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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일으키는 경청 공동체 ㅣ 2026-04-19 ㅣ 강선구

by 이민하 posted Apr 19, 2026 Views 11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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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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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을 일으키는 경청 공동체”

(요 4:1-11, 벧전 1:17-23, 눅 24:14-35)

 

강선구 목사

 

   오늘 여러분께 하나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선택할 때, 익숙한 것을 선택하십니까, 아니면 조금 낯설더라도 새로운 의미를 주는 것을 선택하십니까.

  만약 두 선택 모두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실 것 같습니까.

  참여적 박물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미국의 니나 사이먼이라는 기획자는 사람들이 박물관에 들어오는 것은 익숙한 것을 확인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삶에 의미를 더하고, 나를 다른 자리로 이끌어낼 만큼 매력적인 서사가 느껴질 때, 비로소 문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동기가 생깁니다.

  그런데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따라옵니다.

  불확실성. 긴장. 문턱 앞의 두려움 같은 것들이죠.

  학교도, 극장도, 종교 공간도 내부자에게는 당연한 곳이지만, 외부자에게는 위축과 경계의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낯선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익숙한 것을 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익숙한 것을 다리 삼아 더 넓은 세계로 건너가는 일입니다. 새로운 콘텐츠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속하지 않았던 방으로 들어가는 일. 불편함을 감수하고 타자의 세계 앞에 서는 일입니다.

  그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할 때, 새로운 세계가 나에게 들어올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선택하고 경청하는 것이, 개인의 취향이나 자기계발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생존과 정의의 문제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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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 말씀드리기 전에 그냥 한번 보아주십시오. 
  여러분은 고래의 귀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고래에게는 바깥으로 드러난 귀가 없습니다. 대신 긴 턱뼈에 있는 특수한 지방 구조를 통해 소리가 내이로 전달된다고 합니다. 음파가 뼈 속 점액을 타고 뇌로 들어가면, 뇌는 그 진동을 해석하여 전방에 있는 물체의 모양과 밀도와 거리를 3차원의 그림으로 변환해낸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소리로 듣고, 그것을 입체적으로 상상해내는 존재.
  그리고 잘 듣는 만큼, 정확하고 강력한 소리를 냅니다. 향유고래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 가운데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존재 중 하나라고 합니다.
  고래를 통해 잘 들을 수 있다면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음을 발견해봅니다.
  고래 공동체에는 또 하나의 장면이 있습니다. 무리 중에 아프거나 보호가 필요한 개체가 생기면, 고래들은 그를 가운데 두고 몸을 둘러싼 채 함께 이동합니다. 할머니 고래가 여러 새끼 고래들을 함께 돌보는 공동육아 방식은 무리 전체의 생존율을 높인다고 합니다. 향유고래는 서로 다른 부모의 새끼까지 함께 지키며 이동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코다라고 불리는 특유의 소리들로 서로 정보를 나누며 무리생활을 강화한다고 합니다.
  고래 공동체를 통해 잘 듣고, 잘 상상하고, 잘 말하는 것은, 결국 공동체를 강화하는 일임을 발견해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서 나 역시 더 잘 살아남게 됩니다. 
  경청은 단순한 예절이 아닙니다. 생존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서 4:9-11)
 
