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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생명을 택하라 | 김희헌 | 2020-02-16

by 김희헌 posted Feb 16, 2020 Views 11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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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0-02-16

생명을 택하라! (30:15-20, 고전 3:1-9, 마태 5:21-37)

2020.02.16. 주현절 여섯째 주일

 

신종폐렴(COVID-19)으로 인한 고통과 위기가 여전합니다. 1,500명이 넘는 사람이 죽고, 7만 명에 이르는 감염자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으며, 이 고통의 시간이 어서 그치기를 기도합니다.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는 일에 열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비극적 사태를 가리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건 지혜가 아니라 무지에 가깝습니다.

분명히 인생사에서 발생하는 행복과 불행이 하나님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인간의 불행을 곧장 신의 심판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성경의 가르침도 그러합니다. 욥기나 전도서와 같은 지혜문학은, 우리가 맞은 불행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듯, 우리가 얻는 행운도 하나님의 축복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종교적 해석을 배제하고 보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모든 일에 직접 개입하는 활동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을 신에게 빈다고 할지라도, 그 소원대로 신이 행동할 것이라고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준수 여부에 따라 상과 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적 생각도 거의 사라졌고, 경건한 종교도 실제로는 많은 점에서 무신론적 태도를 취하곤 합니다.

기독교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생각이 신앙생활에 거리낌이 된다고 느낄 때에는 고민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하는 우리의 선택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 회의감이 어쩌면 우리들의 삶에 깊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영혼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인간사의 행복과 불행선악의 선택여부와는 별개의 문제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일들이 선한 사람에게 일어나며, 악한 사람들이 태연하게 행복을 누리는 것을 볼 때 우리 영혼은 고통당합니다. 그런 고통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신앙의 의미에 대해서 보다 깊이 들여다 볼 것을 요구합니다.

성경의 목소리는 한결같습니다. ‘생명을 택하라!’고 합니다. ‘생명의 길에 관한 모세의 이 권고는, 그 길을 걷지 않는 사람에게 있을 보복과 협박에 관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때이든지, 또 누구든지 해야 하는 선택의 중요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선택 / 신명기 3015-20]

오늘 신명기본문은 모세의 고별설교’(29-30)로 알려진 내용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40년 동안의 광야유랑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진입하려는 시점에서 한 모세의 설교입니다. 모세는 이 설교 앞에서 신명기법전이라고 알려진 율법의 내용을 스무 장 넘게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런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이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잘 되고 번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순종하지 않고, 빗나가서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하고 섬기면,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고 맙니다.” (30:16-18)

