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하늘뜻펴기

비결 | 김희헌 | 2020-10-11

by 김희헌 posted Oct 11, 2020 Views 138 Replies 0
Extra Form
날짜 2020-10-11

비결 (32:1-14, 4:1-9, 22:1-14)

2020.10.11. 창조절 여섯 번째 주일

 

지난 수요일은 홍근수 목사님의 7주기였습니다. 평통사 관계자들과 함께 마석 모란공원에서 참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맑은 가을날의 신선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홍 목사님이 한국에서 목회를 시작하시던 때에는 전 사회적으로 진보 운동이 봇물 터지는 듯한 역동적인 시대였습니다. 분단의 장벽이 높았지만,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통일의 열망 또한 대단히 높았습니다. 그 후 삼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 사회에는 민주주의의 진척과 경제성장 등의 비약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실질적인 변화 없이 답보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2년 전만 하더라도 남북 정상이 회담을 거듭하면서 화해의 분위기가 달아올랐습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인 이해관계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 느낌입니다. 분단국가의 근본문제가 쉽게 해결될 리 없겠지만,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제도나 구조를 바꾸는 것 못지않게, 우리들의 마음과 영혼이 시원해지고 단단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갈수록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과거에는 정치제도 자체가 폭압적이었기 때문에, 삶의 변화를 얻는 방식이 비교적 단순해 보였습니다. 정권을 교체하고 제도를 보완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체제의 폭력이 잘게 부서져서 일상으로 스며들면서,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졌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제도적 억압과 차별은 삶 속으로 내면화되면서 오히려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는 시들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마치 우상이 내면을 지배하는 듯한 현실입니다. 이런 시절을 견딜 수 있는 비결이 있을까요? 창조절의 시원한 바람이 우리 마음을 씻어주시기를 바라며, 하늘의 은총을 구할 뿐입니다.

 

[우상의 시대 / 출애굽기 321-14]

출애굽기 32장 본문은 너무도 빨리 찾아온 우상의 시대를 보여줍니다. 이집트 제국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민족은 광야에서 새로운 삶을 지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 시내산 계약입니다. 모세는 새 시대를 살아갈 율법과 계명을 얻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가 사십 일을 머물렀습니다. (24:18) 그런데 모세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초조해진 사람들은 아론을 찾아가서 요구합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이들의 요청은 간교하기보다는 어리석습니다. 그들의 요청에 순박하게 응답하는 아론 역시 교활한 흔적이 없습니다. 아론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금붙이를 모아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말하지요.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낸 너희의 신이다.”

이렇게 순진한 마음에서 우상이 제조되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단촐한 과정에서 우상이 만들어질 조건은 모두 갖춰졌습니다. 우상이란 자신의 위안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어낸 신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은 주님의 절기를 지키자며, 아침 일찍부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다음에 먹고 마시다가, 마침내는 일어나서 뛰놉니다. 성서는 이런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웃고, 조롱하다’(laugh/mock)는 뜻의 단어(tsachaq)를 사용합니다. 누구를 조롱했다는 것일까요?

이 모습을 지켜본 야훼는 화가 나서 모세에게 말합니다. “나는 이 백성을 살펴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이런 야훼의 반응은 정당한 신의 분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우상의 시대를 통과할 때에는 신마저도 제정신을 갖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신은 자기 분노에 휩싸여 심판의 신으로 돌격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누가 생명을 파괴하는 우상인지, 누가 목숨이 위태로운 가련한 생명인지를 알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우상의 시대가 완성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금송아지라는 형상이 절을 받는 유치한 시대를 넘어서,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할 신마저도 무너진 절망의 시대가 확연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때 모세의 과제는 분명해졌습니다. 신의 뜻을 돌이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신을 돌이켜 세우는 불가능한 과제를 풀어갈 모세의 비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진노를 거두도록 간청하는 것이요 (12), 다른 하나는 약속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13). 그렇게 하여, 모세는 성공을 거둡니다. 신마저도 돌려세웠으니, 인간을 다시 세우는 비결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후의 보루가 무너진 우상의 시대라 할지라도, 분노를 거두고 너그러워진다면, 멀어진 약속을 다시 붙들 수 있다면, 아직 희망은 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을 잃은 하나님 나라 / 마태복음 221-14]

