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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여성과 노동 | 여수진, 김희헌 | 2020-11-08

by 김희헌 posted Nov 08, 2020 Views 14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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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11-08

여성과 노동 (24:1-3a,14-25, 살전 4:13-18, 25:1-13)

2020.11.08. 창조절 열 번째 주일, 전태일 추모주일 (50주기)

 

[여성의 자리는 평등한가 / 여수진 교우]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모두 알다시피 전태일 추모 주일입니다. 50년 전 전태일이 불꽃으로 산화하던 당시 끌어안고 있었던 건 바로 근로기준법 해설서였습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그 근로기준법을 매일 보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근로기준법을 비롯한 노동법은 노동자가 너무 많이 일해서는 안 되고, 노동으로 삶을 꾸릴 만큼 적정한 임금을 받아야 하고, 다치거나 죽지 않고 일해야 한다는 권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노동자에게는 권리를, 사용자에게는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현실에서 사용자와 노동자의 힘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권리가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사회에서 자리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와 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회가 한사람에게 그 구성원의 자리를 주는 것을 환대라고 표현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리고 이 환대는 조건이 없는 환대를 말합니다. 돈이 많을 때, 남자일 때, 대학을 나와야만 할 때, 정규직일 때, 한국 사람일 때만 사회에 자리를 갖는 것은 환대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는 신분제 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은 결국 노동자에게 사람으로서의 자리를 줄 것을 요구한 것, 무조건적으로 환대받을 권리를 외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세계는 차별 없이 굴러가지 못합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연대 평등정책TF 보고서 - 노동/일의 세계2020.6.9. 차별금지법 제정연대 평등정책 TF) 이윤을 위해 노동의 권리, 즉 사람이 될 권리를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권리를 무너뜨리기 위한 핑계로 차별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여성, 성 소수자, 이주노동자, 고령자 등 그런 취급을 해도 되는사람들을 발명해 내는 것이죠. 남성 가부장이 아닌 존재들은 이 사람됨의 권리가 가장 먼저 무너지는 장소이자 세계의 불합리를 가장 먼저 겪는 자들이 됩니다.

이 중에서도 저는 오늘, 노동자로서 여성의 자리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여성은 과연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조건 없는 환대를 받고 있는 존재인지 물음을 던지려고 합니다.

전태일 당시 평화시장의 여성들은 당시 국가 경제가 필요로 하는 가장 싸고 열악한 일자리에 동원되었습니다. 적게는 13살부터 올라와 닭장같은 공장에서 16시간을 일하며 가난한 부모에게 돈을 보내고 큰오빠의 학비를 대야 하는 실질적인 생계부양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 걸맞은 임금도 받지 못했고 대접도 받지 못했습니다. 청계천 시다나 이후의 공순이라는 말에는 가난하고 못 배운 여자애들. 이 사회의 제일 밑바닥이라는 혐오와 멸시가 들어있었습니다. 학교에 가서 더 나은 삶을 만들어갈 권리를 남자 형제들에게 빼앗긴 이들은 자본이 그런 취급을 해도 되는유용한 존재들이었습니다.

평당 4명의 노동자가 밀집. 앉은자리에서 몸 한번 돌릴 수도 없는 공간, 수평으로 쪼개는 것도 모자라 수직으로 공간을 쪼갠 다락방. 허리 한 번 펼 수 없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하루 16시간씩 일하는 노동자의 자리. 그렇게 일해도 끼니를 걱정해야 하고 온갖 병을 얻어야만 했던 여성 노동자의 자리.

이 자리는 지금도 비정규직 여성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콜센터는 대표적인 여성 비정규직 일자리입니다. 서비스산업이 커지면서 인간의 서비스를 공장식으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콜센터 작업장입니다.

