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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몸을 거룩하게

by phobbi posted Jun 12, 2026 Views 5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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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6-12

2026. 06. 12.

 

루터는 자유롭고 종교적인 개인으로서의 내적 인간(Homo Internus)’과 사회적으로 조건지어진 세속적인 인간으로서의 외적 인간(Homo Externus)’을 구별한다. 그리고 인간은 내적 인간을 통해서만 신과 소통할 수 있으며,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 또한 내적 인간의 자리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외적 인간은 사람마다의 차이(difference)’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것이지만, ‘내적 인간은 절대자인 신과 교류할 수 있는 인격으로서 전체 인간의 동일성(identity)’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인간에 대한 주장으로 인해 모든 사람은 신 안에서 하나라는 평등의 논리가 생겨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의 본유적인 동일성을 가정함으로써 신과 일대일로 결판을 짓는 개인적 구원론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일대일의 구원론이 구원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머지않아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삼았다. 원래 이러한 최후의 심판은 종말론과 이에 따른 집단적 구원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계속해서 지연됨에 따라 우주론적이며 집단적인 종말론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차후로는 종말론보다는 개인의 죽음이 더 중요한 종교적인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이 개인의 죽음영혼의 구원이라는 틀로 재편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개인의 영혼(soul)이 종교의 핵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6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이다.

 

오늘날 우리가 개신교라고 부르는 프로테스탄티즘은 기원 상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인간을 영(spirit)과 육(flesh), 혹은 정신과 신체로 구분하는 극단적인 이원론이 있다. 육체는 사람마다의 차이를 결과하는 것이고, 정신은 사람들의 동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피부색, 인종적 특이성, 개인의 신체적 특징 같은 육체의 영역은 사람들을 구분하고 분열시키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가시적인 육체는 사람들의 위계와 차이를 결정하는 세속적인 것이 된다. 육체는 너무도 명확한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비가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정신의 동일성에 대한 가정은 사람들을 인간(human)’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어낼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육체는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동일하다는 가정, 바로 이 지점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은 육체의 영역을 포기하고 정신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인간적인 어떤 육체도 나에게는 낯선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어떤 정신도 나에게는 낯설지 않다. 인간을 둘로 쪼갬으로써 인간이라는 범주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차후로 프로테스탄티즘은 몸을 신과 만날 수 있는 성스러운 몸으로 변형시키는 몸의 테크닉을 포기하고, 오로지 신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성스러운 정신만을 연마하는 정신의 테크닉(spiritual technique)’인 것이다. 육체에 대한 혐오, 차이에 대한 경멸, 정신에 대한 선호, 동일성에 대한 갈망이 이러한 세계관을 지배한다. 그리고 이러한 도식은 몇 가지 연쇄적인 이원론을 가능하게 한다.

 

둘째, 이로 인해 신화의례의 이분법이 생겨난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성서(Scripture)’로 대표되는 신화는 신의 말씀이 화현한 로고스(Logos)의 산물이 된다. 그러나 성사(Sacrament)’로 대표되는 의례와 예배는 순전히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서 인간이 감히 신의 의지를 제어하겠다는 발상을 담고 있는 주술이 된다.

 

이창익 지음, <종교와 스포츠>(살림출판사, 2012. 11. 5. 초판 2),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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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개신교가 중요한 과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어떻게 개인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원을 이뤄나갈 것인가,

어떻게 정신의 고양뿐만 아니라 몸의 훈련을 할 것인가이다.

 

정신이라는 것도 결국은 몸의 일부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사유의 깊이를 획득하려면, 철저한 몸의 훈련이 필요하다.

걷기, 뛰기, 먹기, 던지기, 씻기, 밀기, 당기기, 춤추기 등등등.

그 무엇이라도 몸의 가능성과 상상력을 높여야 한다.

몸과 몸이 느끼는 감각이야말로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현장이다.

그래서 일상의 작은 몸짓 하나조차도 거룩한 의례로 체현하고,

움직임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향린 목회 586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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