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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기도회

수요평화 "예수를 짊어지고" ㅣ 이민하 ㅣ 2024-10-02

by 이민하 posted May 03, 2026 Views 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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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10-02

2024.10.02. 수요평화거리기도회

 

"예수를 짊어지고"

고린도후서 4:7-18

 

지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분들, 반가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길을 서두르는 분들, 여전히 바쁘고 분주한 분들, 피곤하실 텐데도 거리 기도회에 참여하신 분들, 그리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지금도 소리 없이 꺼져가는 생명들.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2024년이 이제 석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창조절 다섯째 주를 다들 어떻게 지내고 계실지요. 저는 부끄럽게도 뉴스를 그렇게 가까이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도통 좋은 소식을 찾기가 어려워 마음이 괴롭기도 하거니와, 이런저런 소식을 접하면 무력감이 찾아들기도 합니다. '무력으로 평화를 이루자'는 믿음이 팽배한 세상에서, 우리 안에 보물을 담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괴로운가...를 자꾸만 생각하게 됩니다.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니 말입니다.  

얼마 전에는 출근하여 업무를 볼 때면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이 여러 번 났습니다. 오산에서 학교를 다니던 때에나 들었던 전투기 소리였는데, 알고 보니 공군 특수비행팀이 국군의 날 에어쇼를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그 행사를 준비한 수많은 개개인의 노고야, 제가 무어라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비행기 소리를 처음 듣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 소리에 저는 제법 긴장을 했더랍니다. 전세계가 중동 전쟁으로 긴장하고 있고, 남북 관계는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마당에.. 그 소리가 반가울 리 없지요.  

문민정부부터 5년에 한 번 진행됐던 시가행진이 2년 연속 진행되고, 뜬금없이 국군의 날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는가 하면, 기념식에서는 핵 도발 시 북 정권이 종말할 것이라며 대통령 본인이 도리어 북을 도발했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장병들을 위로하고, 또 그들의 위용을 보여주는 행사라기엔.. '대통령님 파이팅'을 삼창하는 모습이 사뭇 해괴하기까지 했지요. 정권의 불안정한 상황을 군사주의로 타개하려는 수작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놀랍지는 않으나, '전쟁 불사'나 '힘을 통한 평화'를 반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평화를 이야기하면, 오히려 '눈치를 보느냐'라는 구박이 돌아오기 일쑤지요. 글쎄요. 이것이 초등 시절 우격다짐도 아니고, 수천 수만이 죽어갈 전쟁에 대한 문제라면, 당연히 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쟁에 승자가 어디 있습니까? 전쟁이 나면 피해 있다가 나중에나 돌아올 권력자들이면 모르겠습니다만 어차피 평범한 사람들이 죽습니다. 도로 곳곳에서 사람의 몸이 터져나가고 언젠간 살아있었던 누군가의 시체를 무더기로 쌓아둘 테지요. 전쟁 분위기를 조장하지 말자는 호소에 '겁쟁이' 딱지를 붙인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어리석습니다. 당신도 그 죽음의 한복판에 징집되고 차출될 테니까요. 많은 이들이 권력을 나의 언어로 착각하고, 그 단단한 외피를 내 방패로 삼을 수 있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쓸쓸한 시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본문에서 바울은 고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고난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를 말하지요.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몸에 단단한 외피를 두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가 질그릇에 불과하다고 고백합니다. 이미 잘 아실 테니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테지만, 질그릇은 아주 연약합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깨지기 십상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지요. 누구나 자기를 지키고, 또 방어하기 위해 태연자약하게 굴고, 두터운 외피를 두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강함'을 지양합니다. 바울의 강인함은 이 연약한 우리 존재가 소중한 것을 품고 있다는 역설에서 옵니다.  

질그릇이 품고 있는 보물은 무엇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빛입니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이 빛이 있기에, 우리는 거대한 폭력의 상황에 놓이더라도 움츠러들지 않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버림받지 않고, 또 망하지 않습니다.  

저는 바울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습니다. 그 역설의 아름다움을 글로는 알겠는데.. 어째서 삶으로는 알기가 어려운 걸까, 하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매일 움츠러들고, 매일 낙심하며, 매일 버림받고, 매일 망하고 있으니까요. 소수자의 삶을 위해 힘썼던 활동가가 목숨을 잃고, 몇십 년을 지켜온 가게에서 쫓겨나며, 개발을 이유로 대책도 없이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셀 수나 있습니까? 빈곤사회연대의 김윤영 활동가는 자신의 저서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에서 "서울의 아파트가 있는 자리라면 누군가는 그곳에서 쫓겨났다고 봐도 좋다"고 말합니다. 이래도 우리는 망하지 않았습니까? 정말로 내가 아니면 괜찮습니까.