마태복음의 본문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과 논쟁을 할 때 들려준 세 개의 비유 가운데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혼인 잔치에 관한 마태의 비유는 일반적인 잔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비유는 지난주에 본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보다 더 과장된 설정을 하고 있는데,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이야기의 배경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비유가 누가복음 14장에도 나오는데, 누가복음은 마태와는 다른 배경을 설정했습니다. 누가복음의 비유는 예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바리새인에게 들려준 것입니다. 따라서, 비유의 결론은 초대받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외면당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잔치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에서도 그 점은 언급되지만, 또 다른 강조가 눈에 띕니다. 그것은 잔치 자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적대적인 태도와 파국적인 관계에 관한 묘사를 통해서, 마태가 심판의 의미를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느라고 초대에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6절과 7절은 보면, 초대의 말을 전하러 온 사람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자 왕은 이에 대응하여, 군대를 보내서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도시를 불살랐다고 묘사합니다.

역사와 대비시켜 본다면, 이런 피비린내 나는 묘사는 주후 70년 대로마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된 예루살렘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묘사는 비극적인 역사에 대한 상징적 서술을 넘어서, 고유한 메시지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성전종교의 지도자들에 비판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 자체가 길을 잃어버린 시대의 비극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길을 잃은 적대적인 세계가 얼마나 심각한 파국으로 손쉽게 변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하나님 나라 역시도 위태로운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준비된 잔치의 주인공은 새로운 사람들입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 누구든지, 악인이든 선인이든 가리지 않고 초대되어 자리는 채워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누구든지 초대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불편한 일일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불편함은 초대교회가 여러 집단으로 구성된 혼성적 성격을 띤 것에 대한 마태복음의 불편한 감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Douglas R. A. Hare, Matthew, 252)

그래서 누가복음처럼 길거리에서 사람을 초대하여 자리를 채우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 대한 처벌에 관한 내용이 첨부됩니다. 이야기의 전개로 보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 대한 주인의 처분은 이해되지 않은 측면이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되어 미처 복장 규정(dress code)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묶어서 내던지라고 명령한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완전한 해석은 어렵지만, 이해를 위해서는 이 비유가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알레고리를 사용한 은유적인 이야기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잔치는 다가오는 나라에 관한 은유이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예복은 의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성서에서 결혼 예복이 상징하는 것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를 가리킵니다. (19:8)

그렇다면 14절에 나온 짧은 경구는 우리에게 민감한 자세를 요구하는 말씀이 분명합니다. “부름받은 사람은 많으나, 뽑힌 사람은 적다.적대적인 세계에서는 하나님 나라마저도 길을 잃게 되며,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라 할지라도 그 나라를 위해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면 들어갈 수는 없다는 뼈아픈 진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비결 / 빌립보서 41-9]

빌립보서는 감옥에 갇힌 바울이 사랑과 염려의 마음으로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갈등으로 시들어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절을 보면, 두 명의 여성 지도자 이름이 나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입니다. 이들은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오디아(Εοδίαν)라는 이름은 좋은 길’(good way)이라는 의미이고, 순두게(Συντύχην)행복한 사건’(happy event)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좋은 길로 알고 걸었던 삶도 행복한 사건을 위해 헌신한 삶도 때로는 서로를 해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공동체를 향해서도 함께 힘을 합해서 이들을 도와주라고 부탁합니다. 3절에는 함께’(syn-, together)라고 하는 접두사가 네 번이나 사용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나의 진정한 동지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본래 멍에를 함께 멘 사람’(σύζυγε, yoke-fellow)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두 지도자를 도와달라’(συλλαμβάνου, help together)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동역자들’(συνεργν, fellow workers)과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애쓴’(συνήθλησάν, labored together) 사람들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 준 풍성한 삶의 비결은 세 가지입니다. 기쁨과 관용과 감사입니다. 바울은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빌립보서 전체에 퍼져 있는 말 가운데 하나는 기뻐하라’(Χαίρετε, rejoice)는 말입니다. 5절은 관용의 삶을, 6절은 감사의 기도를 말합니다. 풍성한 삶을 위해 바울이 전하는 비결은 기쁨과 관용과 감사입니다. 그것이면 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다음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7절에서 바울은,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가 가진 믿음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은총의 세계에 내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의 이해 너머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삶의 비결과 믿음의 비결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기쁨과 관용과 감사에 기초한 삶과 우리의 헤아림 너머에서 도래하는 평화에 대한 믿음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삶에 집착하면 믿음을 잃어버리고, 삶에 초연하면 믿음에 갇혀버립니다. 기쁨과 감사를 잃지 않고 살아가되, 또한 우리의 계획 너머에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평화를 향해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성서 묵상을 통해서, 삶이 질곡으로 빠지는 시대에 대한 경고를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마저도 길을 잃은 우상의 시대를 견뎌낼 비결을 묻게 됩니다. 왜냐하면, 온 세계가 맞고 있는 이 긴 코로나의 시대가 암담함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날 가꿔온 문명이 우상이 되어 삶을 위기에 빠뜨리는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위태로울 때이지만, 또한 한계에 봉착한 삶이 새롭게 재배치되는 창조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신앙공동체를 향해 들려주는 마지막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ἀληθῆ, true)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σεμνά, venerable)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δίκαια, right)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ἁγνά, pure)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προσφιλῆ, lovely)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εφημα, admirable)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4:8-9)