얼마 전 이 콜센터 노동자들을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1미터 간격도 안 되는 자리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단시간에 많은 콜을 감당해야 합니다. 받은 콜 수, 통화 시간, 대기 시간, 심지어 화장실 다녀온 시간까지 실시간으로 공유되면서 분 단위로 실적압박을 받고 1초의 낭비도 없이 시스템이 돌아가도록 운영됩니다. 화장실 갈 때도 체크, 도착해서도 체크해야 하는데 콜이 많을 때는 못 가게하고, 가도 10분 이상이 걸려서는 안 되기에 방광염에 많이 걸립니다.

그렇지만 이분들이 가장 고충을 토로했던 부분은 제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는데요. 바로 8초 룰입니다. 앞 전화를 끊고 무조건 8초 안에 다음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는데요. 전화를 받다 보면 갑자기 쌍시옷이 들어간 욕을 하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성희롱을 당하는 일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어김없이 8초 안에 전화를 받아야 합니다. 놀라서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도 잠깐 밖에 나가서 물 한잔을 마시고 올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눈물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8초 안에 밝은 목소리로 안녕하십니까 고객님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죠. 각종 실태조사가 밝혀낸 콜센터 상담원들의 우울증 유병률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감정과 생리현상까지 콜서비스라는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맞춰야하는 곳에서는 인간으로 최소한의 존엄성도 무너지기 십상입니다. 열악한 작업환경, 저학력 여성을 활용한 대량의 저임금 일자리, 구로에 몰려있는 것까지. 콜센터 노동자들은 7,80년대 여공과 비슷한 처지로 자주 비교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공장제 서비스산업, 다단계 하청, 전자 감시, 감정노동, 정신질병 등 신자유주의에서 나타날 수 있는 노동인권 문제를 먼저 겪고 있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회는 이들에게 쉽게 주목해주지 않았습니다. 같은 문제도 정규직, 남성, 대졸자에게 문제가 되어야 비로소 사회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겪는 자들에게서 코로나19 집단 감염이 가장 먼저 터져 나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곧 여성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 취업자 수는 남성과 여성 비율이 57 : 43 정도인데, 비정규직은 여성 55 대 남성 45의 비율입니다. 남성 근로자 중 비정규직은 100명 중 29, 여성근로자 100명 중 비정규직은 45명에 달합니다.

비정규직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모두 알고 있듯이 IMF 외환위기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기혼여성은 정리해고 1순위였습니다. 다음해 생겨난 정리해고 관련법에서는 정리해고 대상자를 선정할 때 성별을 이유로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까지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사회는 고개 숙인 가장들만 위로하기 바빴었지요.

1998년에는 IMF 요구에 따라 근로자를 사고파는 제도인 파견법을 만들었는데요, 이 때 어떤 업종에 파견제도를 허용할지 노사가 타협해 결정해야 했는데, 남성 직종은 대거 빠지고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종사하는 업종을 대부분 포함시켜 법이 통과됐습니다. 정부나 기업은 물론 같은 노동자들조차도 여성의 일자리를 남성 일자리를 지켜야 하는 방패막이나 손쉬운 거래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7. 이랜드에서 쫓겨난 마트 노동자, KTX에서 쫓겨난 여성 승무원들, 그리고 기륭전자에서 쫓겨난 공장노동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사업장마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구체적인 계기는 달랐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마트 노동자들은 반찬값이나 벌러 나오는 아줌마들로 취급받았고, KTX 승무원들은 예쁘게 피어있는 철도의 꽃이면 되는 존재로, 기륭전자 파견노동자들은 아줌마 내일부터 나오지 마요라는 문자 한 통으로 쉽게 잘라도 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자본은 바로 우리 사회의 성별 격차를 이용해 그런 취급을 해도 되는 노동자를 만들었고 비정규직이라는 노동의 권리가 무너진 장소를 만들었습니다. 노동계는 이 여성들을 응원했지만 역시 어머니’, ‘곱디고운 누이’, ‘불쌍한 주부들로 이들을 호명했습니다. 여성을 주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자본이나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노동자들은 여성 문제와 노동 문제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구로에 모여 연대 결의문을 외쳤습니다. “여성 노동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지 않는 한 비정규직 철폐는 불가능하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노동자로서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데서부터 비정규직 철폐투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여성을 억압하는 모든 구조에 맞선 싸움을 결의한다고 선포했습니다.

