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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 김희헌 | 2020-07-26

by 김희헌 posted Jul 26, 2020 Views 8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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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07-26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창 29:15-28, 롬 8:26-39, 마 13:31-33, 44-52)

2020.07.26. 성령강림절 아홉째 주일

 

‘코로나 블루’라는 말을 최근에 많이 접하게 됩니다. 코로나 시대가 길어지면서 심리적 침체를 겪는 것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 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의 절반 가까이(47.5%)가 불안과 우울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익숙했던 가치관이 작동 불능에 빠지면서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의학적으로 보면 고통은 치료를 받아야 할 대상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고통이란 우리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인간의 영혼은 매우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고통을 느끼는 증상은 단지 외부적인 억압에 대한 수동적인 반응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고통의 증상이란 ‘영혼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삶이 무시되거나 경시될 때, 우리는 아픔을 느낍니다. 그 아픔의 증상이 의미하는 것은 일종의 경고입니다. 자신이 갈망하는 삶을 언제까지 미룰 것이냐 하는 메시지요, 더 이상의 학대는 참지 않겠다고 각성한 정신의 알람 기능이라라 하겠습니다. (존 니프시, 신성한 목소리가 부른다, 147)

예를 들어, ‘공허함’과 ‘무의미함’을 느끼는 것은 현재 삶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라는 영혼의 권고일 수 있습니다. ‘우울증’은 외부 일에 초조하게 열중해서 자신의 참모습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우울증은 더 진실하고 만족스럽게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라는 영혼의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정신의 고통을 느낄 때,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 깊이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코로나 시대가 길어지면서 교우들이 없는 교회에서 혼자 묻곤 합니다. 코로나 이후의 시대에 기독교 종교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물음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어떤 말과 행위를 해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영적인 불안과 종교적 갈망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에게, 코로나 이후 시대의 기독교 신앙은 과거와는 달라질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생각과 행위’를 하느냐는 것보다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를 더욱 진지하게 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삶의 여정에서 지어가며, 혼자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는 길을 다시 찾아갈 것입니다. 

 

[삶, 만남과 관계 속의 리듬 / 창세기 29장 15-28절]

제1성서의 본문에서 우리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은 ‘삶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삶이란 도대체 뭘까요? 그저 주어진 것이기에 사는 것뿐인가요, 아니면 무언가 반드시 살아내야 하는 생(生)의 명령이 있는 것인가요? 우리 대부분은 지루한 반복 속에서 진실의 단서를 조금씩 찾으면서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관계의 만족과 실패를 오가며 기뻐하고 슬퍼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9장부터 31장까지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머물면서 자기 삶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고대 이스라엘의 여러 민담을 어떤 작가가 재미있게 재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이야기는 심각한 교훈보다는 조상의 삶에 관한 코믹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역사비평의 날카로운 칼보다는 서사비평의 종합적인 안목을 갖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 가족을 이루고 재산을 모아간 이야기를 다룬 29~31장에는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28장은 꿈에서 하나님을 만난 베델 이야기를 다루고, 32장은 밤새 하나님과 씨름한 브니엘 이야기를 하면서,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신학적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운데 있는 29장부터 석 장에는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는 세계의 모습이 유머러스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야곱의 전체적인 삶의 여정은 권모술수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는 복잡한 인물입니다. 문제를 유발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이 있기 전, 형을 속이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은, 형의 분노를 피해서 어머니의 고향으로 도망쳤습니다. 외삼촌 라반은 야곱을 환대하며 맞았고, 야곱은 거기서 안전하게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면서, 외삼촌이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의 조카이지만, 내 일을 거저 할 수는 없으니, 어떤 보수를 주면 좋을지 의견을 다오.’ 야곱은 삼촌의 두 딸 가운데 둘째인 라헬과 결혼할 수 있게 해주면 7년간 일을 해드리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7년을 불과 며칠처럼 여기면서 기꺼이 보내고, 마침내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아침에 눈을 떠보니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가 아닌가! 외삼촌은 풍습대로 언니 먼저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둘째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서는 다시 7년의 노동을 요구합니다. 천하의 사기꾼 야곱이 외삼촌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집념의 사람 야곱은 아내를 위한 14년간만이 아니라, 총 20년을 그곳에 살면서, 12명의 자녀와 거대한 부를 이루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이번에는 야곱이 장인이자 삼촌인 라반의 뒤통수를 치는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야기 속의 삶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비록 삼촌의 속임수로 인해 레아와 혼인하게 되었지만, 훗날 레아의 자손을 통해서 모세(레위의 후손)와 다윗(유다의 후손)이 등장했으니, 삶은 어쩌면 역설이요, 하나님의 섭리는 그다지 매끄럽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야곱을 둘러싼 사람들의 삶의 관계방식이 보여주는 여러 모습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만이 아니라 모두가 경험하는 것이고, 따라서 야곱의 이야기는 남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 됩니다. 야곱과 라반의 관계, 야곱과 레아, 레아와 라헬, 라헬과 야곱의 관계 등은 복잡하게 보이지만, 그것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관계의 세 가지 방식이기도 합니다. 1) 모든 것을 말해도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자기집착의 관계, 2) 모든 것을 말해야만 비로소 서로 알아듣게 되는 거래의 관계, 3) 서로를 알기 위해 모든 것을 말할 필요가 없는 친밀하고 신비로운 관계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방식의 삶의 관계는 야곱의 삶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고통과 무상함과 실패와 비애가 늘 있고, 또한 놀라움과 감동을 주는 더 큰 무엇이 존재합니다. 만일, 사람들의 관계가 첫 번째 방식으로만 이루어졌다면 얼마나 힘들까요? 하지만, 세 번째 방식의 삶의 관계에서, 우리는 반복되는 실망과 실패 속에서도 용기와 사랑, 친절과 정의에 관한 믿음을 얻게 됩니다. 

