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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극단에 대한 비판

by phobbi posted Jun 07, 2026 Views 6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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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6-07

2026. 06. 07.

 

성서에서는 자주 종교와 격렬하게 다투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를테면 구약에서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종교 공동체 바깥에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안에 있는 이들과 (심지어 더 격렬하게) 끊임없이 투쟁을 벌인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스 5:21, 23-24)

 

예수를 반대했던 이들 중 가장 비열한 이들, 그리고 예수를 가장 자주 검열했던 이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경건한, 달리 말하면 종교적인 이들이었다. 예수가 서기관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다투었던 이유는 그들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가 유대교 자체를 반대한 것으로 몰아가는 것(물론 신약성서에는 어느 정도 이러한 징후가 있다)은 후대 해석자들이 만들어낸 악랄한 허구다. 예수도 유대인이었다(그리스도교인들은 너무나도 자주 이 사실을 간과한다). 극단적인 경건주의자, 극단적인 종교주의자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이는 이스라엘의 예언자적 전통을 충실히 따르는 비판이었다)은 종교에 몸담은 이들이 손쉽게 빠질 수 있는 어떤 경향, 자신들의 신조, 의례, 도덕 규범을 고수하며 이를 기준으로 삼아 한 인간의 가치와 소속됨을 판단하려는 경향에 대한 비판으로 보아야 한다.

 

더글라스 존 홀 지음/이민희 옮김, <그리스도교를 다시 묻다>(비아, 2020. 7. 30.), 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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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들이 지니는 강하고 굳센 열정이

맹목적인 자기 신념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하나님을 들먹거리지만,

결국은 자기애적 한계를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불굴의 신념은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가능성을 창출하기도 하지만,

불굴의 신념이 무지와 얽힐 때는 그 무엇보다 위험한 것이 된다.

주변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은 한쪽을 고수하며 어느 한쪽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것이라기보다,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다.

하나의 신념을 확고하게 붙드는 것이라기보다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개방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불안과 불확실마저도.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럼에도 새로운 가능성에 자신을 내놓으면서 더 큰 내가 되는 것이다.

 

- 향린 목회 581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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