 

혹자는 무엇이 망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약하는 과학 기술로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잔인하게도 기술의 발전은 이미 망해버린 사람을 더욱 망하게 합니다. 수많은 평범한 사람이 기술의 발전으로 직업을 잃습니다. 뛰어난 합성 기술을 여성을 향한 성폭력을 저지르는 데에 사용합니다. 전쟁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소수의 시오니스트로 시작했으나, 이제 팔레스틴을 향한 인종말살을 시행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갖가지 기술을 사용하여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첨단 기술을 겸비한 전쟁은 얼마나 손쉽습니까? '전쟁윤리'라는 말 자체가 기가 막히지만, 이제 전쟁터는 그조차도 적용될 필요가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눈과 눈을 마주하는 때에 죽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눈을 보지 않고도 상대를 죽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타자화를 거치더라도, 다시 말해 내가 '적'이라 여기는 누군가가 인간이 아니라 괴물임을 스스로에게 세뇌하더라도, 죽음은 공포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공포를 견딜 필요가 없습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됩니다. 버튼만 누르면 누군가가 죽습니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무게조차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인권단체 '유럽 지중해 인권감시'가 펴낸 현장조사 보고서에는 이런 문구가 실려 있습니다. "이스라엘 무인기는 아기 울음소리와 여성의 비명을 방송한 뒤, 주민들이 그 소리를 듣고 돕기 위해 거리로 나오면 조준 사격을 가했다."  

기술이 발전하여 '우리 편'이 죽지 않게 되면 그건 괜찮습니까? 그런 생각이야말로 천박함의 끝입니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로 생명을 학살하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인간중심주의에서 약간만 벗어나 보면, 인간은 이제껏 수많은 동물을 학살해 왔고, 지금도 학살하고 있으니까요.

 

크나큰 영광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비가시적으로 느껴져서, 오히려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 이 고통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이것이 정말 일시적인 고통인가? 이 두려움 가운데 바울이 고백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자꾸만 의문을 가지던 저는, 다음 문장에서 바울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짊어지고 있기에, 우리가 지닌 보물, 즉 하나님의 빛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질그릇처럼 연약한 우리의 몸에 실려 있습니다. 바울은 두터운 갑옷을 입으라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약하게 죽어간 예수를 짊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깨지기 쉬운 질그릇 위에 죽임당한 몸이라니요. 연약함 위에 연약함이 겹칩니다. 이것은 매우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아무런 힘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임당한 몸이 지닌 힘을 압니다. 그 몸은 죽음에서 생명을 피워내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 기억이 바로 예수의 힘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예수를 짊어진 우리의 힘이 됩니다. 연약한 몸과 죽임당한 몸이 맞닿을 때, 기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 한겨레 21에서 아주 인상 깊은 칼럼을 읽었습니다. 홈리스월드컵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홈리스 청년들이 축구를 통해 긍정적인 관계와 연결성을 경험하며, 삶의 변화를 경험했다는 매우 인상적인 이야기였는데요. 가장 흥미로운 것은 '홈리스'의 개념이었습니다. 한국의 홈리스는 보통 노숙인이지만, 사실 이는 노숙인을 넘어서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거주 형태뿐만 아니라 무연고 상태를 포함하여 노숙인을 칭하고, 미국은 '일정 소득 이하'라는 경제 상태를 반영합니다. 유럽에는 집이 있는 홈리스도 있고요. 이재훈 기자는 "홈리스의 홈(집)이 집이라기보다 연고, 즉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홈리스는 "어떤 이유로든 관계를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바울이 말한 영광은 연약한 존재가 빛을 지녔다는 역설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연약한 몸에 연약한 몸이 잇대어질 때,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히려 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영광은 인간의 연약함과 고난의 한복판에 현존합니다.

현존은 지금의 나를, 우리를 감각하는 것입니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를 흘려듣지 않고,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진 폭력에 눈 감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므로, 여전히 움츠러들 것이고, 낙심할 것이며, 버림을 받고, 또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잇고 있기에,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겉사람이 낡더라도,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입니다. 자꾸만 새로워질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을 기억합시다. 기억하며 예수를 짊어집시다.

예수를 짊어지는 행위로써의 기억은 추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기억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은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스스로 취약해지는 것입니다. 연약함에 노출되는 것입니다. 약한 곳으로, 낮은 곳으로, 끊임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난의 자리는 예수를 짊어지는 현장이 됩니다.  

하지만 이 또한 기억합시다. 예수를 짊어짐의 끝은 영영 어둠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이 거리에 있는 이유는, 고난이 그저 고난으로 끝나지 않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꺼져갔던 생명이 부활의 영으로 함께하심을 우리는 이미 압니다. 썩어가는 낙엽 위에 새 움이 트듯이, 고난의 자리에 다시 희망이 흐릅니다. 이 희망은 홀로가 아니라 함께이기에 피어납니다. 희망이라는 기쁜 소식은 나와 당신을 이어주기에 우리의 삶을,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고작 질그릇에 불과한 여러분, 언젠가는 깨어질 여러분,

우리 안에 담기신, 우리의 몸에 얹어진 예수를 감각하십시오.

예수를 짊어짐으로써 이 자리에 현존하십시오. 나와 너를 병들게 하는 거대한 폭력의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고, 예수를 짊어지고 가십시오.

당신이 깨어지더라도, 깨어져 불완전한 내가 곁에 있겠습니다. 당신도 나도 연약하지만, 우리를 잇는 예수의 몸이 있으니, 우리는 괜찮을 것입니다. 이렇게 함께라면 제법 기쁠 것입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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