불안정노동 여성화가 더욱 극심해진 것은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시간제 일자리를 양산한 것이 큰 원인 중 하나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여성 고용율을 높이겠다면서 IMF때 잘리고 비정규직으로 밀려난 여성들을 시간제 일자리로 재활용하는 기획을 고안해냈습니다. 이 시간제 일자리는 정규직 남성을 100으로 놓을 경우 임금이 겨우 46% 밖에 안 되는 저질 일자리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동안 여성이 담당해왔던 돌봄노동에 대한 평가절하, 여성의 노동은 부차적이라는 인식, 여성은 일을 하면서도 가사노동도 같이 전담해야 한다는 인식을 배경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번에 코로나19로 인해 타격을 먼저 겪는 이들이 된 요양보호사, 방과 후 돌봄 전담사들입니다.

여성이 평등하게 분배받지 못하는 것은 임금노동뿐만이 아닙니다. 무급 노동, 즉 가사노동시간 또한 고르게 분배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맞벌이 가구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은 남성 배우자보다 약 4배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맞벌이 가구 남성은 혼자 버는 홑벌이 남성보다 가사노동을 하루에 단 1분밖에 더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2019년 생활시간조사 결과, 통계청)

우리나라는 OECD 최악의 장시간 노동국가이자 시간빈곤 국가입니다. 그 중에서도 여성은 남성에 비해 시간 빈곤율이 2배가 넘고, 시간빈곤이 제일 심각한 집단은 40대 유자녀 여성이라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24시간이 주어진다는 환상도 여성에게는 예외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에게 조국은 없다고 했습니다. 성범죄자들을 솜방망이로 처벌하는 국가를 보며 여성들 사이에서 이 말이 다시 회자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국이란 여성에게 인간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이 사회구조 그 자체를 말합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또 여성에게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만의 방은커녕 강남역 8번 출구 같은 지극히 평범한 자리도 여성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꽃이라 불리던 여성들은 불꽃이 되었습니다.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촉발되어 20-30대가 주도하고 있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딸이라서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는 공포를 공유하는 세대입니다. 90년대 그러니까 지금 20대 여성이 태어날 당시 산부인과에 초음파 기기가 도입되었습니다. 1990년생의 출생 성비 불균형이 가장 극심했었는데 여자가 100일 때, 남자가 116.5. 자연성비가 100105라고 하니, 100명 중 11명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태어날 자리조차 얻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운이 좋아 이 세상에 사람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던 여성들, 그들이 자라 20대가 된 지금 이 사회는 이들에게 어떤 자리를 내어주고 있습니까? 대학진학률은 남성과 진배없어졌지만, 노동으로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건 남성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는 OECD가 성별임금격차 통계를 낸 이래 16년간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어준 적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채용성차별이 큰 몫을 하는데요. 하나은행은 내부적으로 남성 10명당 여성 1명이라는 성별 합격자 비율을 정해놓고 여자들의 점수를 일부러 깎았습니다. 국민은행도 남자들에게 특혜를 주기 위해 여성들의 점수를 깎아 온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렇게 공정이 중요한 사횐데, 채용비리를 들켰으니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겠죠? . 벌금 500만 원이 고작이었습니다. 동시에 방송국이란 곳에서는 같은 아나운서를 채용하면서 남자는 정규직 여자는 비정규직으로 채용해온 관행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공기업이라고 공정했을까요? 서울교통공사는 여성 지원자들의 점수를 일부러 깎아서 면접에서 1등을 한 여성까지 여자란 여자는 싹 다 탈락시킨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성차별 채용을 조사한 것도 아니고 채용 청탁 비리를 수사하다 얻어걸린 것입니다. 은행, 방송국, 공기업이 이럴진대 나머지들은 어떻겠습니까?

