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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평화를 구하는 기도 | 김희헌 | 2022-07-24

by 김희헌 posted Jul 26, 2022 Views 27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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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7-24

평화를 구하는 기도 (1:2~10, 2:6~15, 11:1~13)

2022.07.24 성령강림절 일곱째 주일

 

[몸으로 기도하는 사람]

얼마 전 교단의 원로목사님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저보다는 삼십 년가량 선배이신 분으로, 광주한빛교회와 서울성남교회에서 목회하시고, 회갑이 넘어서 케냐 선교사로 떠나셨다가 16년의 활동을 마치고 여든 가까이 되어 귀국하신 분입니다. 이분은 광주 NCC 총무로 활동하면서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하셨고, 아프리카에서는 신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시는 등 본보기가 되는 활동을 많이 하신 분이기에, 교단의 원로로 존경받는 분이신데, 저도 그분의 경험을 듣는 것을 유익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한 후에 가끔 찾아오셔서, 목회에 관한 조언과 교단의 미래에 관한 당부를 하곤 하십니다. 오실 때는 책을 선물로 주시는데, 이번에는 특별한 성경책을 한 권 가져오셨습니다. <남북한 병행성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성경책은 왼편에는 북한말로 써진 본문이 오른편에는 남한에서 사용하는 성서번역본(개역개정)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책을 건네주시면서, 하시는 질문이 이번 WCC 11차 총회에 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좀 멀더라도 라이프치히에 가서 성 니콜라이 교회를 꼭 방문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속으로, ‘, 이분이 지금 통일운동을 말씀하시려는 것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월요기도회가 독일 통일의 상징적 구심이 되었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본받아서 우리 교단은 2014년부터 매주 월요기도회를 이어오고 있고, 그 연장선에서 이번 WCC 총회에서 <한반도 평화통일 월요기도회>가 준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 여행이 처음인 저는 총회를 마치고 다른 곳을 방문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니콜라이 교회에 가보라고 한 것은 독일통일운동의 역사를 배우고 오라는 의미라기보다는, ‘그 운동을 가능케 한 기도의 힘을 느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하신 제안은, ‘앞으로 향린교회가 광화문에 지어지면, 월요일 정오에 이 <남북한 병행성경>을 읽는 금식기도회를 통일될 때까지 드리는 것을 계획해보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제안은 단순히 후배 목사의 목회에 관한 조언이 아니라, 우리 역사와 향린교회를 깊이 사랑하는 노 목사의 충정 어린 말씀이었다는 것을 그분의 글썽이는 눈물을 보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이 너무 묵직해서 한참을 말하지 못하다가, 저는 입을 열어 이 일은 저만의 목회계획이 아니라 교우들과 함께 결단해야 할 일이니 숙고해 보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하는 저는 마음만이 아니라 눈시울도 뜨거워졌습니다.

그 후로 제 맘에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 역사에 통일을 위한 기도와 꿈이 있었는데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의미가 아닐까? 도심지 교회에 직장인을 위한 점심 기도회를 여는 곳이 있는데, 북과 남의 성경을 읽으며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아닐까? 점심 한 끼 굶으면서 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통일의 마중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상념들이 지금 제 맘에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일이 가능하게 될 조건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보니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19:19~20)

그 말씀을 생각하며 갑자기 성서 문자주의자가 된 저는 우리 교우 가운데 이 기도회를 지켜갈 두 사람이 있으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반도 통일이 될 때까지 마음을 합해서 이 기도를 드릴 단 두 사람만 있다면, 하늘로 향한 야곱의 사다리를 지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교우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런 생각이 과연 맞는지, 한순간의 객기는 아닌지, 그런 기도를 드릴 때 정말 마음이 뜨거워지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앞으로 가끔은 우리 예배시간 성서 읽기북한 성경으로 진행해 볼까 합니다.

