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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주님은 중심을 본다 | 김희헌 | 2020-03-22

by 김희헌 posted Mar 22, 2020 Views 14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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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03-22

주님은 중심을 본다 (삼상 16:1-13, 5:8-14, 9:1-41)

2020.03.22. 사순절 넷째 주일

 

코로나 사태로 인한 위기상황이 장기화 되면서 사회적 피로감이 누적되어가는 듯합니다.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국가마다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곳이 많아져서, 상업시설의 폐쇄는 물론이요 국가 자체를 봉쇄하고 있으니,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달려온 시절과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격려와 위로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도 느끼는 바지만, 한국사회는 공적인 위기에 대처하는 잠재적 힘이 크다고 봅니다. 위기가 커질수록 자발적인 헌신과 공동체적 연대의 힘도 커지는 독특한 현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의 취미는 국난극복이라는 말까지도 나왔는데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될까요? 모두가 함께 고통당하는 이 경험을 거치면서 우리는 차별과 억압을 이겨낼 지혜를 배울 수 있을까요? 어제는 국제 인종차별철폐의 날이었습니다. 60년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분리정책을 반대하는 시민들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69명이 희생된 사건을 기억하면서 제정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법률적인 차원에서의 차별은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그러나 낡은 관습에서 비롯된 습관적 차별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스크로 인한 파동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외국인의 절반 이상이 마스크를 살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마스크 보급대책을 마련하면서 구매 대상을 건강보험 가입자로 한정하다보니, 미등록 이주민 39만 명, 단기체류자 46만 명, 유학생 10만 명 등 약 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은 마스크를 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기본적 권리마저 없는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위기가 커 가면 절망도 같이 커집니다. 그런데 사람은 눈앞에 펼쳐진 불의한 현실 자체에 대해서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불의에 맞설 정의의 얼굴이 없을 때 절망합니다. 고통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고통 자체를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고통을 감내할 만한 의미를 느끼지 못할 때 절망합니다.

따라서 이번 코로나 사태처럼 사회적 위기가 높아질 때, 우리는 그 위기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위기 속에서 발휘되고 있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의로운 사람이 살아있음을 보게 된다면, 그래서 진리의 거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고통이 더 이상 고통만은 아닐 것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움과 의로움과 진리를 지탱하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는 한 종교는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성서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 외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즉자적인 부르짖음이지만, 동시에 신학적 물음입니다. 만일 신학이 신()에게 적절한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라면, 성서에 나타난 최초의 신학자는 하갈이라는 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갈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주인 사라를 대신하여, 그녀의 남편 아브라함의 아이를 가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여주인의 학대를 당하고, 결국 임신한 상태로 도망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사막에서 천사를 만나 위로의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야 할 길을 발견합니다. 그 때 하갈은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쳐 부릅니다. “당신은 엘 로이(El-roi)이십니다.” (16:13) ‘엘 로이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고통 속에서 은총을 보는 것, 위기 속에서 하늘의 지혜를 얻는 것, 여기서 종교가 시작됩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 / 사무엘상 161-13]

보는 위치에 따라서 풍경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인식과 가치관의 차이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제1성서의 본문 사무엘상 16장의 이야기는 다윗의 등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역사의 눈으로 보면, 미래의 씨앗을 선택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을 대신할 왕을 세우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베들레헴에 도착합니다. 그 마을의 지도자는 두려워하면서 묻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좋은 일로 오셨지요? 사무엘은 그들을 안심시키고 나서, 제사드릴 준비를 한 다음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초대합니다.

이새의 아들들이 자기 앞에 섰을 때, 사무엘은 유심히 관찰합니다. 큰 아들을 보고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가 바로 이 아이로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겉모습을 봐서는 안 된다. 내가 보는 것은 중심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도 지나고, 셋째도 지나고, 일곱째까지 차례로 모두 지나갔지만, 하나님은 아무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누구를 선택하려고 하시는 걸까 하고 생각할 때, 한 사람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양을 치러 들에 나간 막내였습니다. 사람을 보내 불러온 막내아들은 눈이 아름답고, 외모가 준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이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십니다. 이로써 사랑받는 사람’(beloved)이라는 뜻의 이름인 다윗이 화려하게 역사의 무대에 오릅니다.

이 이야기는 사울 왕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윗왕조의 시각으로 채색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윗의 등장을 미화한 이 이야기는 그렇기 때문에 왕조 이데올로기를 벗겨내고 읽어야 합니다. 그 교훈을 찾기 위해서는, 이 이야기가 기록으로 완성된 때가 포로기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절망의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위태로운 시기를 지나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포로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영웅적인 다윗이라고 할지라도 도리어 슬픔만 주었을 것입니다. 그의 화려한 역사도 결국에는 파국으로 끝났고, 자신들은 포로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겉모습은 비극 투성이였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물음이 있다면, 그것은 그 비극적 역사에 담긴 뜻이었을 것입니다. 역사의 뜻이란 하나님의 관심사에 관한 물음입니다.

그것이 7절에 나오는 성찰의 문구라고 봅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이라는 말은 성서에 내장된 종교적 인간론의 좌표가 되는 말씀입니다. ‘중심’(lebab, heart)은 존재의 알맹입니다. 인간과 역사는 자신이 지나온 존재의 궤적(trajectory)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은 겉모습보다 존재의 알맹이를 가꿉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에 관심하는 사람, 그는 하나님과 공명(共鳴)하는 삶을 그리워하는 사람입니다.

