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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서로 사랑하라 | 김희헌 | 2018-04-22

by 관리자 posted Jun 25, 2018 Views 14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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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4-22

서로 사랑하라 (행 4:5-12, 요 10:11-18, 요일 3:16-24)

 

2018.04.22. 부활절 넷째 주일

 

  

 

[4.27 남북정상회담, 민족 화해의 시대가 온다!]

 

간절히 기다려온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오는 금요일에 개최됩니다.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열리게 된 것에는 갈등과 대립을 근본적으로 털어내려는 우리 민족의 염원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정상회담의 의제는 3가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반도 비핵화,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 남북관계 진전이 그것인데, 분단구조를 청산할 수 있는 핵심 사안에 남과 북이 집중하고 있기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놀라운 뉴스가 지난 주 내내 쏟아졌습니다. 미 국무장관으로 지명된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특사로 방북하여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났다는 소식이 3주가 지나서 공개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지난 화요일 미일 정상회담(4.17)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終戰)’을 언급하면서 ‘축복 한다’고 반복해서 말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그리고 북미 수교에 이르는 과정이 이번에는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높습니다. 북은 그 과정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미군철수를 요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핵실험과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를 중단하고, 핵실험장을 폐기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도 어제 전해졌습니다. 

 

이렇게 남북 화해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감개무량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긴 갈등의 시대에 역사의 제단에 몸으로 바친 제사와 기도가 얼마나 컸습니까?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불현듯 닥친 것 같지만,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땀의 헌신과 노력이 만들어낸 결실이요, 또한 남북 민중의 한을 풀어주시려는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1953년 정전협정이 맺어진 이후 남과 북 사이에, 그리고 북미 간에 여러 차례 합의와 협정이 체결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약속과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오해와 훼방이 반복적으로 있었습니다. 깊은 상처로 인한 두려움, 증오로 얼룩진 오판, 사대주의 세력의 방해, 동맹국들의 이권 관계 등이 서로 얽혀 절망의 시대가 깊었습니다. 

 

여전히 분단체제의 질서가 작동하고 있고, 한반도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세력들의 준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걷히고 있으며, 평화와 화해의 시대가 우리 민족 앞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동포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감사인지를 실감하게 될 시간도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 속에서 인간의 긍지를 높이고, 증오와 혐오를 걷어내고 보살핌과 환대의 문화를 가꾸며, 약육강식의 제도를 넘어 공동체적 안녕이 가능한 체제를 실험해가며, 남과 북이 경제 공동체를 이루며 생긴 활로를 달리는 기쁨을 누리면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적 모델을 인류 앞에 당당히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는 평화의 꿈을 더욱 크게 품어야 합니다. 배타주의에 물든 옹색한 정신을 떨쳐내고, 돈과 힘에 길들여진 종교성을 갱신해 가면서, 사랑과 정의가 협력하여 이 세계를 진리와 아름다움으로 물들여가도록, 그 믿음의 거처를 든든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새 시대의 새 사명을 벅찬 가슴으로 감당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의 두 가지 의미 / 사도행전 4장 5~12절]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심문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의회에 붙잡혀왔습니다. 왜 그들은 당시 최고의 사법기관에 끌려왔을까요? 그들의 운동이 로마제국의 질서 안에서 잇속을 찾던 기득권 세력들을 “초조하게(distressed)”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면 수천 명 씩 모여서 듣고 자신들의 삶을 돌이키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2천 년 전에 일어난 ‘예루살렘 촛불집회’라고 할 만합니다. 그 집회에서 나온 이야기의 골자는, 예수라는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그것은 이제까지 죽음의 체제 속에서 죽었던 사람들의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죽음은 기억해서는 안 되는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연한 사고라기보다는 ‘죽임당한 사회적 타살’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진실을 말하고 결국 체포됩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면, 유대의 지도자들이 모입니다. 산헤드린 의회를 중심으로 짜인 기득권 체제의 면모를 누가는 자세히 묘사합니다. 맨 먼저 거론된 사람은 안나스라는 사람입니다. 시리아 총독(퀴리니우스)이 그를 임명하여 8년 동안 대제사장 직무를 담당케 했는데, 그 기간 동안 그는 족벌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아들 다섯 명뿐만 아니라, 사위까지 대제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주후 15년에 면직되었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의 실세였습니다. 