  오늘 요나서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잠깐 눈을 감고 이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성 밖 언덕. 저 아래로 니느웨 성이 내려다보입니다. 거기 한 남자가 혼자 앉아 있습니다. 이를 갈고 있습니다. 주먹을 쥐고 있습니다. 분노로 온몸이 굳어 있습니다.
  그 남자가 요나입니다.
  니느웨는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이제 죽어도 좋다고까지 합니다.
  요나에게 익숙한 것은 분명했습니다. 사랑하는 민족, 동료, 가족, 그리고 신앙. 그런데 그것을 공격하는 이방 민족 니느웨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가서 그들에게 용서할 기회를 주라고 요청하십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까지 가서야 마지못해 그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몸은 니느웨로 갔지만,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닫혀 있었습니다. 니느웨가 회개하자 오히려 더 분노합니다. 요나에게 그것은 감당 가능한 범위를 훨씬 초과한 요청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를 쉽게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가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그냥 낯선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공동체를 짓밟은 폭력적인 제국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왜 생겼는지,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도 그 언덕 위의 요나가 있을지 모릅니다. 팔짱을 끼고, 저들은 저들의 몫이라고, 선을 긋고 앉아 있는 우리가.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진짜 놀라운 것은 요나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죽어도 싫다는 요나에게 박넝쿨 하나를 주십니다. 요나가 그 넝쿨 덕에 시원함을 느끼자, 이번엔 벌레 하나를 보내 넝쿨을 시들게 하십니다. 그리고 뜨거운 동풍 속에 앉아 또다시 분노하는 요나에게 조용히 물으십니다.
  "네가 이 넝쿨을 아끼거든, 내가 니느웨 십이만 명을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하지 않겠느냐."
  단죄가 아닙니다.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몰아붙이지 않으십니다. 협박하지도 않으십니다. 대신 박넝쿨 하나를 통해, 요나 스스로 자기 마음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바라보도록 집요하게 기다려주십니다.
  요나가 죽어도 싫다는데, 왜 하나님은 계속해서 낯선 이방인의 목소리를 들어보라고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이 먼저, 요나의 이야기를 듣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가 끝내 듣지 못한 니느웨 십이만 명의 이야기도,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듣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요나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이미 결론을 내린 채 고개를 끄덕입니다. 두렵고 낯선 목소리 앞에서 먼저 마음을 닫습니다.
  우리는 끝내 듣지 않는 존재입니다. …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경청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닙니다. 낯선 것을 경청하는 일이 내가 감당해야 하는 범위를 과하게 요구할 때, 경청은 도구와 기술에 머물기 쉽습니다.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보다, 나를 확장하는 일 정도에만 머물게 됩니다.
  그것은 함정입니다.
  윤리적 의무와 도덕적 행위가 빠진 경청은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소비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내 성장의 재료로 삼는 일입니다.
  경청을 점검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경청은 나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나를 바꾸는 것을 허락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실천으로 연결하지 않는 경청은, 경청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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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 구례에 운조루라는 집이 있습니다. 
  월명산, 지리산, 오봉산, 계족산, 섬진강 — 다섯 개의 아름다움이 서로 이어지는 자리에 놓인 집입니다. 99칸에 이르는 큰 집인데, 설계도를 보면 이 공간을 연구하기 위해 세대를 거듭해서 얼마나 연결을 고민했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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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치도를 보시면 일방적인 방향에서 그리지 않고, 어디에서 보아도 전체 공간이 보일 수 있도록 그렸습니다.
  이 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놓인 뒤주입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타인능해 (他人能解). 다른 사람도 열 수 있다.
  누구든 쌀이 필요하면 와서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해마다 서른 가마 넘는 쌀이 거기에 채워졌습니다. 한 해 수확량의 두 할이나 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인이 직접 퍼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가져가는 사람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집에는 문턱도 없습니다. 굴뚝도 낮습니다. 양반집에서 밥 짓는 연기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연기를 아래로 빼도록 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의식한 배려였습니다. 산책로는 문학의 길로 불릴 정도로, 조경과 흐르는 강물들이 하나하나 상상적 영감을 일으키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 집은 단순한 건축이 아닙니다. 경청의 건축입니다.
  주인은 이웃의 처지를 먼저 상상했습니다. 내 앞에 쌀을 가지러 오는 사람의 마음을, 그 수고와 부끄러움과 절박함을 먼저 들으려 했습니다. 그 들음이 뒤주의 설계가 되었고, 문턱의 높이가 되었고, 굴뚝의 방향이 되었습니다.
  이 집은 말없이 선포합니다.
  공동체는 문턱을 높여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낮추어서 이어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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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 이야기가 먼 옛날 어느 양반 집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1919년 독일 바이마르. 발터 그로피우스가 하나의 학교를 세웁니다. 바우하우스. 집을 짓는다는 뜻입니다.
  이 학교는 처음부터 이상했습니다. 예술가와 장인이 같은 교실에 앉았습니다. 회화를 배우는 학생이 도자기를 만들었고,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이 무대 의상을 디자인했습니다. 교수와 학생의 경계도 흐릿했습니다. 모두가 서로에게 배웠고, 모두가 서로를 가르쳤습니다.
  그로피우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이 학교를 세웠습니다. 전쟁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소수의 지도자가 전체를 지배하는 구조가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낳는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반대의 공동체를 설계했습니다. 누구의 목소리도 처음부터 위에 있지 않은 곳. 서로의 다름이 위협이 아니라 자원이 되는 곳.
  바우하우스 예술공동체에서 발견하는 상상을 이끄는 경청 공동체를 발견합니다. 전쟁이 만든 위계의 세계를, 함께 만드는 교실로 바꾸려 했던 상상력.
  상상력은 혼자의 천재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서로를 경청하는 공동체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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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사는 동네에 작은 헌책방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초등학생 친구들이 만든 전자음악단이 있고, 전시회와 독서모임과 영화제가 열립니다. 다양한 사회 의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풀어내는 창의적인 정치 참여 프로젝트들도 진행됩니다.