신앙의 관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성도의 만남, 그리고 자신과 하나님과 만남도 관계방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말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거나, 하나님이 계속 말씀하시는데도 내가 알아먹지 못하고 자기 길만 가는 것은 초보적 신앙입니다. 서로 알고 있음을 표현하고 확인하며, 더 나아가 서로에 대한 표현이 없어도 알 수 있는 신비로운 관계가 우리 삶을 약동하게 만듭니다. 

초보적인 관계에서 신비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것에서 필요한 것은 ‘말’이라기보다는 ‘믿음’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아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말을 쏟아놓아도 하나님을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얻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한다 하여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 알지 못하지만,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믿음인데, 그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많은 고통을 당하며, 또한 많은 위로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노래 / 로마서 8장 26-39절]

서신서의 본문 로마서 8장은 5장부터 바울이 말해 온 주제에 관한 결론입니다. 그 주제는 ‘우리 삶의 고통과 희망’이 가진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 해답을 믿음의 확신에서 찾습니다. 31절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이런 확신이 35절에 더 확장되어 표현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바울이 여기서 표현하는 믿음의 확신은 개인의 심리적 경향이라기보다는 종말론적인 직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성서가 일구어온 심원한 지혜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8장의 마지막 두 절에 표현되었다고 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롬 8:38-39)

바울의 이런 확신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어떤 삶의 경험이 있어야지 그런 확신에 이를 수 있을까요? 그것에 대한 열쇠는 28절에 관한 해석에 있다고 봅니다. 성서연구자들은 로마서 8장 28절에 대한 해석을 곤란하게 느낍니다. 왜냐하면, 성서 사본들이 서로 달라서 최초의 원문을 구성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크게 보면 두 가지의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수의 사본이 뒷받침하는 방식의 해석인데, 가장 오래된 영어성경 KJV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번역이 따르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읽은 <새번역>도 같은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We know that all things work together for good to those who love God, who are th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이런 해석은 ‘하나님이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것을 합력하도록 하는 능력을 하나님이 갖고 있다’는 신학적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방식의 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수의 사본은 아니지만, 바울서신에 관해서는 가장 원본에 가깝다고 여기는 사본(파피루스 46번)에 근거한 해석입니다. 영어 성경 가운데 <개정표준판/RSV, 1946년>이 그렇게 번역했는데, 그걸 한글로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곧 당신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 모든 것 속에서 선을 위해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We know that in everything God works for good with those who love him, who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널리 알려진 첫 번째 해석은 ‘반드시 좋은 것이 있을 것이라는 보증’을 강조하지만, 두 번째 해석은 ‘모든 것에서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이런 해석은 ‘하나님의 능력(omnipotence)’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faithfulness)’을 신학적으로 더 중요하게 본 것입니다.