남자라는 스펙이 없어서 노동의 자리를 가질 수 없는 사회. 차별을 받아들여야만 여성에게 비로소 자리를 주는 사회. 우리 사회가 과연 여성을 사람으로 조건 없는 환대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남성보다 훨씬 어렵게 일자리를 얻는다 해도. 여성은 노동의 자리에서 어떤 존재가 됩니까? 안희정 성폭력을 고발한 책 김지은입니다의 두 번째 장의 제목은 노동자 김지은입니다. 10개월짜리 단기 행정 인턴에서 시작해서 더 나은 자리를 얻기 위해 대학원을 가고 연구직, 계약직 공무원을 거쳐 왔던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여느 청년들처럼 애쓰면서 살아왔구나 싶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병환이 있는 아버지를 둔 실질적인 생계부양자이자 비정규직 노동자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가부장제 남성사회의 위력은 그를 노동자가 아니라 대상화된 여자로 대했고, 너나 할 것 없이 대놓고 외모 품평을 했으며, 최고 꼭대기인 안희정 지사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고 교육시켰습니다. “여자가 있으면 지사님이 부드러워진다면서 그게 네 역할이라는 얘기도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되는 그 안희정에게서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노동 인권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앞선다고 평가받았던 서울시장 박원순의 비서실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성에게 과연 조국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경찰, 의사, 변호사, 선생님, 목사, 연예인에서부터 아빠, 남동생, 아는 오빠, 애인까지. 몰카 범죄로 걸리지 않은 남성 집단이 없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공간인 화장실에서조차 불안해해야 하는 사회에서 도대체 여성이 인간으로 환대받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낙태를 죄로 취급하면서 자기 몸이라는 공간에서조차 자리를 얻지 못해왔습니다. 여성은 어떻게 해야만 인간의 자리를 갖게 될 수 있는 것인지. 마음 편히 거리를 다닐 권리, 화장실을 안전하게 이용할 권리, 누군가의 포르노가 되지 않을 권리, 자기 몸의 결정권을 가질 권리. 이런 권리를 위해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는 세상에 살아봤는지, 여성이 아닌 존재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코로나19를 통해 위기도 불평등하다는 것을 깨닫는 요즘입니다. 지난 9월 직장갑질119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가 유행 중인 지난 8개월간 실직을 경험했다는 응답은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7배 이상 많았습니다. 저임금노동자가 고임금 노동자 보다 9배 넘게 높았습니다. 그리고 여성이 남성보다 두 배 가량 높았습니다.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한 불안감과 우울감도 비정규직, 여성, 저임금 노동자일수록 높게 나타났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증가한 것 또 하나는 20대 여성의 자살률입니다. 1월부터 6월까지 여성 자살율이 10%대의 가파른 곡선을 그렸습니다. 불안정노동, 취약한 일자리, 돌봄노동의 과중과 불평등, 그리고 빈약한 사회적 지지기반이 원인으로 지적됩니다.

지금 여성들이 사회를 향해 외치는 것은 조건 없이 환대받을 권리, 인간의 자리에 대한 요구입니다. 이 목소리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50년 전 전태일처럼 누구나 환대받을 권리가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향린교회 여러분, 환대를 나중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전태일 사건 50주년을 추모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그 정신을 기려 목소리를 듣고 연대할 이들은 누구인지, 향기로운 이웃이 되기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유 속의 여성 / 마태복음 251-13] 김희헌 목사

