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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다시, 봄 | 김정원 | 2021-02-28

by 나비정원 posted Feb 28, 2021 Views 22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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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1-02-28

 

"다시, 봄"

 

(창세기 17:1~7,15~16, 로마서 4:13~25마가복음서 8:31~38)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계시는지요? 달력을 보며 아니 벌써 2월이 다갔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가고 계절이 변하고 있음을 느끼실텐데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달력이 있지요. 바로 교회력입니다. 교회력은 성부의 계절, 성자의 계절 그리고 성령의 계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부의 계절은 창조절부터 대림절까지, 성자의 절기는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주일 전후까지, 성령의 절기는 부활절과 성령강림절까지로 나누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성자의 절기 중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차갑고 시린 겨울에서 따스한 봄으로 넘어가는 이때,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언 땅이 녹고 노오란 개나리가 올라오는 이 기간의 기운이 어쩜 그리 고난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사순절과 부활절을 닮았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사순절 둘째 주일 아침, 오늘은 예수님 이야기로 하늘뜻펴기를 열고자합니다. 예수님의 교육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였고, 그의 교육방법은 비유였습니다. 가끔 제 동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군가 아주 찰떡같은 비유를 들어 말할 때면 거참 예수의 비유로세!’라고 맞장구를 치곤하는데요. 겨자씨, 밭에 감추인 보물, 잃은 양 등 예수님은 참 비유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오늘은 비유를 멈추고, 아주 노골적으로 자신의 뜻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베드로는 깜짝 놀라 예수를 바짝 잡아당깁니다. 베드로는 왜이리 놀랐을까요? 아마도 본인이 마음에 품고 있었던 계획과 예수님의 계획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쩌면 예수님이 정치적 위상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기를 원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이스라엘의 물리적 왕이 되길 고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회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될 예수님을 기대하던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그런 말은 없지 않았습니까. 죽는다니..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만하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를 호되게 꾸짖기 시작합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느냐!” 그런 뒤에 제자들에게는 나를 따른다는 이야기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오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반응을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으십니까? 힌트를 드리기 위해 제가 오늘도 두 개의 그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림1.jpg

(그림1)

첫 번째 그림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고 휙 돌아서 가버리는 장면입니다. 베드로가 머리를 감싸 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다음 그림

그림2.jpg

(그림2)은 성서의 어떤 이야기를 표현한 것일까요? 그림의 원제는 The Temptation of Christ on the Mountain’(by Duccio di Buoninsegna, c. 1308-11) , 광야에서 수행할 적에 사탄에게 시험을 당했던 그 이야기를 표현한 것입니다. 두 개의 그림이 닮았지요? 성서 구절 또한 닮았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당할 때 사탄에게 외쳤던 말씀과 그 의미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람의 일을 구한다고 꾸짖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탄 역시 사람의 것들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 명예, 권력으로 예수님을 꾀어내던 사탄과 예수님을 통해 세상의 것을 얻으려 했던 베드로의 모습은 꽤나 비슷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말한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요? 분명 부와 명예와 권력을 좇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공히 우리가 인지하고 있을터인데, 그것을 조금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바울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를 사는 우리와 고대 로마제국 시대의 지중해 연안 도시들의 현상을 유비시키며 의미를 찾아간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 여정을 밟아보려 합니다. 먼저 바울은 어떤 사람인가요? 요즘 청년들과 함께 리부팅 바울이라는 책을 같이 보고 있는데요. 그 책을 읽으며 그간 바울에게 가졌던 오해를 하나씩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니체는 바울을 몹시 싫어했는데, 왜냐하면 혁명적 예수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 인물이 바로 바울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자유주의 신학자인 하르낙, 그리고 안병무, 문동환 등 여러 신학자들 역시도 바울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제국의 팽창주의의 원흉이자 반여성주의자이며 가부장적 교권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재해석해보려는 시도들 역시 여기저기 있었습니다. 바울을 새롭게 보는 시도인 것이지요. 오늘 하늘뜻펴기의 제목을 다시, 이라고 했던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혹시 우리 교우들께서도 청년 예수’, ‘역사적 예수와는 다르게 다소 교리적이고, 그래서 약간 잔소리쟁이 같고, 덜 혁명적이라고 바울을 이해했던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 이 시간이 바울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의 활동 무대는 1세기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대도시 지역은 급속하게 인구가 늘었고 여러 인종이 뒤섞여 있었으며, 다층적이고 복잡한 계급과 계층 구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복잡한 구조 안에 통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없던 상태였습니다. 하여 많은 인종적, 종교적, 계층적 결사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결사체가 조직적인 활동을 통해 도시를 안정화 할 경우, 헤롯은 그 도시에 기부금을 주었습니다. 모범적인 결사체들은 조세를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이나 사법권 등의 특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불어나는 도시를 안정화 시킬 방도가 딱히 없었던 헤롯은 한 마디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니, 순기능을 하는 결사체들의 활동을 막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 로마 제국 안에 이스라엘계 사람들이 무려 500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들 역시 결사체를 만들어 활동하였고, 이들은 성전 제의를 중심으로 조직을 안정화 시켰습니다. 즉 회당을 중심으로 조직을 안정화 시켰는데요(김진호). 그들의 꽤나 격조있는 움직임은 적지 않은 개종자들을 끌어들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결속력을 강화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 독자적인 규범체계가 필요했고, 이런 배경 속에서 그 문제의 율법주의가 등장하게 됩니다. 누가 더 유대인다운 삶을 사는가?’라는 물음이 그들을 통제하는 중요한 물음이었고, 유대주의적으로 해석된 율법은 순혈주의적 배타주의, 즉 할례와 전통 절기에 대한 충성도를 강요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율법만 잘 지키면 되느냐, 사실상 그렇지 않고 회당에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들, 당국에 조세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만 유대인다운 유대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회당은 사회적으로 품격을 강조하는 지위 있는 남성들로 편재되기 시작합니다. 이곳에는 돈도 좀 있고, 학식도 좀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회적 안전망도 없는 사람들이 안전해 보이고, 그럴싸해 보이는 회당에 그들의 생존을 위해 모였습니다. 민중신학자 김진호는 이러한 현상을 마치 러일 전쟁 당시 양대 강국 군대가 평안도 양민에게 만행을 저지를 때 군대의 폭력을 피해 그리고 밥을 얻어먹기 위해 교회로 피해 들어온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들을 선교사들은 밥신자라고 부르며 주변화 시켰던 상황과 비슷했을 것이라 말합니다.

