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4. 03.
결국 니체가 옳았다는 게 판명되었다. 즉 종교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종교의 공동체적 기능을 대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가 잘못 판단한 점은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과 자기고양(self-elevation)이 종교를 대신할 수 있다고, 심지어 지배계층 사이에서도 가능하다고 가정한 점이다. 3억 5천만 명의 초인(Übermenschen) 지망자들로 이루어진 국가는 번창할 수 없다. 그래서 <니스카넨 센터>(Niskanen Center)의 브링크 린지(Brink Lindsey)는 자신의 서브스택 블로그(The Permanent Problem)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도 종교의 후퇴를 인류의 지적 진보에 대한 낙관적 징후로 보는 관점은 실제로는 지탱할 수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초자연주의의 쇠퇴라기보다는 그것의 사사화(privatization) 혹은 원자화(atomization)이다. 환상적인 것에 대한 믿음은, 한때 우리를 성스러움에 대한 공유된 감각 위에 세워진 공동체로 묶어주던 전통적 저장소들로부터 빠져나와, 이제는 단절된 잡동사니처럼 존재하며, 개인의 의미 탐색을 인도하는 순전히 개인적 소비자 선택으로 가능해졌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가 ‘성스러운 차양’(sacred canopy)이라 불렀던 것은 산산이 부서져 땅에 떨어졌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그 파편들을 집어 들고, 혼자서 혹은 작은 집단 안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보지만,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세울 수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것보다 더 덧없고 덜 포괄적이다.”
조너선 라우치 지음/강무천 옮김, <에수, 민주주의의 영적 토대: 크리스천 파시즘과 시민신학의 희망>(한국기독교연구소, 2026. 03. 30. 초판 1쇄),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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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인간이 위대한 종교 전통의 지혜들을 한낱 미신적으로 치부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 빈자리를 과연 무엇으로 채웠나를 살펴보면 더 한심스러울 때가 있다.
폴 틸리히가 말했든, 종교란 궁극적인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이고,
가장 근원적인 총체성과 전체성을 고려하는 것인데,
이것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매우 부분적이고 하찮은 것에도 휘둘리고 만다.
그래서 니체는 신을 죽인 시대에 초인이 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초인의 방식이 히틀러나 트럼프의 모습이라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놓친 것인가?
신앙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온 것에 비해,
신앙을 놓아버린 이들 다수는 각자의 신념 속에서 보이는 것도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는 다 본 것 같은 어리석음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타락한 신앙도 마찬가지로 믿고 싶은 것만 믿어, 결국은 자기를 믿고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착각에 빠졌다. 이 둘이 합쳐지면 정말 눈뜨고 보아주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세계의 구원은 교양 있는 신앙인, 신앙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교양인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무신론자인 저자가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함께 논의하는 것이고, 시민신학에 희망을 거는 것이다.
- 향린 목회 516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