오늘 마태복음의 내용은 열 처녀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로서, ‘깨어있음에 대한 가르침을 줍니다. 비유의 결론을 담은 13절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깨어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메시지를 구성하기 위해서 등장한 사람은 열 명의 이름 없는 여성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혼인예식을 위해 한밤중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늘뜻펴기의 제목인 여성과 노동이라는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의심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혼인 잔치의 주인공이어야 할 그들이 정작 비유 속에서는 이름도 없이 대상화되어 묘사됩니다. 아마도, 여기에는 필시 남성이었을 복음서 저자의 편견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한 여성 신학자(Nicola Slee)비유와 여성의 경험 (Parables and women’s experience)”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복음서에 있는 비유 속의 등장인물을 분석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모두 104개의 비유와 말씀이 있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85명입니다. 그 가운데, 남성은 73명이고, 여성은 12명입니다. 그 열두 명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 10명이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나요?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은 알려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서 기자는 깨어있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름도 없는 열 명의 젊은 여성을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이들을 두 편으로 나눈 다음, 한쪽을 가리켜 슬기롭다고 평가하고, 다른 쪽은 미련하다고 말합니다.

복음서 저자는 왜 이들이 자신의 혼인 잔치를 위해 밤에 잠도 자지 못한 채 기다려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또한, 어둠 속에서 계속 불을 밝혔던 다섯 명은 왜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되고, 자기 등불만을 켜기 위해 기름을 나누어주지 않은 야박한 사람들을 가리켜 슬기롭다고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남성 저자의 편견에 대해 눈감아주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한 10명의 여성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등장인물로 나왔지만,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자기 언어를 잃은 존재입니다. 만약, 그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아마도 이야기의 내용은 영 달라질 것입니다. 이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말하도록 했다면, 이 비유는 다른 가르침을 줄지도 모릅니다.

열 명의 이름 없는 여성들에 관한 비유, 이 이야기에서 분명한 점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노동을 하는 사람은 여성들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종말론적 메시지를 자기 몸으로 그려내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비유의 메시지를 구성하는 사람이요, 복음의 자료이자 요소입니다.

그들이 몸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깨어있음에 관한 것입니다. 성서는 깨어있어라하고 말하는데, 무엇이 깨어있는 상태일까요? 개인적 차원에서 깨어있음은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 세계를 왜곡되지 않게 인식하는 일입니다. 사회적 차원에서 깨어있음은 고통의 현실에 대해 눈뜨고 고통당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것입니다.

 

[추모와 기억 / 여호수아기 241-3a, 14-25]

전태일 열사는 우리 사회가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눈뜨고, 역사가 깨어나도록 생명을 바친 이입니다. 50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노동 현실에 깨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최근 전태일 열사 50주기 맞아 실시한 직장인 설문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근로기준법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응답한 직장인들이 40%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정규직은 35%, 비정규직은 48%) 현재 노동자들의 처우에 대한 질문에서, 5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나아지지 않았다고 답변한 사람은 정규직에서는 30%, 비정규직은 47%에 이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커다란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진전이 있었지만, 사각지대에 내몰린 노동 현실은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전체 사업장의 60%에 이르는 ‘5명 미만의 업체에서 일하는 350만 명의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220만 명의 특수고용노동자와 350만 명의 간접고용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어서 협상하는 권리를 갖지 못합니다. 하루 평균 7, 한해 2,400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 사고로 죽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친 전태일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하겠습니다.

최근 이른바 전태일 3법안 발의 운동이 전개되었고, 10만 명의 동의를 얻어 입법 청원이 완료되었습니다. 전태일 3법은 두 개의 법은 개정하고, 한 개의 법을 제정하는 것입니다. 근로기준법 제11조를 개정하여 모든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고, 노동조합법 제2조를 개정하여 모든 노동자가 노조를 설립하여 협상할 권리를 가지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여 보다 안전한 노동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기업의 책임을 다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반드시 국회에서 처리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사안입니다.

