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4. 02.
믿음은 진리와 사랑의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는 것이므로 모든 행위를 의미 있고 선하게 만든다. 행위의 평준화가 이루어진다. 단지 도덕적 행위뿐 아니라 일상의 직업 활동도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종교 행위뿐 아니라 밥 먹고 일하고 쉬는 일까지 하나님의 주재를 느끼면 모든 일이 조화와 평화를 이루는 행위가 된다. 그렇게 보면, 믿음은 미발의 중(中)의 위치에 있고, 믿음에서 나가는 행위는 화(和)의 위치에 있다.
그런데 유교의 중과 기독교의 믿음은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무엇보다도, 믿음에서 인식되는 하나님의 권위는 마땅한 도리 곧 유교적 진리의 권위이기 이전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용납하고 죄인을 받아주는 은혜의 형태로 다가온다. 은혜가 진리에 앞선다. 은혜의 하나님이 진리의 하나님보다 앞선다. 진리의 중심에 은혜가 있다. 그 점에서 기독교의 믿음은 유교의 중이나 체인과 다르다. 인문주의자들에게 진리는 하늘의 명령(天命)이고, 하늘의 명령은 결국 양심의 명령이며 이념적 당위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인 하나님은 명령하기 전에 위로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법이기 이전에 복음이다. 복음이 율법에 앞선다. 그래서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을 “은혜와 진리”(삼하 2:6, 15:20)로 표시하고 신약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와 진리”(요 1:14, 1:17)로 표시할 때도 은혜가 진리에 앞선다.
물론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믿음과 은혜의 종교이지만 진리라는 이름으로 구현되는 도덕성과 보편 가치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교가 수양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주어진다. 사람이 아무 일도 안 한다는 말이 아니라 진리에 예속되는 방식이 다르고, 그 효과 또한 다르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유교에서는 사랑이 사람에게 주어진 덕성이지만, 기독교에서 사랑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유교에서 이루고자 하는 중과 화는 현실적으로 성인(聖人)에게나 가능한 일이지만,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통해 누구에게서나 이루어진다. 자유와 사랑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이라면 그 일을 이루는 특별한 사람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일이므로 누구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장차 이루어질 것을 믿음과 희망 속에서 본다. 그 점에서 기독교인은 이루는 자가 아니며, 이루어지는 뜻밖의 일을 증언하는 증언자이다. 그러므로 유교의 중(中)이 수동성이라면, 기독교의 믿음은 절대 수동성이다. 이것은 인간의 무력감이나 무책임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인간 현실에 쉽게 낙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의 믿음은 자유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 사람을 믿는 인문주의보다 더 큰 실천력을 보인다.
양명수, 「자유의 길, 진리의 주재와 의지의 수동성」, 『기독교사상 2026. 04. 통권 808호』(대한기독교서회, 2026. 04. 01.), 172-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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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보다 은혜가 앞서는 기독교의 믿음을 유교 경전 중용(中庸)의 중(中)과 화(和)와 비교한 아주 좋은 글이다. 하나님을 믿기에 얻는 장점들이 잘 녹아져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왜곡되는 경향도 기독교 내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위 글에서도 살짝 언급하며 경계하고 있지만, 믿음이 무책임으로 넘어가는 경우다.
한국의 개신교인들에게 과연 하나님이 은혜와 진리로 믿어지는가, 아니면 권력과 욕망 성취의 수단으로 여겨지는가? 욕망 성취의 수단에다가 왜곡된 맹목적 믿음에 의한 책임 전가까지 덧붙여서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곳으로 미끄러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야 할 길이 참으로 멀다.
- 향린 목회 515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