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을 일으키는 경청 공동체”
(요 4:1-11, 벧전 1:17-23, 눅 24:14-35)
강선구 목사
오늘 여러분께 하나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선택할 때, 익숙한 것을 선택하십니까, 아니면 조금 낯설더라도 새로운 의미를 주는 것을 선택하십니까.
만약 두 선택 모두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실 것 같습니까.
참여적 박물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미국의 니나 사이먼이라는 기획자는 사람들이 박물관에 들어오는 것은 익숙한 것을 확인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삶에 의미를 더하고, 나를 다른 자리로 이끌어낼 만큼 매력적인 서사가 느껴질 때, 비로소 문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동기가 생깁니다.
그런데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따라옵니다.
불확실성. 긴장. 문턱 앞의 두려움 같은 것들이죠.
학교도, 극장도, 종교 공간도 내부자에게는 당연한 곳이지만, 외부자에게는 위축과 경계의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낯선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익숙한 것을 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익숙한 것을 다리 삼아 더 넓은 세계로 건너가는 일입니다. 새로운 콘텐츠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속하지 않았던 방으로 들어가는 일. 불편함을 감수하고 타자의 세계 앞에 서는 일입니다.
그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할 때, 새로운 세계가 나에게 들어올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선택하고 경청하는 것이, 개인의 취향이나 자기계발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생존과 정의의 문제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 작은 헌책방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초등학생 친구들이 만든 전자음악단이 있고, 전시회와 독서모임과 영화제가 열립니다. 다양한 사회 의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풀어내는 창의적인 정치 참여 프로젝트들도 진행됩니다.
이곳의 책방지기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공간에 오는 사람들이 손님이 아닌 주인들이 모여들어 자유롭게 음악을 듣고, 상상하고,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졸리면 엎어져 잘 수도 있는 공간을 꿈꾼다고.
그리고 이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공간에서 자립이란, 자본주의 상품화 논리에 예속된 주체가 그것을 벗어나 스스로를 인식하고 참된 자유를 지향하는 실천이다."
운조루의 문턱 없는 대문이 오늘 이 헌책방의 열린 문이 되었습니다. 바우하우스의 교실이 이 동네 골목 안 작은 방이 되었습니다. 경청의 공간은 시대를 바꾸어도, 언제나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모두가 주인인 공간. 손님이 없는 공동체.
저는 우리 네 개의 향린공동체가 그런 공간이면 좋겠습니다. 상상만 해도 행복한 프로젝트들을 함께 만들어가며, 모두가 자립할 수 있도록 활짝 열린 경청 공동체가 되기를 꿈꿉니다.
4월은 유난히도 슬픈 기억이 많은 달입니다.
1960년 4월,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함성들이 있었습니다. 듣지 않으려는 권력 앞에 몸으로 맞선 목소리들이었습니다. 2014년 4월, 차가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304개의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국가가 끝내 듣지 않은 목소리들이었습니다. 그 4월들이 오늘의 우리를 여기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4월에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혐오 폭력 앞에 많은 생명들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지난 17일, 한국의 고용노동부와 네 개 노동권익 재단이 이주노동자 존중을 현장에 정착시키기 위한 협약을 맺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이름이 새겨진 안전모를 지급해, 동료들이 잊지 않고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며 씁쓸했습니다. 이름을 새겨야만 이름을 불러주는 현장. 아직도 이름 대신 번호처럼 불리는 노동환경. 서로의 위치와 계급을 암묵적으로 정해놓고 넘어오지 않게 하는 배타적인 시스템이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습니다.
점점 낯선 것을 선택하는 것이 바보 같은 선택이라고 평가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전쟁도, 혐오도, 이제는 내 일이 아니니 모르는 척하라는 무관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무관심은 중립이 아닙니다. 무관심은 폭력에 동조하는 일입니다.
요나처럼 성 밖 언덕에 앉아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것 —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유혹입니다. 내 안의 안전한 확신 안에 머물며, 저들은 저들의 몫이라고 선을 긋는 것. 그 선이 우리를 가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묻고 계십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듣지 못하고 있느냐고. 너는 무엇과 끝내 연결되기를 거부하고 있느냐고.
오늘 우리는 여러 장면을 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소리로 상상해내는 고래. 이웃의 자존심까지 헤아려 문턱을 없앤 운조루. 소수의 지배가 아닌 모두의 참여로 세상을 바꾼 바우하우스. 손님이 아닌 주인들이 모여드는 헌책방.
이 장면들이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경청은 듣는 기술이 아닙니다. 경청은 삶의 방향입니다.
잘 듣는 공동체는 약한 자를 가운데 두고 함께 이동합니다. 문턱을 낮추어 낯선 이를 안으로 들입니다. 손님을 주인으로 세웁니다. 그 공동체가 오늘 이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요나처럼,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끝내 듣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들으셨습니다.
요나가 도망칠 때도. 물고기 뱃속에서 울부짖을 때도. 성 밖 언덕에서 분노하며 앉아 있을 때도. 하나님은 그 모든 자리에서 요나의 이야기를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경청이 결국 예수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셨습니다.
십자가는 끝내 듣지 않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끝까지 듣는 사랑입니다.
그 경청이 우리를 살립니다. 그 경청이 우리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경청이 우리로 하여금 비로소 타인을 향해 귀를 열게 합니다.
내가 이미 사랑하는 세계만 반복하지 않고, 아직 들리지 않았던 소리에 귀를 여는 결단이 생길 때, 새로운 의미를 향한 이동이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의 귀가 조금 더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경계가 조금 더 낮아지기를 축원합니다. 문턱을 없앤 운조루처럼, 서로를 가운데 두고 함께 움직이는 고래의 무리처럼, 모두가 주인인 헌책방처럼, 경청을 통해 상상하고, 상상을 통해 연결되고, 연결을 통해 함께 저항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은 향린공동체를 향기로운 이웃이 될 수 있도록 세워가실 것입니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4월의 거리에는 아직 호명되지 못한 이름들이 있습니다.
아직 들리지 않는 울음들이 있습니다. 아직 연결되지 못한 손들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듣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보다 먼저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경청으로 문턱을 낮추고, 이름을 불러주고,
아직 들리지 않는 소리를 향해 귀를 열고 가십시오.
평화로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