생명이냐 죽음이냐를 묻는 이 질문은 커다란 무게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라는 책 자체가 안고 있는 신학적 특징 때문에 이 질문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명기의 표면에는 선택과 보상이라는 구도에 충실한 율법주의 사상이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관한 약속보다는, 율법준수 여부에 따라 상벌을 주는 신의 보복적 정의가 중심 기조를 이룹니다. 신명기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역사서를 읽다보면, 당근과 채찍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인과응보의 논리가 작동합니다. 그것은 신명기라는 책이 생겨난 배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전에 성서신학이 발전하지 못했을 때에는 신명기의 저자를 모세로 봤습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다섯 권의 책을 모세오경이라고 부르고, 신명기를 그 마지막 책으로 봤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신명기신명기학파로 불리는 후대의 집단이 쓴 첫 번째 책으로 이해합니다. 신명기뒤에 이어지는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는 모두 신명기학파의 관점이 녹아든 역사서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역사를 새롭게 기록한 신명기 학파는 모세가 살던 때보다는 오백 년 가량 후대에 활동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국가적 위기가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멸망하고, 남왕국 유다는 망국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선각자들은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위기의 근본문제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물었던 질문은, ‘왜 우리가 이런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물음을 안고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맞은 위기는 생명의 길을 걷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정리하여 오늘의 형태대로 신명기에 싣고, 그 관점에 따라서 자신들의 역사를 서술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오늘 본문에서 모세의 입을 빌어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합니다. 그것을 지키면 생명과 번영을 얻고, 그것을 어기면 죽음과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이 선언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나 위협이 아니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후대 사람들의 체험적인 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만일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고 신명기서의 표면적인 내용만 보면, 마치 율법의 이름으로 유혹하는 당근과 채찍의 보상신학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감추어진 신명기의 실제 내용은, 생명의 길을 소홀히 해온 역사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요, 그 길을 향한 다짐과 각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길을 걸으라는 모세의 권고가 가진 의미를 더 깊이 느끼기 위해서는,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청중들이 누구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랑생활을 했던 사람들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의 부모는 해방의 이상을 따라 광야로 나섰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만을 기다렸지만, 결국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그들의 원망은 이해할만합니다. 그들은 수시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노예였을지라도 이집트의 고기 가마 옆에 살던 때가 나았는데, 왜 모세는 우리를 낯선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렇게 고생하면서 죽게 만드는가!’ 그들이 가진 어리석음의 문제를 잠시 접어둔다면, 어쩌면 그것은 광야에 뼈를 묻은 사람들의 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한을 품고 죽은 사람들의 자녀가 지금 모세의 설교를 듣는 청중입니다. 현실적인 곤경과 불투명한 미래로 가득 찬 상황을 견뎌야만 하는 사람들이 바로 오늘 본문 뒤에 감추어진 청중들입니다. 이 청중들이 맞고 있는 현실은 미래의 축복이란 말로 현혹당하기에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이들은 광야라는 불가피한 곤경 속에서,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부모세대에서 시작된 유랑생활이 너무 길어서, 인간의 명예를 지키기 힘든 위기를 겪고 있으며, 이미 자신들의 삶은 마치 신의 형벌처럼 느껴지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생명인가 죽음인가, 번영인가 파멸인가? 만일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주어진다면, 큰 고민 없이 생명과 번영을 선택할 것입니다. 죽음과 파멸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방을 꿈꾸며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다 죽은 부모를 통해서 쓰라린 경험을 했던 사람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수동적인 복종보다는 더 큰 무엇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모세의 설교를 듣는 광야의 청중들처럼 시련과 위기를 경험합니다. 꿈꾸던 일이 좌절되면서 인생의 겨울을 보내기도 하고, 가족이나 이웃들과의 관계가 일그러지기도 하며, 늙고 병들어가면서 과거의 기쁨과 영광으로 위로를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런 삶의 위기는 선택의 위기를 동반합니다.

성경의 사람들 또한 삶의 위기와 선택의 위기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신앙공동체의 이야기는 고통 속에서도 생명의 길을 선택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삶의 위기 속에서도 생명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생명의 길을 향한 그들의 다짐과 각오가 모여서 모세의 입을 통해 표현됩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내용입니다.

생명을 택하십시오. 주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따르십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 (19-20)

 

[정진 / 마태복음 521-37]

무엇이 생명을 택하는 참된 길일까요? 진정한 종교는 율법에 대한 수동적인 복종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 분명하게 나옵니다. 산상수훈 가운데 오늘 본문은 종교적 계율에 관한 대표적인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재해석하여 복음의 계명으로 가르칩니다.

