 마음에 기쁨을 안겨 주고, 주님의 계명은 순수하여서 사람의 눈을 밝혀 준다. 주님의 말씀은 티 없이 맑아서 영원토록 견고히 서 있으며, 주님의 법규는 참되어서 한결같이 바르다.” (시편 197-10)

 

[광야의 삶에 필요한 말씀 / 출애굽기 201-17]

한 개인의 삶이든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든지 간에, 그 총체적인 운명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는 성서의 출애굽기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제국의 억압적 질서를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따뜻하고 안전한 고기 가마를 두고 광야로 나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광야의 삶을, 그것도 40년이나 거친 들에서 살아남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대해서 주어진 답이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당신의 말씀과 계명을 주십니다.

광야의 백성들을 위해 한 첫 번째 일은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이것은 하나님의 목소리에 담겨 들려진 새로운 삶의 출발에 관한 선언입니다. 그들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었고, 그들을 새 삶으로 이끄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자기 삶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깨닫지 못하면, 황량한 광야에서 끝도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자기 삶을 세우지 못하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도 지어가지 못합니다. 그럴수록 각자의 삶은 파편화되면서 공감대는 약해지고, 자기보다 약한 이들에게 적대감을 표출하고 고통을 떠넘기며, 혐오를 뒤집어씌우는 죽음의 문화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것은 자유민의 삶이 아니라 또 다른 종살이이며, 제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스스로 식민지 백성이 되는 삶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광야 생활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하늘의 말씀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야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 담긴 정신을 이어가는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 계명을 거룩하게 하는지에 대한 분별입니다. 다시 말해서, 돌판에 기록된 열 가지 계명 자체가 신성한 것은 아닙니다. 그 계명이 거룩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길잡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이 문자적인 도그마가 되어 삶을 질곡으로 빠뜨린다면, 차라리 파괴되고 조롱받는 것이 낫습니다.

만일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했던 신을 통하여 또 다른 우상을 만든다면, 그런 신은 버림받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것이 서구기독교가 제국주의로 물든 19세기에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를 선구적인 철학자로 받아들인 이유입니다. 또한, 도둑질하지 못한다는 계명을 과장하여 개인의 사적 소유를 신성시하는 자본주의의 덫에 걸린다면, 그런 편협한 생각을 뒷받침하는 계명 역시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못한다는 마지막 계명은 어떻습니까? 거기에 남아있는 성차별적 잔재가 새로운 억압과 혐오의 근거가 된다면, 그 계명 역시 조롱당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서의 정신은 죽은 문자를 신봉하는 바리새인의 믿음보다, 살아 숨 쉬는 창조의 세계로 인도하는 예수의 믿음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전하는 출애굽기 역시 그러합니다. 살아있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살아가고, 말씀으로 새로워진 공동체는 더욱 고상한 목표를 세워가기 때문에 계명 자체를 새롭게 합니다. 그것이 출애굽기에 나오는 두 개의 십계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20장에서 우리는 윤리적 내용을 담은 열 가지 계명을 봅니다. 그런데 34장에 가면 그것과는 다른 내용의 제의적 십계명이 나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개의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자라난 신앙 정신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성서에 나온 순서와는 달리, 20장에 나오는 윤리적 십계명이 34장의 제의적 십계명보다 후대에 나왔다고 평가됩니다. 예언자들의 윤리적인 가르침이 거기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은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이 깨뜨리고 새로운 내용을 담은 돌판을 주셨다고 하는데, 돌판에 기록된 문자 자체를 신성시하는 신앙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시대가 뒤척이며 하나의 계명이 만들기까지 많은 노고를 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생동하는 신앙과 함께하지 못하면 낡은 정신을 대변하다가, 결국 깨뜨려 집니다. 그것이 출애굽기의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 필요합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세속주의와 근본주의라는 정신적 병폐를 앓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가 분단 이데올로기의 보루이자 성 소수자 혐오세력의 온상이 된 모습입니다.

외세를 척결하려고 일어선 3·1운동의 뜻이 백 년이 지났어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분단된 이 땅에서 동족을 상대로 하는 전쟁연습을 외세와 결탁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동족을 향한 이데올로기적 증오는 사회 안에서는 다른 모습의 혐오로 번성합니다. 가난한 약자들, 난민과 성 소수자에 대한 냉담과 혐오는 시대의 어둠을 보이는 지표입니다. 최근 거대한 사회적 장벽에 눌려 삶을 마감한 트랜스 젠더 김기홍 님과 변희수 님의 죽음은 개인의 비극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둠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회요, 다시 생명의 말씀을 세우는 것입니다.