중심을 본다는 것은 개인의 실존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도 있습니다. 사회적 문제의 중심이 무어냐 하는 것입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역사를 지배하는 사람들보다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사람에게 주목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세계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이 보는 세계의 중심은 낮은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권력을 쥔 자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역사를 길게 보면 권력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거기에서 하늘의 뜻을 봅니다.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 / 요한복음 91-41]

오늘 복음서의 본문은 소경이 눈을 뜬 기적사건, 이른바 보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대비를 이루는 구도를 갖고 있습니다. 비참한 사람의 겉모습을 보는 것과 그 비참의 중심을 꿰뚫어 보는 것이 대비됩니다.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의 대화가 진행되지만,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행이 길을 가다가,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심각한 이 종교적 질문의 실상은 겉모습에 집착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어지는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삶을 대하는 관점의 차이를 봅니다. 겉모습에 집착한 제자들은 과거의 죄를 보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서 나타날 하나님의 일을 봅니다. 성서는 여기서 제자들이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말합니다. 그들은 인생이란 죄의 짐을 안고 사는 것일 뿐이라고 본 것인데, 그것은 삶의 참된 의미에 대해 어두운 말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눈을 뜨게 된 소경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는 무엇을 보게 되었을까요? 빛을 경험하지 못한 이 사람은 아마도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를 모르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5). 그가 예수를 만나서 눈을 뜨고 어둠에서 풀려났는데, 이 치료행위는 육신의 눈만이 아니라 영적인 각성과도 연관된 것입니다. 그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과정이 복잡합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 소경 바디매오를 고칠 때처럼 그냥 말로써 고치지 않고 (10:52),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기고, 그것을 소경의 눈에 바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치료행위가 안식일 법에 저촉된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복음서 기자는 그런 묘사를 통해서, 겉모습에 집착한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의 대결이 있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합니다.

소경은 곧장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실로암이라는 연못에 가서 진흙을 씻고 나서 보게 되었습니다. ‘실로암’(Siloam)보냄을 받다’(Ἀπεσταλμένος, to be sent)는 뜻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사도’(ἀποστόλος)로 부름을 받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려는 의도가 여기서 드러난다고 하겠습니다.

단순히 기적적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보냄을 받는 사람이 되어 눈이 밝아졌다는 말입니다.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는 본문의 표현(ēlthen blepōn)을 다시 번역하자면, ‘보는 사람이 되어서 왔다고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서 이게 웬 횡재냐하고 생각 할만도 한데, 오늘 본문은 그의 눈 뜬 인생이 이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는 이제 보는 사람이 되어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이 생명 살림의 기적사건에서 정작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한 눈뜬 소경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제자들이 인생을 대할 때 죄의 짐을 지고 사는 것이라고 본 세속적 인생관에 지배당했다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적 인생관에 사로잡혀 삶의 본뜻을 보지 못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뜬 사건에서 그들이 주목한 점은 그 일이 어떤 노동도 있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벌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것은 생명보다 율법을 높이는 것으로서, 율법을 지킨다 하면서 생명을 저버린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소경이었다가 이제 보게 된 사람과 바리새인 사이에 대화가 이어지는데, 결국 소통은 실패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보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그 사람을 내쫓아버립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의 마지막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그것은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게 하는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39). 이 심판은 보지 못하면서도 본다고 말하는 눈 뜬 소경에게 내려지는 것입니다 (41). 이로써 본문은 진리가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마칩니다.

요한복음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누가 보는 사람이고 누가 보지 못하는 사람인지, 누가 빛에 속해 있고 누가 어둠에 속해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생명의 중심을 보는 사람이 보는 사람입니다. 과거의 죄를 먼저 보는 제자들이나 율법의 굴레에 갇힌 바리새인들은 겉모습에 집착하는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만나 눈을 뜬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낸 사람이 되고, 어둠에서 풀려나 보는 사람이 되어 살아갑니다.

 

[빛의 자녀답게 / 에베소서 58-14]

에베소서 5장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이러한 어둠과 빛의 대조는 성서에 많이 나오는 익숙한 이미지입니다. (13:12, 살전 5:5, 1:4-7, 요일 1:5)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빛의 자녀답게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빛의 열매가 있는 삶입니다. 바울은 선(, agathōsynē)과 의(, dikaiosynē)와 진리(alētheia)를 맺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올바름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분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편의주의적 사고에 지배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온 세계를 동원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말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

분별’(dokimazo)이 어려운 이유는, 하나의 심장에서도 여러 가지 생각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 사건에 대한 해석 역시 여러 가지입니다. 이런 차이를 해소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과 의와 진리를 얻을 수 있는 어떤 비법을 찾는 것 역시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만 이렇게 권합니다.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여들지 말고” (11),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어주시도록 하라. (14) 이 말씀은 주님에게 이르도록 삶을 성찰하고 밀고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세 개의 성서 본문은 모두 보는 것과 관련됩니다. 생명의 중심을 보는 맑은 눈을 갖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로잡은 집착과 율법의 굴레에 대해서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서 구원을 얻은 사람의 특징은,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묻고 또 물어야 할 것은, 예수를 통해 무엇을 보고, 예수 안에서 무엇을 꿈꾸고, 예수를 만나서 무엇을 이루기 바라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 지에 관한 물음입니다. 신앙이 일어서고 넘어지는 것은 무엇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을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사순절을 지나는 시기에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로부터 오는 인생의 숙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향해 간 예수님의 모습은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십자가를 향한 그분의 동선은 낮아지는 것이 목적이 된 삶을 의미합니다. 그 삶을 따를 때, 비로소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나지만, 이 경험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밝은 눈을 주셔서, 새로운 중심을 갖게 하시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합시다.

 

[파송사]

미래의 씨앗을 구한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겉모습을 보지 말고, 중심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간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 무엇을 위해살아갈 것인지를 묻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 안에 있기 원한다면, 주님의 사람답게 살아갑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환히 비추어주시도록, 선과 의와 진리를 바라며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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