아무튼, WCC 총회를 마친 후 라이프치히에 머물면서 저부터 기도해보려고 합니다. 지금부터 850여 년 전인 1165년 그 도시 한 가운데 지어진 니콜라이 교회, 1539년 마틴 루터가 설교한 후 종교개혁운동을 펼치며 훗날 작센주()의 개신교 본부 역할을 담당한 그 교회, 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합창단 지휘자로서 영적 삶을 풍요롭게 한 교회,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25살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아프리카로 가기 전 2년간 목사로 일했던 그 교회, 19829칼을 쳐서 보습으로라는 기치 아래 월요평화기도회를 시작한 그 교회,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공산주의자와 반체제인사 등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함께 모인 그 교회에서 7년 만에 통일에 이르게 한 기도의 의미를 깊이 느끼고 싶습니다.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먼저 삶으로 기도를 드린 선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살아간 삶의 증인들이 우리 교회의 역사에 있습니다. 그 가운데 며칠 있으면 2주기를 맞게 될 김낙중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저는 그분의 말년을 지켜보았을 뿐 많은 경험이 없습니다. 가끔 제방에 들러서 잡지나 책을 전해주셨고, 식당에서 좋지 않은 치아로 긴 식사를 하실 때 함께했던 정도입니다. 하지만, 책이나 인터뷰를 통해서 그분을 알아갈수록 끈질긴 혁명가의 모습만이 아니라 평화를 향한 치열한 구도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죽음을 넘나드는 온갖 고난을 받았지만, 분단시대의 고통을 마치 역사의 형벌처럼 감당했던 그분의 삶에 숙연해지곤 합니다.

그의 평화 사상은 정치적인 감각만이 아니라 종교적 깊이가 있습니다. 몸으로 드린 삶의 기도가 진실했기에 시대를 앞선 사상을 제안하셨습니다. 그는 우리 민족의 통일을 민족주의적 당위성보다는 세계 시민주의적 이상에서 찾았던 것 같습니다. 그 이상은 관념적 급진성보다는 평화를 이루는 실질적인 길을 사랑에서 찾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삶에 종교를 탐하는 정치의 모습도 없고, ‘정치에 구걸하는 종교의 흔적도 없습니다. 그분에 대한 저의 기억은 평화를 위해 삶으로 드린 기도로만 남아 있습니다.

그분을 다시 기억하면, 오늘날 분단체제에 길든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통일이란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요원한 일이요, 어쩌면 최선의 길이 아닐 수도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우리 사회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남과 북의 국가체제가 통합된다 해서 한반도의 평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남북의 통일 없이는 한반도에 온전한 평화는 없을 것입니다. 다시, 통일을 위한 기도, 몸으로 제사 드리는 삶, 시대의 문제를 자신과 가족의 과제처럼 여기는 깨우침이 필요합니다.

 

[역사의 비극과 하나님의 애통 / 호세아서 12~10]

오늘 제1성서의 본문 호세아서는 기원전 8세기에 활동한 한 예언자의 이야기입니다. 당시는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대결을 거듭하면서 외세에 잠식당하고, 망국의 분위기에 휩싸인 때였습니다. 호세아가 활동한 북 왕국 이스라엘에는 불안과 절망이 팽배했고 민란의 소용돌이가 일었습니다. 경제적 풍요와 영토 팽창이 최고조에 이른 시대가 여로보암 2세의 죽음과 함께 끝났고, 그 후 15년간 4명의 왕이 쿠데타로 살해당하는 혼란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나라는 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에 멸망합니다. 이런 어두운 시기에 호세아가 활동합니다.

나라의 패망은 내부의 정신적 몰락이 자초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 핵심은 자신의 문제를 외세에 의존해서 풀려고 하는 사대주의였습니다. 호세아는 자신의 안타까움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온갖 외세가 국력을 삼키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깨닫지 못한다.” (7:9)

이런 사대주의 정신은 오래된 사회적 부패와 불의가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종교로 보면, 야훼 신앙과 바알 신앙의 차이가 없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되었으니 풍요의 노예가 되었고, 자신의 절대적 믿음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으니 남에게 의존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 전 활동한 아모스의 정의로운 목소리를 외면했던 그 사회는 역사의 시간을 탕진하였고, 호세아의 시기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예언자 자신의 삶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호세아 역시 그 사회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불의한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의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예언은 자기 가족사에 관한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아라. 이 나라가 주를 버리고 떠나서 음란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1:2)