어떤 해석이 옳다고 생각하세요? 관계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첫 번째가 초보적인 해석이고, 두 번째가 심원한 해석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보수적인 신앙일수록 첫 번째 해석을 선호하고, 진보적인 신앙일수록 두 번째 해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의 상황과 형편은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해석이 항상 옳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신앙의 정진을 위해서 깨어있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믿음의 확신에 이르기 위해서,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고,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의 동행이 필요합니다.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은 간절한 법이며, 번민하는 사람에게 신실한 하나님의 동행만이 해답이 될 것입니다. 

종교가 취약해질수록 힘의 복음에 도취하여 이기적인 신도들과 욕망의 종교를 낳지만, 반대로 종교가 거만해질수록 신앙의 결속을 잃고 그리스도에 대한 집중이 없는 자기 취향의 종교로 흘러갑니다. 따라서, 종교에서는 진보와 보수라는 프레임보다, 관계방식의 깊이를 묻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자비가 질서를 이룬 세계요, 믿음이란 하나님의 자비에 응답하는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의 자비를 삶에서 깊이 있게 드러내는 삶일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 / 마태복음 13장 13:31-33, 44-52절]

복음서의 본문인 마태복음 13장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7~8개의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난 두 주 동안 그 가운데 두 개를 읽었고, 오늘은 짧은 5개의 비유를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 가운데, 처음 두 비유는 많은 무리(ochlos)에게 주신 것이요, 뒤의 세 개는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입니다. 처음 두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활동에 관한 것이요, 뒤의 세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본 사람의 응답에 관한 내용입니다. 

처음 두 비유는 ‘크게 자라는 겨자씨’와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에 빗대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합니다. 이 비유의 가르침은 ‘성장’에 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보다는 처음 상태와 나중 상태에 관한 대비에 있습니다. 겨자씨는 처음에는 어떤 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나중에는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 수 있게 변한다는 것. 하지만 비유는 그 성장 과정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과정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지만,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지는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들의 반응에 관한 것입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얻으려는 사람과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사듯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말합니다. 다섯 번째의 비유는 지난주에 본 ‘밀과 가라지의 비유’처럼 심판과 결단에 관한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 모든 비유를 들려주고 난 다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이것들을 모두 이해하느냐(understood)?” 제자들이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마지막에 52절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이것을 결론적인 가르침으로 봐야 하는지, 고민이 생겨서 몇 개의 주석서를 참고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13장의 결론은 51절의 물음과 대답으로 이미 났고, 52절은 추가적인 부록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52절은 또 하나의 ‘비유’로 읽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곱 개의 비유를 모두 이해했다고 대답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의 말씀은 수수께끼 같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여기서 율법학자(γραμματεὺς, scribe)는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비난받는 ’위선적인 지도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 나오는 ‘율법학자’는 마태 자신일 수도 있고, 그가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늘나라를 위해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의 창고에서 옛것과 새것을 꺼낸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알쏭달쏭합니다. 마태는 옛것을 율법으로 보았고, 새것을 예수의 복음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삶을 지어가는 과정에서 옛것과 새것을 꺼내서 사용합니다. 더 아름답고 진실한 삶을 구성하기 위해, 옛것과 새것을 서로 엮어갑니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지어지는 삶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성화된 불행감과 순간적인 위로 사이를 오가면서, 그네를 타는 것과 같은 삶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영성 또한 그렇게 오해되곤 합니다.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잠시의 종교적 위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신앙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기적을 행하고, 산을 옮기며, 죽은 사람을 살려내지만, 여전히 그 삶이 어둡고, 사납고, 거칠고, 냉소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삶은 무엇을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 신앙공동체는 무엇을 이루어가며 존재합니까? 이 질문을 남기며, 하늘뜻펴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신앙의 삶을 사는 동안 눈에 보이는 것들로 너무 초조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이란 우리가 무언가를 획득해가는 과정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역사입니다. ‘코로나 블루’의 시대를 믿음이 무르익는 계기로 삼고, 잘 이겨나가기를 바랍니다. 

침묵으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곧 당신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 모든 것 속에서 선을 위해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자라나서 어느새 새들이 쉴 그늘을 만들어줍니다.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삶은 무르익어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평화의 사람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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