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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머릿돌 | 김희헌 | 2020-10-04

by 김희헌 posted Oct 04, 2020 Views 25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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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10-04

머릿돌 (20:1-20, 3:4b-14, 21:33-46)

2020.10.04. 창조절 다섯 번째 주일

 

[생태적 주체]

이번 추석은 이동이 많지 않은 명절이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일가친척을 찾는 것도 유보하고, 가족들과 조촐한 시간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고통스러운 시간이지만, 가을은 성큼 다가온 느낌입니다. 하늘은 푸르고, 자연은 결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아름다워지고, 믿음도 풍요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코로나의 시대에 느껴지는 고통은 양면적인 모습을 띠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각성시키는 계기가 있는 한편, 서로에 대한 믿음을 절망으로 빠뜨리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통이 길어질수록 정신적 피로감이 커지면서, 마음은 고달픈 상념으로 우거진 잡초밭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창조절에 간절히 비옵는 것은, 우리 마음과 우리 신앙공동체의 삶에 두터운 믿음과 따뜻한 사랑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파편화된 세계를 치유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이 자라나는 하늘의 은총을 바랍니다.

우리 공동체가 안고 있는 현실적인 과제는 광화문 시대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첫 삽이 떠졌으니 이미 많이 진행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교회 신축에 관한 결정이 있고 나서, 홍창의 장로님께 새로운 건물의 머릿돌에 새길 글씨를 부탁드렸습니다. 장로님께서는 당신이 살아오신 백 년의 믿음을 부어서 정성껏 써주셨습니다. 다른 일도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교회의 머릿돌을 계획된 시간에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교회는 본래 물리적 건축물보다 정신의 건물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그 머릿돌에 어떤 믿음을 담을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이 점 역시 그동안 논의해왔으니, 앞으로 의견을 모아가며 방향을 정립해갈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가 고민하는 내용을 잠시 털어놓자면, 그것은 앞으로 요구되는 진보적 기독교 신앙의 모습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에는, 기독교 신앙과 관련된 진보라고 하는 말에는 동상이몽의 해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화의 문제가 있지만, 편의상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진보적 기독교를 지향하는 주체의 성격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근대적 주체와 탈근대적 주체, 그리고 생태적 주체라고 이름을 지어봤는데, 이런 구분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코로나 이후 시대에 진보의 역할을 생태적 주체가 이끌어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먼저, 근대적 주체란 과학적 이성으로 낡은 세계를 변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에게 역사의 진보는 피억압자의 체제전복적인 저항투쟁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었습니다. 변혁적 투쟁성을 갖추지 못한 종교는 민중의 아편으로 여겨졌고, 저항철학은 무신론의 모습을 띠었습니다. 하지만, 저항과 투쟁이 어떤 당위성에 의존할수록 자기 성찰적인 모습은 약해졌고, 진보를 추구하는 정신에는 폭력성이 잠복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경험이 쌓일수록, 하나의 억압적 질서를 파괴한다고 하여 반드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교훈을 얻기도 합니다. 대체로 종교 자체가 보수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종교가 진보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종교성을 탈피해야 한다는 자기 분열적인 경향을 띠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탈근대적 주체가 추구한 진보는 억압적 체제를 전복하기보다는 체제 자체로부터 탈주하는 전략을 가졌습니다. 저항을 위한 연대가 가능했지만, 그것은 당위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각자의 판단과 취향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탈근대적 환경에서,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은 꼰대로 취급되었고, 진리 주장마저도 꼰대라는 혐의를 쓰지 않기 위해 자기 체중을 감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취향에 근거한 진리 주장은 자기 편향에서 벗어나기 힘들었고,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주체를 탈근대적 진리는 교화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가짜뉴스를 믿고 즐기는 일마저도 마치 자신의 취향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을 때, 미래에 거는 낙관적 희망도 하찮은 것이 되었습니다. 종교 역시 취향에 따라 선택되는 상품처럼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세계는 근대적 주체나 탈근대적 주체가 아니라 생태적 주체에 의해서 이뤄지기를 기대합니다. 생태적 주체란 자기중심적 삶보다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때로는 저항을 하고, 때로는 연대를 하되, 그 동력을 성찰과 수행을 통해 구성하는 주체입니다. 이런 생태적 주체를 위해 종교는 두 가지 기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먼저, 종교는 삶의 다양한 관심이 파편화되어 분열하지 않도록 묶어주는 힘으로서 작동할 것입니다. 또한, 종교는 주체가 가진 욕망과 취향에 순응하기보다는 그것을 성찰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수행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눈 구분과 설명이 낯선 것은 아닙니다. 이미 여러 분야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주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우리 교회의 머릿돌은 생태적 주체가 세워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머릿돌의 조건 / 마태복음 2133-46]