  이곳의 책방지기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공간에 오는 사람들이 손님이 아닌 주인들이 모여들어 자유롭게 음악을 듣고, 상상하고,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졸리면 엎어져 잘 수도 있는 공간을 꿈꾼다고.

  그리고 이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공간에서 자립이란, 자본주의 상품화 논리에 예속된 주체가 그것을 벗어나 스스로를 인식하고 참된 자유를 지향하는 실천이다."

  운조루의 문턱 없는 대문이 오늘 이 헌책방의 열린 문이 되었습니다. 바우하우스의 교실이 이 동네 골목 안 작은 방이 되었습니다. 경청의 공간은 시대를 바꾸어도, 언제나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모두가 주인인 공간. 손님이 없는 공동체.

  저는 우리 네 개의 향린공동체가 그런 공간이면 좋겠습니다. 상상만 해도 행복한 프로젝트들을 함께 만들어가며, 모두가 자립할 수 있도록 활짝 열린 경청 공동체가 되기를 꿈꿉니다.

 

  4월은 유난히도 슬픈 기억이 많은 달입니다.

  1960년 4월,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함성들이 있었습니다. 듣지 않으려는 권력 앞에 몸으로 맞선 목소리들이었습니다. 2014년 4월, 차가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304개의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국가가 끝내 듣지 않은 목소리들이었습니다. 그 4월들이 오늘의 우리를 여기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4월에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혐오 폭력 앞에 많은 생명들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지난 17일, 한국의 고용노동부와 네 개 노동권익 재단이 이주노동자 존중을 현장에 정착시키기 위한 협약을 맺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이름이 새겨진 안전모를 지급해, 동료들이 잊지 않고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며 씁쓸했습니다. 이름을 새겨야만 이름을 불러주는 현장. 아직도 이름 대신 번호처럼 불리는 노동환경. 서로의 위치와 계급을 암묵적으로 정해놓고 넘어오지 않게 하는 배타적인 시스템이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습니다.

  점점 낯선 것을 선택하는 것이 바보 같은 선택이라고 평가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전쟁도, 혐오도, 이제는 내 일이 아니니 모르는 척하라는 무관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무관심은 중립이 아닙니다. 무관심은 폭력에 동조하는 일입니다.

  요나처럼 성 밖 언덕에 앉아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것 —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유혹입니다. 내 안의 안전한 확신 안에 머물며, 저들은 저들의 몫이라고 선을 긋는 것. 그 선이 우리를 가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묻고 계십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듣지 못하고 있느냐고. 너는 무엇과 끝내 연결되기를 거부하고 있느냐고.

 

  오늘 우리는 여러 장면을 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소리로 상상해내는 고래. 이웃의 자존심까지 헤아려 문턱을 없앤 운조루. 소수의 지배가 아닌 모두의 참여로 세상을 바꾼 바우하우스. 손님이 아닌 주인들이 모여드는 헌책방.

  이 장면들이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경청은 듣는 기술이 아닙니다. 경청은 삶의 방향입니다.

  잘 듣는 공동체는 약한 자를 가운데 두고 함께 이동합니다. 문턱을 낮추어 낯선 이를 안으로 들입니다. 손님을 주인으로 세웁니다. 그 공동체가 오늘 이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요나처럼,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끝내 듣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들으셨습니다.

  요나가 도망칠 때도. 물고기 뱃속에서 울부짖을 때도. 성 밖 언덕에서 분노하며 앉아 있을 때도. 하나님은 그 모든 자리에서 요나의 이야기를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경청이 결국 예수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셨습니다. 

  십자가는 끝내 듣지 않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끝까지 듣는 사랑입니다.

  그 경청이 우리를 살립니다. 그 경청이 우리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경청이 우리로 하여금 비로소 타인을 향해 귀를 열게 합니다.

  내가 이미 사랑하는 세계만 반복하지 않고, 아직 들리지 않았던 소리에 귀를 여는 결단이 생길 때, 새로운 의미를 향한 이동이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의 귀가 조금 더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경계가 조금 더 낮아지기를 축원합니다. 문턱을 없앤 운조루처럼, 서로를 가운데 두고 함께 움직이는 고래의 무리처럼, 모두가 주인인 헌책방처럼, 경청을 통해 상상하고, 상상을 통해 연결되고, 연결을 통해 함께 저항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은 향린공동체를 향기로운 이웃이 될 수 있도록 세워가실 것입니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4월의 거리에는 아직 호명되지 못한 이름들이 있습니다.

아직 들리지 않는 울음들이 있습니다. 아직 연결되지 못한 손들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듣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보다 먼저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경청으로 문턱을 낮추고, 이름을 불러주고,

아직 들리지 않는 소리를 향해 귀를 열고 가십시오.

평화로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