위태로운 시대를 견디며, 새로운 삶을 지어가는 여정에 창조절의 은총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하나님 나라마저도 길을 잃은 것 같은 암담한 시대에 우리는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비결을 묻습니다. 바울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삶의 비결과 믿음의 비결을 전합니다. 기쁨과 감사로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워갑시다. 하나님의 평화를 향해 온 마음을 열고 살아갑시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제목
2024-03-24 두렵지만 한 걸음 내딛을 때 ㅣ 유연희 ㅣ2024-03-24
2024-03-17 밀알 하나 ㅣ 김지목 ㅣ 2024-03-17
2024-03-10 우리의 새날 | 유영상 | 2024-03-10 file
2024-03-03 십자가라는 증거 ㅣ 황푸하 ㅣ 2024-03-03
2024-02-25 3.1운동과 한국 교회 ㅣ 이만열 ㅣ 2024-02-25
2024-02-18 죽는 것과 사는 것 ㅣ 김지목 ㅣ 2024-02-18
2024-02-11 체현의 영성 ㅣ 김지목 ㅣ 2024-02-11
2024-02-04 지켜보기: 감시인가, 관심인가? ㅣ 이서영 ㅣ 2024-02-04
2024-01-28 자유와 절제 ㅣ 최필수 ㅣ 2024-01-28
2024-01-21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 평화 선교 공동체 ㅣ 이숙진 ㅣ 2024-01-21
2024-01-14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ㅣ 김도현 ㅣ 2024-01-14
2024-01-07 거룩한 혁명의 시작 ㅣ 김지목 ㅣ 2024-01-07
2023-12-31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ㅣ 이동환 ㅣ 2023-12-31
2023-12-25 포대기에 싸여 구유의 누인 갓난아기 ㅣ 김지목 ㅣ 2023-12-25
2023-12-24 어둠속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 ㅣ 홍주민 ㅣ 2023-12-24
2023-12-17 다시, 기다림 ㅣ 송진순 ㅣ 2023-12-17
2023-12-10 광야를 희망하는 공동체 | 박정범 | 2023-12-10
2023-12-03 기다리는 사람들 ㅣ 김지목 ㅣ 2023-12-03
2023-11-26 공중을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처럼 l 박희규 ㅣ 2023-11-26
2023-11-19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ㅣ 김지목 ㅣ 2023-11-19
2023-11-05 “문자가 소리지르리라!” | 곽건용 |2023-11-05
2023-10-29 “허물어라 세우리라” | 이덕주 | 2023-10-29
2023-10-22 영광을 가리는 세상, 영광을 가로지르는 우리 | 유영상 | 2023-10-22 file
2023-10-15 안단테 소스테누토 ㅣ 피경원 ㅣ 2023-10-15
2023-10-08 홍근수, 통일의 사도 민족의 목회자 | 김경호 | 2023-10-08
2023-10-01 인류세 시대의 복음 ㅣ 윤상혁 ㅣ 2023-10-01
2023-09-24 첫째였던 꼴찌 ㅣ 김지목 ㅣ 2023-09-24
2023-09-17 불확실성의 바다 ㅣ 김정현 ㅣ 2023-09-17
2023-09-10 위기를 가로질러 ㅣ 서형식 ㅣ 2023-09-10 file
2023-09-03 생명을 나눈 사랑 ㅣ 김지목 ㅣ 2023-09-03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Next
/ 1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