마태복음 본문의 비유는 논쟁적인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미래의 일꾼이 누구냐 하는 문제, 하나님 나라 운동을 감당할 주체에 관한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첫날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정화하고, 둘째 날에는 성전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나타나 문제를 제기합니다. 산헤드린 의원으로서 권세를 누리던 그들은 예수에게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23)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것이 오늘 본문의 비유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정성껏 만든 다음,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멀리 떠났습니다. 추수철이 되자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는데, 농부들은 잔인하게 대했습니다.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또 하나는 돌로 쳤습니다. 이해관계로 뭉친 빗나간 동류의식이 빚어낸 악행이었습니다. 더 많은 종을 보냈을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자기 아들은 존중해 줄 것으로 생각하고 보냈지만, 농부들은 그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아들만 죽이면 자신들이 포도원을 독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실행에 옮깁니다.

예수께서는 이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 묻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돌아올 때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대답은 예상된 것입니다. 악한 자들을 죽이고 소출을 제대로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누구를 상징하는지는 비교적 분명합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요, 농부들은 산헤드린 의원이며, 죽임당한 종은 예언자를, 아들은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 이야기는 두 차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선의를 가진 주인의 기대를 저버린 악독한 농부들의 모습, 그들의 욕망이 빚어낸 파괴적인 결말을 보게 됩니다. 이야기의 밖에서 보면, 이 비유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을 향한 격렬한 비판이 됩니다. 이제까지는 그들이 사회를 이끌어 왔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런 직접적인 비판이 43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이런 비판의 시적인 표현이 42절 말씀, ‘집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머릿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몰고 오는 일꾼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머릿돌은 건물을 떠받치는 주춧돌은 아니지만, 건물 고유의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합니다. 한 사회의 머릿돌은 체제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시대의 아픔과 요청에 부응하면서도 시류에는 물들지 않는 생명의 고유성을 지키는 것, 절망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삶의 진정성을 지켜가는 것이 머릿돌입니다.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되는 일은 놀라운 일이지만, 본문은 그것이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십계명의 영성 / 출애굽기 201-4, 7-9, 12-20]

출애굽기 20장은 십계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이야기가 출애굽기 19장부터 민수기 10장까지 총 59장에 걸쳐서 길게 기록되어 있는데, 십계명은 그 계약 사건의 처음에 나오는 대표적인 계명입니다.

성서의 율법을 압축적으로 대변하는 십계명은 이집트 제국에서 억압받던 경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전문(preamble)에 해당하는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172개의 낱말로 구성된 십계명은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난 자유민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지켜야 할 열 가지 항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십계명은 한 번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발전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 네 계명은 종교적 규범이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사회적 규범입니다. 여섯 개의 사회적 규범은 모세 시대보다 앞선 다른 지역의 법전에도 비슷하게 나오는 항목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십계명의 고유한 특징은 처음 네 가지 종교적 계명에 담겨 있다고 도 하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룬 처음 네 계명은 종교적 믿음에 필요한 기본지침을 제시합니다. 1)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2) 너희는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못한다. 3) 너희는 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해서는 안 된다.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이것은 지켜야 하는 율법적인 규범일 뿐만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로 놓는데 필요한 근본지침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단지 지키지 않을 경우에 처벌을 당할 것이라는 강압적인 면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다짐과 신뢰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다짐과 신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만, 또한 자기 자신을 지켜가는 성찰과 수행을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할 수 있도록 이끕니다.

