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4. 24.
불교는 현실적인 인생의 고(苦)에 주목했고 연기법을 깨쳐 사제(四諦)를 통찰하고 팔정도(八正道)를 수행함으로써 자력으로 구제(救濟)를 기약한다. 초월신을 전제하는 기독교는 그 신의 눈에 대응하는 종교적 양심을 길러 죄(罪)에 주목한다. 신에게서 멀어져 절망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자력으로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다. 이에 대속(代贖)의 교리가 만들어지고 예수는 구세주가 된다. 붓다나 예수의 삶과 정신에 조응하고자 애쓴다면 이들의 가르침에 의거해 한 세상을 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처럼 그(녀)가 ‘알고-되고-돕고자’ 하는 학인의 삶을 희망한다면 종교적 체계 속에 안둔한 채로 탐색과 실험을 멈출 순 없다. 앎과 지혜의 문제에서 ‘체계화’는 학인의 자산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안이한 정신의 피난처다.
붓다나 예수의 비전이든 공자나 소크라테스의 통찰이든, 그 모든 삶과 죽음에 관한 지혜는 ‘조각난’ 것이라는 게 내 지론이다. 누구나 조각난 나침반을 들고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자기 한계에 대한 자각과 성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배회는 현 단계의 지성과 영성이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이다. 체계에 얹혀 굴러가며, 남에게 맡긴 채로 믿고, 정신의 변화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이 살아간다면, 그(녀)는 배우는 자가 아니며, 변화하는 인격이 아니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영성은 삶의 현실에서 피어오르고 인간의 정신은 우주의 비밀과 별개가 아니라는 게 내 믿음이다. 자기 구제의 희망은, 우리 인생이 우주에 닿아 있고 정신은 자란다는 불이(不二)의 통찰과 함께, 조각난 지혜들의 빈틈을 조심스럽고 성실하게 메우는 노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김영민 지음, <한국적 교양의 실패와 여자들의 공부론>(글항아리, 2025. 11. 17. 초판발행), 12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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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에 관한 지혜는 조각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지론은 지당하다.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완전이나 무한은 불가능하며, 사실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러니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자라나는 것이며,
그러니 어디에 안주하는 것은 실로 게으르다는 반증일 뿐이다.
종교를 핑계로 게으름을 피거나,
과거의 자산에만 기대지 말아아한다.
오늘을 살고, 그렇게 매일 수행(修行)해야 한다.
- 향린 목회 537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