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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신학의 시작점

by phobbi posted May 09, 2026 Views 8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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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5-09

2026. 05. 09.

 

이렇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성경에 비추어 성찰하는 가운데 사도들과 그들의 뒤를 따르는 교회는 죄 없는 희생자로서의 그리스도가 자발적으로 이룬 자기 봉헌에 주목했다. 이러한 주목은 모든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찬예배 거행 중에, 사제가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을 말한 직후 아니,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님 자신을 내어 주시던 날 밤에를 덧붙일 때마다 확인되는 바이기도 하다. “잡히심에서 내어 주심으로 향하는 이 변화는 진정한 전환점이며, 이 대목에서 역사에 입각한 기록은 신학에 바탕을 둔 성찰이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참된 신학이 시작된다. 그리스도는 죽임당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정당함을 밝히 드러내신다. 그 빛 가운데서, 우리는 그분이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다고 고백한다.

 

~~

 

가장 인간다운 행동, 곧 피조물인 우리의 본성이 안고 있는 모든 약함과 무력함을 드러내는 바로 그 행동으로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느님임을 보여 준다. 이 깊은 신비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는다. 우주 만물을 변혁하는 하느님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다. 그분은 그냥 죽은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십자가로 나아가 죽음을 맞이하셨다. 멜리톤이 말하듯,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도살된 어린양의 피에서 일찍이 천사가 보았던 주님의 신비. 바울은 이 신비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골로 1:15)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 그는 말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골로 1:19-20)”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이며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다른 어딘가를 기웃거릴 수 없다. 하느님을 알게 되는 다른 길은 없다. 이 전통에 서 있는 이들은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1고린 2:2)하는 가운데 사도 바울을 따라야만 한다. 앞서 말했듯 신학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그 수난의 자리에서 시간을 초월해 영원하신 하느님의 변혁하는 능력을 응시하는 가운데 시작된다.

 

존 베어 지음/김준철·민경찬 옮김, <그리고 신학이 시작되었다>(룩스문디, 2026. 4. 30. 초판 발행), 38-39, 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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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가 죽임 당함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내어 주심이라는 역설을 모두 깨달아야 한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면 안 된다.

그동안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내어 주심으로 주로 읽으면서,

그것을 자기 구원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하였다.

그러면서 죽임 당함이라는 사실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동시에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그저 죽임 당함의 상황을 깊게 연구 분석하지만,

내어 주심이라는 것은 외면한다. 학문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저자의 말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내어 주심을 깨닫고 고백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거기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이 시작된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죄 없이 십자가를 지고 죽임당하는 수많은 생명들에게서 수많은 그리스도를 보며 죽이는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하나님을 보았다 해서

수없이 죽임당하는 것을 미화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동안 예수의 죽음에서 영광을 본다는 말로 예수의 십자가를 미화하다 보니,

예수는 마치 죽으러 온 존재처럼 그려졌다.

그러나 이 세상에 죽으러 오는 생명이 있나?

모든 생명은 살러 오는 것이고, 더 풍성하게 살기 위해 오는 것이다(요한복음서 10:10).

살러 온 생명을 죽이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고, 그것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것과 맞서 싸우지 않는 신학은 신학이 아니다.

 

- 향린 목회 55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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