성찰과 수행이 없는 종교는 숭상하는 믿음이 도리어 삶을 잡아먹는 야만으로 흐릅니다. 신을 안다고 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며, 신의 은총을 찬양하는 그 삶은 무례하고 폭력적입니다. 종교적 영성이 자기 자신을 깨뜨리는 것이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강화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믿는 신은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욕망을 채워주는 존재입니다. 이때 종교는 자기애(自己愛)로 가득 찬 에고(ego)를 만족하게 하거나 알량한 위로를 베푸는 일에 관심합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근본적으로 돌이키도록 이끕니다. 자기 욕망을 우상으로 섬겨서는 안 되며, 자기 우상을 하나님으로 높여서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십계명이 요구하는 영성은 자신을 강화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더 배우는 ‘learning’이 아니라, 자신에게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는 ‘unlearning’이라고 하겠습니다. 진정한 영성은 자신을 강화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깨뜨리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래야 자신이 이미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비로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달음질 / 빌립보서 34b-14]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가진 세속적인 자랑 여섯 가지를 열거합니다. 육신에 신뢰를 둘 만한 것으로 치자면 자신에게 많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향한 그의 믿음은 세속적인 자랑거리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향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3:7-8)

바울의 이 고백은 종교적 맹목이 아니라, 변혁적 영성의 본질적인 특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믿음은 자신의 의로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는 의를 얻고자 자신을 비우는 ‘unlearning’입니다. 그런 믿음에 담긴 짙은 갈망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9-10)

바울은 이 믿음의 목표가 모두 이뤄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부르심’(calling, klesis)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고, 그것을 향해 달려갈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신앙은 본성상 완결된 구조를 갖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 성공과 성취가 목표라면 그걸 이루는 순간 완결되었다 하겠는데, 십자가의 길은 이전에 이룬 성취를 모두 걸어야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그 삶에는 위험과 모험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모험이 새로운 시대의 집을 지을 때 필요한 머릿돌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그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그 길을 걷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위태롭고 불안한 마음이 우리의 믿음을 흔듭니다. 마치 이번 추석 명절에 테스형이라는 제목의 신곡을 발표한 나훈아 님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상상력 넘치게도 이분은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가리켜서 테스형이라고 부르며 노래하는데, 이십 대들까지 웃게 만든 그 노래의 가사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더군요.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테스형은 아니지만, 이 문제에 대해 의미 있는 답을 해주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면서 오늘 하늘뜻펴기를 마치겠습니다.

평생을 수도자로 살겠다고 생각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도원장에게 종신서원을 고백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더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낙심하던 중에 수도원에서 지혜롭다고 하는 한 신부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살아온 삶과 고민의 모든 것을 얘기했습니다. 참된 수도원을 찾아 나선 것도, 종신서원을 했지만 거절된 것에 대해도 얘기했습니다.

이야기를 마쳤을 때, 신부가 묻습니다. “질문이 하나 있네. 자네는 누구인가?” 젊은이는 방금 말했는데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라네. 자네가 지금 말한 것은 자네가 입고 있는 옷에 관한 것이지. 자네는 나에게 자네의 이름을 말했고, 자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무슨 공부를 했는지 말했을 뿐이네. 자네의 문제가 뭔지 아나? 자네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네. 자네가 누구인지 내가 말해볼까? 자네는 빛이신 하나님의 한 줄기 광선일세.”

그러자 젊은이는 속으로 우스운 사람이군하고 생각하면서도, 호기심에 무슨 뜻인지를 묻습니다.

신부는 이어서 말합니다. “자네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말하지. 하지만 한 줄기 빛은 태양을 찾지 않는 법일세. 그것은 태양에서 저절로 나오는 거니까. 자네는 또한 포도나무이신 하나님의 가지네. 가지는 포도나무를 찾지 않는 법이지. 가지는 이미 포도나무의 일부니까. 파도는 바다를 찾지 않는 법이지. 이미 그것은 바다로 가득 차 있으니까. 자네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자네는 자네에게 붙여진 모든 이름을 믿는 것일세. 그 이름도 나름 목적은 있네. 하지만 그것들이 자네의 진짜 모습은 아니네. (마틴 레어드, 침묵수업, 202-3)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하나님께서는 버려진 돌을 사용하여 머릿돌로 만드십니다. 믿음의 머릿돌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에서 지어집니다. 육신의 자랑을 벗고,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십시오. 창조절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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