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5. 02.
생각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 ‘생각’은 그 자체로 아직 앎이 아니며, ‘생각’의 깊이와 부피를 늘려가는 짓은 도무지 공부가 아니다. 대부분의 ‘생각’은 자기 동일성을 심리적으로 강화하려는 ‘자서전적 태도’가 발현되는 자기-생각이라는 늪이기에, ‘생각’을 통해 공부에 열심을 부려보는 시도는 늪에서의 허우적거림이 오히려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더욱 철저하게 자기-생각 속으로 침잠케 할 따름이다. 극진하게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생각’이라는 유리병 속에 갇히게 된 자아는 무섭도록 자신만을 돌아보며, 단 한 순간도 타자라는 아득한 지평 혹은 심연에 발을 내딛지 않는 채로 자기-생각의 독창성만을 고집하는 허영과 자기-생각의 덩어리인 냉소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성과 인식의 독아론적 구조 속에서 호올로 여물어만 가는 ‘생각’은 존재자의 고독을 완성할 뿐 타자를 만나는 실천적 매개가 결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생각 자체를 완벽하게 ‘자연화(自然化)’시키는 ‘생각’은 말 그대로 공부의 원수인데, 무릇 인문학의 공부란, 자기 자신의 ‘생각’들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치는 일련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인문학 공부는, 내 기질과 버릇을 털어내면서 나라는 ‘생각’의 막을 찢고 나온 그 몸을 무한이라는 부재로서 실재하는 타자성인 너를 향해 끄-을-고 나아가는 실천적 근기의 표출 방식인 (자서전적 태도와는 정반대인) 연극적인 태도 혹은 알면서 모른 체하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특히, ‘글-말(응대)-생활-희망’이라는 동무 비평의 4단계에서, 지식인/학인들이 쉽게 자기-생각의 늪으로서 안착하기 쉬운 ‘글’이라는 덫을 넘어서기 위해 요청되는 수행의 단계가 다름 아닌 ‘말(대면관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자기-생각의 총체로 변질되어 버린 글의 바깥은 우선 ‘대화/응대’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밖으로 걸어 나오려는 시도는 반드시 몸을 끄-을-고 자아와 그 완고한 생각의 성채로부터 벗어나 타자들을 향한 개입의 형식을 취하는 일종의 비용을 요구하기 마련이지만, 진지한 비용 치르기에 몸을 사리거나 쉽게 체증을 보이는 ‘구경꾼’들은 ‘생각’의 보좌에 앉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구경을 일삼을 뿐, 자신의 생활이나 버릇을 다른 이들에게 선보이며 뒤섞으며 개입하고 개입되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구경이란 결국 자본제적 삶의 형식인 ‘소비자’와 연동하는 행위이니, 오늘날의 지식인들이 몸을 움직여 경험할 수 있는 개입의 방식 대신 줄곧 놓질 못하는 ‘생각’이란, 공부의 소비자가 되어 지식을 매매하는 일을 당연지사로 여기게 된 자본제 속 개인들의 슬픈 증상이자 치명적인 상흔에 다름 아니다. ‘생각’ 속에 머물기 위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생각’의 외부로 나가기 위해서만 생각하며, 손쉽게 구경한 뒤 손쉽게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개입함으로써 진지하게 비평하는 이가 바로 동무이니, ‘생각’(만)하는 그대라면, 구경(만)하는 그대라면, 아직 동무가 아닌 것.
김영민 지음, <영화인문학>(글항아리, 2009. 09. 02. 1판 2쇄), 329-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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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선생이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思而不學則殆)고 하면서,
‘배우기에 싫증내지 말아야 한다’(學而不厭)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각’은 너무 쉽게 ‘자기-생각’으로 빠져들고,
고백과 독백의 언어로 고착되는데,
이렇게 되면 제아무리 천재라 하여도 그의 글과 말은 소음이 되고 만다.
대화나 응대하지 못하고 제 말만 하는 이들과는
그 누구도 함께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입보다는 귀를 여는 것이 중요하다.
- 향린 목회 545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