 

[말씀을 다시 세운 성전정화 / 요한복음 213-22]

요한복음 2장의 본문은 성전정화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내용인데, 요한복음의 기록은 다른 복음서와는 두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먼저, 세 개의 공관복음서는 성전정화사건을 예수의 공생애 마지막에 있던 사건으로 그리지만, 요한복음은 예수의 활동 초기에 있던 사건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는 이 사건을 자세하고 길게 서술하면서 예수의 분노와 유대 사람들의 관심까지 담아냅니다.

이 두 가지는 요한복음이 주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자신의 복음서를 말씀의 신학으로 시작한 것처럼, 예수의 활동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세우는 데 있음을 알려줍니다. 성전정화 사건은 이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삶에 긴요한 것은 경제생활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돈의 힘은 무척 세고, 경제 지상주의는 모든 삶의 영역을 파고듭니다. 기도하는 성전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 현실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분노한 그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르기까지 합니다.

수도 예루살렘의 고상한 사람들은 갈릴리 촌에서 온 낯선 젊은이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겠소?그들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비웃음을 사기 쉬운 말입니다.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말합니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

그들은 46년이라는 그 긴 시간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그 웅장한 겉모습에 정신이 팔려있었습니다. 46년의 기간은 실상, 사대주의로 권력을 이어가는 헤롯이 민중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 시간이었을 뿐, 민족의 뜻을 세우는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려는 예수의 시간은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는 우뚝 선 말씀이 있는 새로운 성전을 세우고자 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필요한 시간은 낡은 질서에 속박된 몸이 죽고 다시 말씀으로 부활하는 시간, 사흘이면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예수와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서 마흔여섯 해사흘이라는 시간을 극적으로 대비시킨 요한복음은 읽는 사람들에게 어떤 시간을 살 것인지를 묻습니다. 자기 욕망에 갇힌 삶과 하늘의 말씀으로 열린 삶을 그렇게 대비시키지만, 요한복음은 그 차이는 쉽게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후에야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2)

 

[생명의 길, 십자가 / 고린도전서 118-25]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삶을 살아가는 세 가지 방식을 말합니다. 첫째는 기적이요, 다음은 지혜요, 마지막은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세 가지 길에 관한 은유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라고 하는 은유에 담긴 심각성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오늘날 길을 나서는 것은 내비게이션을 켜고 잘 닦인 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오래전 종교에서 이라는 은유가 생겨났을 당시에는 다른 여건이었습니다. 길을 나서는 것은 위험한 일이요, 불확실성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낸 또 다른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말합니다. “여행하는 동안에,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고후 11:26-27)

만일 그가 자신의 길을 유대 사람들처럼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처럼 지혜를 찾는것으로 삼았다면,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려 했던 그는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십자가의 길이었고, 그것을 뒷받침한 것은 하나님의 약함이라는 사상이었습니다.

억압적 문명을 사는 사람들이 걷는 길은 대체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적을 얻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지혜를 얻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힘과 지혜이기보다는, 두려움이 빚어낸 삶이 선택한 길이기 쉽습니다. 두려움에 잠긴 삶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어리석은 길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시대의 현자도, 학자와 변론가도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이 세 번째 길을 말함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두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가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걸으신 길이요, 그를 본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걸어갈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끼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길 위에 세워집니다.

십자가의 길은 위험한 길이요 불확실한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한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의 현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그것을 직시하고 받아들인다. 다만 십자가가 부인하는 것은 그 죽음의 현실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H. R. Niebuhr, Theology, History, and Culture, 205)

우리가 삶을 사는 동안 계속되는 것은, 사람의 지혜와 강함을 추구할 것인가,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약함을 따라 살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말씀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음의 현실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신 생명의 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노래한 시편의 시인처럼 (119:105),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든든히 세워가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침묵으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우리가 세울 하나님의 말씀은 십자가의 길에 있습니다. 황량한 광야의 삶에서도 서로 돕고, 서로를 섬기며 살아갈 때, 생명의 길이 열립니다. 다시 찾아온 봄의 세상을 생명의 길로 열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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