 

두 번째 나오는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인데, 복음서에는 음모가로 묘사됩니다. 그가 안나스의 뒤를 이어 18년 동안 대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기간에 예수가 등장했습니다. 가야바는 예수를 죽이려고 사람들을 회유했고 (요 11:50), 마침내는 직접 예수를 심문하고 총독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마 26:57) 누가는 이들만이 아니라,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 모두”가 모였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는가?” (7절) 베드로는 먼저 자신이 기소당한 이유를 확인합니다. “(오랫동안 앓던) 병자에게 착한 일을 한 것”이 문제인가?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 당신들에게 문제라면 대답하겠소. 질병으로 고통당하던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된 것이오.” (9-10절)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에 대한 증언을 이어갑니다. “(그분은) 너희들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11-12절)

 

여기서 베드로는 시편 118편을 인용하지만, 시편에는 없는 ‘너희들’을 추가하면서 당시의 기득권 세력들을 비판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집 짓는 사람들’로 여기고 예수를 ‘버림받은 돌’처럼 취급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는 나중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유명해진 만큼 오해도 컸습니다. 오해의 진원지는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이 말은 기독교의 배타주의적 정신의 논리적 근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사용한다면 베드로를 모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베드로의 주장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말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향해서’ 한 말인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은 경건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했던 베드로의 종교학 강의가 아닙니다. 이 주장은 기득권 세력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그들을 비판하는 논리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유념하지 않으면, 베드로의 말을 ‘정의와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증오와 배타의 언어’로 뒤바꿔 이해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말했던 대상은 대제사장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집짓는 자들’로 간주했고, 예수를 ‘버림받은 돌’처럼 취급했습니다. 다시 말하여, 그들은 ‘구원이 예수에게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에 구원이 있다고 보았을까요? 성경에 설명은 없지만,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지배 질서인 로마제국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에서 자신의 구원을 모색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좋게 말하여 사대주의자들이지 그들은 실상 매국노들이며, 현실에서는 제국의 체제에 탐닉하여 얼이 빠진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병으로 고통당하던 동포가 회복된 사건을 문제 삼고, 식민 질서의 암울함 속에서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들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견디지 못합니다. 바로 그들이 ‘예수를 버린 돌’ 취급했고, ‘예수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그들과 맞서서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히브리 성서에서 ‘오직 야훼만!’이라는 급진적 유일신 사상이 모든 왕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해방 정신을 대변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베드로의 말은 기득권 체제에 맞서려는 진취적인 저항정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베드로의 말을 배타주의의 언어로 둔갑시키는 것은 해방의 이상을 잃은 소심한 종교의 편집 증세로 봐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종교정신이 일그러진 배경에는 긴 이력(履歷)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래로 지배자의 목소리를 대변하였고, 주로 가해자의 종교로서 존재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예수의 가르침을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언어에 담아 사용하는 습속에 젖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 해묵은 관습에서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을 배타적인 태도에서 찾지 않고, 원수마저도 용납하는 성경의 가르침에서 구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surely rooted) 있기 때문에, 동시에 ‘철저하게 열린’(radically open)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John B. Cobb, Jr., Transforming Christianity and the World, 7) 

 

  

 

[선한 목자와 사랑의 삶 / 요 10:11-18, 요일 3:16-24] 

 

이점에서 요한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요한복음 본문에 나오는 ‘선한 목자’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한 말씀입니다. 이 논쟁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눈 먼 사람을 고친 사건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생명살림의 사건에서, 바리새인들이 유독 주목했던 것은 예수가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지점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눈을 떴지만 실은 눈이 먼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요 9:40-41) 

