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5. 01.
노예의 종교의 상징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노예들에게만 적용되던 사형 방식이었다. 이 고난·실패·죽음의 상징이 그리스도교 중심에 서는 것이 필수적인가? 이 상징이 신학과 경건주의에서 지나치게 중심적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비참함을 정당화하는 하나님’이 사회 안에서 숭배되도록 기여한 것은 아니었을까? 울리히 헤딩어는 “혹독한 운명 속에도 최고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근본 교리 때문에 ‘고대와 그리스도교의 동맹’을 비판했으며, 수동적 복종을 권고하는 모든 가르침을 단호히 배격했다. 십자가는 메시아적으로 이해된, 곧 비참을 제거해 주는 신학의 중심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종교정치적·정치적 살인이며, “예수의 용서하는 사랑조차도 그 사랑 자체가 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헤딩어는 고난으로 가득한 현실과의 해결되지 않은 모순, 곧 역설을 신학의 중심 범주로 삼는 신학적 사고를 비판한다. “하나님이 그 자체로 역설이 될 때, 하나님은 사랑과 비참 사이의 차이를 흐리게 한다.”
그러나 사랑이 사랑 자체이기 위해 십자가를 필요로 하는가 하는 질문은 내가 보기에 올바르게 제기된 것 같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헤딩어는 십자가를 ‘사형의 형이상학’-고난을 내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제사를 실행할 기회를 얻은 것-으로 해석하거나, ‘죽음의 위안에 관한 신비주의’-십자가 앞에서 인간이 자기 고난과 죽음에 위안을 얻는 것-로 해석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도, 사랑을 확신하기 위해 고난을 필요로 하는 마조히즘의 상징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실재의 상징이다. 사랑은 십자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랑이 십자가에 이른다. 실제로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실제로 스파르타쿠스의 지휘 아래 봉기한 노예들의 십자가가 로마 제국의 거리를 장식했다. 십자가는 신학의 발명품이 아니라, 해방의 시도들에 대해 세상이 수천 번이나 내놓았던 답변이다. 오직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지배 질서를 유지하려는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를 알아차리고, 명령에 복종한 군인들의 잔악함과 사디즘을 보게 되며, 친구들의 행동과도 대면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타격받은 이들’(패배자들)을 대할 때 취할 수 있는 우리의 태도이기도 하다. 우리 자신이 불행에 의해 타격을 입었을 때, 우리는 예수의 이야기에서 배울 수 있다. 사랑이 그 자신의 실현을 위해 십자가를 ‘필요로 하는가’라는 질문은 실존적 질문이 아니라, 오직 사변적 관심에서만 제기되는 질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독사(doxa, 영광), 그의 광채, 그가 스스로 드러내시는 영광, 그의 행복 역시-하나님을 그 자체로 바라본다면-생명의 파괴와 훼손이라는 끔찍한 역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사랑은 십자가에 이르게 되고,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행동하기를 기뻐하신다.
사랑은 고난을 만들어내지 않으며, 그것을 생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랑은 필연적으로 고난과의 대면을 요구한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고난 역시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신비주의의 언어가 거듭 강조하듯,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그는 십자가에서 내려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필요가 없었으며 대면(충돌)을 피할 수도 있었다. 대면을 피하기 위해 특정 목표를 포기하는 것은, 가장 흔한 무감각한 태도 중 하나다. 반대로, 대면을 추구하는 것은 고난 받는 자와 갈망하는 자에게 필수적인 태도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수년간의 시민권 운동들에서 나온 수많은 경험이 있다. 관련 당국은 대개 회피·지연·은폐의 정책을 펼치는 반면, 행동하는 시민들은 고난을 가시화함으로써 대면을 찾고 유발한다. 그들의 고난은 그들이 충족시킬 수도, 충족시키고자 하지도 않는 조건에서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비참함과 화해시킨다는 것은 바로 그 대면을 피하는 것이며, 고통을 수반하는 그리스도를 닮아감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해방하는 사랑을 미루는 일이다.
도로테 죌레 지음/채수일 옮김, <고난>(복 있는 사람, 2026. 04. 16. 초판 1쇄 발행), 244-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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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대면하게 되는 십자가를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십자가가 실재의 상징인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사랑하기에 이웃의 고난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사람은
이웃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다.
십자가가 필요한가 아니한가를 논의 선상에 두는 것은
구경꾼들의 수다일 뿐, 사랑으로 현실에 참여하는 자의 언어가 아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어떨 결에 십자가를 지는 이들도 있지만,
바로 그 어떨 결에 당하는 세상 불행, 고난의 한복판에서
사랑하는 자들은 스스로 십자가를 진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사랑을 미루지 말자.
- 향린 목회 544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