 

이제 이 이스라엘계 사람들이 만든 결사체는 중심부와 주변부가 나뉘게 됩니다. 회당 구성원으로서 주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유대인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로 규정되고 대상화되었습니다. 유대인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인이 되고, 의롭게 될 기회는 박탈되고 맙니다. 유대인 밖의 사람들, 유대인 전체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 전체 속에 잔여로 전락한 사람들이 회당 속에서 근근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 쫀쫀하게 굳어진 계급 구조 안에서, 바울이 외칩니다. 바울의 외침에 네러티브적 상상을 더한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율법을 의지하는 사람만이 의인이라면, 믿음이 대체 무슨 소용입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모두 잊었습니까? 그가 율법을 지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그 어떤 율법을 지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라! 하니, , 가겠습니다-했던, 그 강직한 믿음으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율법은 화를 불러옵니다. 율법이 있기에 죄인이 생기고, 차별과 배제가 생겨납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그 어떤 사람도 죄인이 아닙니다. 모두가 의인이며 모두가 자유인입니다.”

 

단단하고 아주 깡깡한 것처럼 보이는 전체조직이었지만, 사실 바울이 의인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전체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망각되거나, 전체의 외부에 놓인 사람들, 즉 부스러기 같은 잔여의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쓸모없는 계급이며, 누구에게는 비존재였던 유대인 같지 않은 사람들을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철학자 아감벤의 생각을 빌려오자면, 바울이 이렇게 외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배제당했던 사람들, 즉 이 전체 속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와 같은 사람들이 바울을 불렀기 때문이라는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똑같은 명찰을 달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명찰이 없는 사람이 튈 것입니다. 모두가 맛있는 밥을 먹을 때, 그 속에서 식사를 못하고 서성이는 사람들이 눈에 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질서 정연하게 움직일 때, 방향을 잃고 헤매는 사람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잔여의 사람들을 통해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 지금 뭔가 놓치고 있는 거 같은데-?’라는 물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명찰을 단 사람들이 외치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사회의 질서를 지키는 데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전체성에, 완전성에, 정의로움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신익상)

 

그러기에 그 부스러기와 같은 사람들은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곳에서, 되게 자연스러워 보이는 상황 속에서,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부스러기와 같은 사람들이 만든 사건을 통해 율법으로 구조화된 유대주의적 결사체를 해체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계급적, 신분적, 성적 경계를 해체하는 의인론을 제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탄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은 결국 바울이 했던 것처럼,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주권이 박탈된 잔여 모두를 은혜의 공간으로 호출하는 선언일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 은혜의 공간으로 호출되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부터 미얀마 군부와 목숨을 걸며 투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지난 24너무 지쳤어요, 삶도, 겪는 혐오도, 나를 향한 미움도, 오랫동안 쌓인 피로가 있어요. 미안해요라고 유서를 남기고 떠난 트랜스젠더 김기홍 님이 은혜의 공간에 있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로 시선을 옮겨볼까요? 우리 교회 안에서 잔여가 되어,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역시 이 사순절 기간 은혜의 자리로 초청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서- 혹은 말주변이 없어서- 혹은 교회 내 갈등이 염려돼서 혹은 가진 것이 많지 않아서, 배운 것이 없거나 몸이 불편하여서, 교회의 주변부에서 서성이는 우리 공동체 내의 잔여-주체들을 우리의 예배 자리에 소환하며, 주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가득하기를, 그리고 그들이 진정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의인이자 주체가 되기를 간절히 빌어 봅니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던 것을 다시 보는 것, 익숙한 것들 속에서 낯선 것들을 다시 보는 것,보편과 상식의 틀 밖의 사람들을 다시 보는 것. 이렇게 다시 볼 수 있는 힘이야 말로 참 믿음이요, 은혜로 가는 길일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봄이 옵니다.

 

 

 

파송사 :

 

차가운 겨울이 봄을 소환하듯, 바깥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소환합니다.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나가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부릅니다.

 

봄볕처럼 따스한 마음으로 우리를 부르는 곳으로 나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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