본문의 문법적 구도는 옛 율법과 새 계명을 대비시킵니다. 21절과 33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옛 사람들에게 말한 것을 너희가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이해할 때,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드러내는 대결구도로 보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아니라, 어떻게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네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살인과 간음과 이혼과 맹세에 관한 율법을 새롭게 해석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살인금지규정(20:13, 5:17)을 확대해서, 형제자매를 향한 분노와 모욕까지도 금지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능동적인 마음으로 용서와 화해를 하도록 요구합니다. 이것은 외부적인 강제규범보다는, 스스로 깨닫고 자신을 돌이키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간음과 이혼에 관한 금지 규정(20:14, 24:1-4)을 재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지 말고, 상대방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는 이기적 태도를 버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는 욕망과 집착을 끊어내는 부단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는 거짓 맹세를 물론이요, 무엇을 두고 맹세하는 것 자체를 금합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오직 예와 아니오만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기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혜와 더욱 연관된 것입니다.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만, 예와 아니오를 말하는 대부분의 자리는 무욕(無慾)의 자리요, 지혜의 자리입니다. 무지와 자기기만에 갇히지 않고 예와 아니오를 올바로 말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이런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율법의 규정들과 대립하기보다는, 자질구레한 곁가지들을 초극하고, 율법의 핵심 가르침으로 육박해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지난주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5:20)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의로움을 얻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온전한 삶을 향한 부단한 수행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종교적 규범을 가리켜 계율’(戒律)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세분화하면 계()와 율()로 나뉩니다. ‘’()라는 것은 수행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지키는 규범을 뜻합니다. 반면에 율은 질서유지를 위해서 만든 타율적 규범입니다. /법을 어길 경우에 필요한 것은 처벌입니다. 그러나 /명을 어길 경우에 요구되는 것은 참회입니다.

둘 다 필요하지만, 예수님은 모세의 보다도 복음의 를 중시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길입니다. 지키지 못할 경우에 처벌을 하는 타율적 규범만으로는 온전한 삶에 이르지 못합니다. 자발적으로 자신을 갈고 닦도록 이끄는 길잡이가 된 말씀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교가 율법주의를 탈피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수행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이어지는 산상수훈의 내용은 수행종교로서의 기독교적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수행은 율법에 대한 충실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율법에 매여 있는 자신을 해체하고, 스스로를 복음의 말씀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율법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회개와 기도와 말씀묵상을 통한 부단한 정진입니다.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방향전환으로서의 회개, 분노와 질투가 멈춘 침묵과 기도, 스스로를 비추어 보고 깨닫게 하는 말씀묵상,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수행적 종교만이 자신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온전히 체험하고, 남도 도울 수 있는 신앙의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갈고 닦으며 끊임없이 자라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교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자기수행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 하나 세우지 못하고, 자기 의()에 도취된 종교가 되기 쉽습니다.

 

[깨달음 / 고린도전서 31-9]

오늘 고린도전서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깨달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미몽에서 벗어나, 참된 실상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장성하고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공동체를 위해 일하며 열성을 다 할수록 다툼은 커지고 파벌이 생겨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미몽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현실을 직시하기를 바라면서, 고린도교회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요,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는 젖먹이 수준이요, 시기와 다툼이라는 인간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편 가르기에 몰두하는 육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질책하는 것은 그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깨우침을 주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자신들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무를 심는 사람도 중요하고, 물을 주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자라나게 하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가 가진 미몽의 원인, 어리석음의 뿌리생명의 근본문제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 하겠습니다.

어떻게 다시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까? 바울이 준 대답은 자라나게 하시는 분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욕망과 율법에 칭칭 감긴 자신을 풀어내고, 자기를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생명이 처한 실존적 처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 깨달음이 있을 때, 공동체 안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사람들, 나무를 심는 사람과 나무에 물을 주는 사람이 서로 하나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고, 모두가 하나님의 밭과 집(oikodome)에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synergoi)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가르침에서 생명을 택하라는 모세의 외침이 다시 울립니다. 생명을 택하는 삶은 율법의 조항 하나하나에 집착하는 마음보다는 하나님을 향해 단박에 차고 오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곁가지 문제로 왈가왈부하는 소란이 아니라, 믿음의 근본 요체를 향해 가는 정진이 필요합니다. 그 속에서 깨우침과 성숙을 맛봐야 합니다.

생명의 길은 가까이 있습니다. 결심은 단순해야 하고 삶은 간결해야 합니다. 생명의 길은 뒤에 있지 않고 앞에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과거를 반복하기보다는 삶을 새롭게 하며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생명의 공동체로 거듭나는 수행과 정진의 삶에 주님의 은총과 인도하심이 있기를 빕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모세는 현실의 곤경과 불투명한 미래를 안고 있는 광야의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생명을 택하십시오. 주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십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 살아간 성서의 사람들처럼, 우리 모두 깨어난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는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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