 

이런 상황에서 오늘 본문이 시작되고, ‘선한 목자’와 ‘삯꾼’이 비교됩니다. 요지는 간단합니다. 자기를 바쳐서 양을 돌보면 선한 목자이고, 자기 잇속을 따라 살다가 위험에 처할 때 양을 버리면 삯꾼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자화자찬하기 위해서 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눈을 떴다 하지만 실은 눈이 먼 세계’를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를 성찰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분단 시대를 살아오는 동안 한국사회에는 양두구육의 거짓을 일삼으며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리는 삯꾼들이 많았습니다. 폭력과 학살의 과거를 은폐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 자본의 질서를 우상처럼 떠받들며 정의와 평등을 외면한 사람들, 증오와 배타의 정신을 퍼뜨리며 민족을 분열시킴으로써 생존을 모색한 사람들, 이런 삯꾼들이 허리 잘린 한반도를 올라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들이 선한 목자를 찾듯이, 민족을 살리는 선한 목자들을 우리 역사는 꾸준히 길러내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고, 자기 우리에 속한 양들만이 아니라 다른 우리에 속한 양들까지 이끌고 돌보는 사람들입니다. (15-16절) 

 

우리 역사에서 이런 선한 목자들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이들입니다. 이들이 도리어 삯꾼들에게 핍박과 죽임을 당하는 서러운 역사를 오래 지나왔으나, 역사는 또 다른 선한 목자들을 잉태함으로써 부활에 이르도록 이끌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증오로 눈이 먼 분단의 시대를 과감히 접고, 형제와 동포의 가슴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화해의 시대를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도 요한이 전해주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요한일서 본문에서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깨달음이요, 다른 하나는 그 깨달음에서 비롯된 권면입니다. 

 

요한은 16절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분명히 정치적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진 예수의 주변에서 형벌과 연관된 여러 모습을 보게 됩니다. 로마 군병의 폭력과 유대 민중들의 야유, 그 이면에 일렁이는 욕망과 두려움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무지막지한 폭력적 사태 앞에서 예수의 고뇌와 제자들의 비겁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런 현상적인 장면들보다도 그 사건의 전체적인 의미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단언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나서,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권면합니다. 이 깨달음과 권면의 말씀은 우리가 함께 읽었던 23절에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강조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요, 예수의 명령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24절)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의 근본적인 윤리지침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사랑 속에 창조되는 새로운 남과 북]

 

남북 화해의 시대를 맞으면서 한국교회는 요한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분단 이데올로기의 최후 보루처럼 살아온 지난 삶을 참회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라 분단시대의 정신적 병폐를 씻어내야 합니다. 분단의 시대가 분열, 억압, 불신, 비난으로 채워진 죽음의 시대였다면, 민족의 부활이란 서로 사랑하는 시대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의 이기적인 감정을 이루려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달콤한 풍요 속에 살아온 자들은 언제나 제 마음의 불편을 덜기 위해서, 자신이 해온 방식으로 해대며, 상대방의 존엄과 미래를 망치는” 일을 하곤 합니다. (박노해, ‘지붕 위의 두 여자’ 中) 그것이 사랑일 수는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함께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함께 장애물을 이겨가는 ‘끈질긴 모험’입니다. 참 된 사랑은 시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합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이런 사랑의 활로가 열리기를 기원합니다. 평화협정을 이루기 위해서 서로 고무하고, 서로 찬양하는 일들이 많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교회 앞 현수막,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이날이 언제 올까 했는데 마침내 다가왔습니다. 

 

이 현수막을 뗄 때에는 큰 축제를 벌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를 고무하고 찬양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하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라, 생명이 부활하는 공동체를 이루며, 기쁨의 축제를 벌이는 날이 속히 오도록 함께 노력해가기를 바랍니다. 

 

침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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