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5. 26.
히브리와 그리스 고전에 정통한 루이 펠드만 교수(1926-2017)는 그런 차이로 인한 대비 관계를 다음과 같은 비교 연구로 남기고 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 사이에 놓인 간극을 설명할 명제를 공식화할 수 있을까? ··· 시간과 관련하여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태도가 보이는 중요한 차이점은 (그들이 말하는) 신의 본성에서 드러난다. 유대인에게 신은 역사 속에서 움직인다. ··· 신은 시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특히 그는 역사적 사건들과 동일시된다. ······ 한 아이가 코츠크의 랍비 메나헴 멘델에게 물었다. ‘하느님은 어디에 있나요?’ 랍비는 대답했다. ‘그분은 네가 네 안으로 받아들일 때마다 계시지. 어디에(where)가 아니라 언제든지(whenever) 말이야’”
과연 어떤 그림이나 형체로도 대표할 수 없는 그 마지막 진리의 심판자는 단순히 형체를 초월한 ‘영적인’ 존재로서 이해할 수 있는가? 현실의 형체를 초월하여 박제화된 그리스 전통의 탈시간적 존재 이른바 형상이라는 실재는, 변화무상한 현실의 시간 가운데로 들어와 움직이는 영원의 심판자와 어떻게 달리하는가? 이것이 현실의 시간 가운데로 들어와 움직이는 영원의 심판자에게 걸려 있는 물음이며 전도서의 설교자 코헬렛이 그 자신이 소속한 히브리 전통에서 전달하는 과제이다.
박동환, <왜 X의 신학인가?>(사월의 책, 2023. 1. 5. 1판 1쇄 발행), 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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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초월과 내재 문제,
영원한 신비일 수밖에 없는 신에 대한 인식의 문제는
아마도 결코 해소될 수 없을 것이다.
해소가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이 아닐 테니.
그렇다면 문제는 랍비가 말한 대로
사람이 신을 받아들일 때, 바로 그 때의 문제가 된다.
사람은 언제-어디서 왜 그 무엇을 神이라고 명명하고 고백하는가?
神學은 결국 信學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神學은 神이 아니라 人間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神學은 人間學이다.
그래서 神學은 더 정밀하게 人間을 파고들어야 한다.
- 향린 목회 569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