전태일에 대한 오늘의 추모는 그가 죽음으로써 사회에 던진 물음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여호수아가 고별설교에서 외친 목소리에 비견됩니다. “당신들은 이제 주님을 경외하면서, 그를 성실하고 진실하게 섬기십시오.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24:14-15)

야훼를 섬길 것이냐, 가나안의 풍요의 신을 섬길 것이냐?’를 묻는 성서의 선택은 계속 되는 물음입니다. 우리 사회는 그 물음을 전태일을 통해서 처음 들었고,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을 통해서 듣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질문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당신들은 야훼를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19) 여호수아의 이 말은 마치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한 질책 같습니다.

 

[죽은 이의 부활 / 데살로니카전서 413-18]

때 이른 죽음은 분명 비극입니다. 전태일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쓰라린 비극입니다. 하지만, 그 비극의 씨앗이 희망을 낳기도 합니다. 전태일의 인간 선언은 민중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신학적인 무엇이 있습니다. 안병무는 전태일 사건을 가리켜 예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민중의 자기 초월 사건이요, 세상을 거듭나게 하고, 교회를 일깨우는 사건이었습니다. 대학생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전태일의 소원은, 많은 교회에 야학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고, 머잖아 민중신학과 민중교회가 등장했습니다. 전태일이 그렇게 되살아난 것입니다. 전태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비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것은 죽은 이들의 부활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데살로니카전서 본문이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잠든 사람의 문제를 모르고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소망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잠든사람이란 죽은사람을 의미하는데, 죽음은 두 가지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이 다하여 죽게 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죽은 경우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생명을 위해서 죽은 경우입니다. 그것이 본문이 말하는 예수 안에서 살다가 죽은경우를 말합니다. (15)

바로 이들이 예수와 함께 되살아난다는 것이 성서의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다시 오심), 헬라어로 파루시아(parousia, 15)는 우주적 종말에 관한 드라마가 아니라, 생명을 위해 뿌려진 역사의 씨앗은 반드시 하나님이 거두신다는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희망의 문제입니다.

전태일이 죽고 세워진 첫 번째 묘비에는 십자가와 함께, ‘기독 청년 전태일이라는 글씨가 새겨졌습니다. 그러나 전태일과 그의 가족이 다녔던 교회는 그의 죽음을 모욕했습니다. ‘자살은 교리에 위배되는 불신자의 짓이라고 비난했고, 전태일이 죽어서 빨갱이들이 춤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역사의 참된 희망을 잃은 종교의 단면입니다.

다행히 신·구교가 함께 추모식을 열었습니다. 거기서 추모사를 한 김재준 목사의 글을 짧게 읽으며, 하늘뜻펴기를 마칩니다.

오늘 우리는 자기 주변에서 같이 일하는 직장 동료들의 비참을 조금이라도 경감시키려고 온갖 힘을 다하다가 기진맥진 벽에 부딛혀, 젊은 자기 몸을 횃불 삼아 이 사회의 숨은 암흑을 고발한 고 전태일 님의 번제단 앞에 섰습니다.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말할 염치가 없습니다. 인간의 피를 짜내어 내 물건을 만들고, 그 물건으로 내 탐욕을 채우고, 그 탐욕으로 인간성을 썩혀서 내 권력에 거름이 되게 하는 악령들에게 아니다!’ 소리 한 번 쳐보지 못한 교회인으로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참회가 있을 뿐입니다. 전태일 님은 젊은 생명을 제물 삼아 예수님 말씀대로 의를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산 자로서 그의 죽음을 예찬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극진히 사랑하던 근로대중의 비참이 경감되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 포로된 자에게 해방, 눌린 자에게 자유와 평등이 선포되고 성취되게 하기 위한 다짐입니다. ([장공전집] 9, 329-31, “의의 봉화: 전태일님을 추도하며,” 197011)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오래전 광야에서 외친 여호수아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해방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풍요에 취해 살 것인가! 노동자들의 죽음을 통해 계속되는 이 물음 앞에서, 믿음으로 응답하고, 해방과 평등을 꿈을 간직하고 나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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