호세아는 이 명령을 따라서 고멜(Gomer)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21녀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 삶의 아픔, 시대의 어두움이 자녀들의 이름에 담겨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이스르엘입니다. 이스르엘은 약 백 년 전 예후가 쿠데타를 일으킨 장소로, 그 평원에서 벌어진 피의 살육(왕하 9~10)과 같은 운명이 앞으로 있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둘째 딸은 -루하마,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뜻의 이름이요, 셋째 아들 -암미,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저주의 이름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그토록 부적절한 명령을 내리고, 어쩌면 예언자라는 자가 가족을 저주하는 종교적 열기에 사로잡힌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들 때, 우리는 호세아서의 진정한 가르침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자적 의미 그 너머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해석할 때, 남성중심주의 세계가 가진 야만성에 대한 비판의식은 잠시 내려놓고자 합니다.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 아내 고멜의 목소리를 찾을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아 보입니다. 다만, 그 사회의 타락과 비극을 말없이 떠안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더러운 존재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그 불합리한 세계의 죄악과 비극만 어림짐작할 뿐입니다.

호세아서의 전체적인 가르침은 애통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내용입니다. 자신의 결혼과 가족에 관한 예언자 호세아의 의도적인 비유는 하나님의 저주에 관한 맹목적인 실행이 아니라, 시대의 비극에서 하나님의 비탄과 분노, 애끓는 사랑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패역한 시대의 문제를 회피하기보다는 자신의 밀접한 삶의 문제로 끌어안으라는 목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 시대라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역사의 고통과 비극이 나의 삶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역사의 패도(悖道)가 일어납니다. 호세아는 시대의 비극을 자기 삶으로 끌어안고, 새로운 시대를 향한 진통을 감당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최근 윤석열 씨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행정부를 구성한 지 두 달 만에 지지율이 급락한 것은 윤석열 씨의 쇼맨십이 끝난 이유도 있겠지만,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정부의 퇴행적 행위에 대한 환멸이 퍼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윤석열 씨가 앞으로 맞을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음란한 바알주의에서 벗어나 정의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겠지요. 지리멸렬한 분열을 거듭하는 이 시대의 비극에서 하나님의 비탄과 애통을 보고, 다시 마음의 중심에 평화의 기도를 회복하는 것이겠지요.

 

[간절한 기도와 삶 / 누가복음 111~13, 골로새서 26~15]

누가복음 본문을 보면, 기도를 마친 예수에게 한 제자가 찾아와 요청합니다. ‘선생님, 우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이 요청은 단지 종교의 기술을 가르쳐달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의 바람이요 꿈이어야 하는지, 무엇이 삶에서 추구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물음입니다.

예수는 세 가지 기도를 가르쳐줍니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삶을 살도록, 그분의 나라가 오는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삶을 지킬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여, 욕망이 지배하기보다는 절제와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죄를 용서받고 서로 용서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통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을 권합니다. 한밤중에 빵을 꾸어달라고 하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 간절함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무례하게 비칠 행동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고, 찾고, 두들기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욕망의 간구가 아니라, 진실과 정의를 구하지 않는 시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시대에 주어진 말씀 같습니다. 하늘 아버지를 믿고, ‘거룩한 영을 부어 주실 때까지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기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그 말씀을 잇는 또 하나의 교훈을 골로새서 본문에서 읽습니다. 바울은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공동체를 향해 말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게 하여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누가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노획물로 삼을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라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2:6~8)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은 자기 존재 의미를 분명히 압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하늘의 평화를 구하며, 하늘 아버지께서 거룩한 영을 부어 주실 때까지 삶으로 기도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이 혼탁한 시대에도 이 예배의 자리에 있게 하는 이유요, 우리가 교회 공동체를 지어가는 삶의 운동을 해나가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있게 한 역사의 마중물이 되어주신 분들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다가오는 시대의 마중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평화를 향한 간절한 염원을 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3주간 종전평화를 위한 서명운동을 하고자 합니다. 이름 한 줄 남기는 간단한 일이지만, 그보다는 삶으로써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평화를 위한 삶의 기도를 바치는 교우들과 이 땅의 많은 동지들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늘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삶으로 드립시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내려주실 때까지 기도합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모두를 화해와 일치로 이끄시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한반도와 온 세상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도록 힘써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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