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3. 21.
사상(思想)은 기성품으로 시장에 출시되지 않는다. 인간사 자체가 그렇게 구성되지 않는다. 사상이 사상가 혹은 지식인이라 불리는 이들의 전매품이 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특히 대학교수라는 직업이 사회적 권위와 정신문화적 생산성을 얻는 중에 특정한 생각의 다발이 한 꿰미로 묶여 ‘사상’이란 이름 아래 정형화되곤 한다. 심지어 각 사상에는 이름표가 붙고, 저자가 지정되고, 운이 좋으면 행성 같은 추종자들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감성의 분할(le Partage du Sensible)’은 랑시에르의 것이고, ‘모방욕망(Désirmimétvique)’은 지라르의 것, 그리고 역사본체론(歷史本體論)은 리쩌허우의 것이 된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이 작동하는 방식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처럼 간단히 ‘분리·지배(divide et empera)’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사상에는 맥락과 역사가 있다. 그 계보나 침전의 시간성이 없는 것은 사상이 아니라, (아직은 공부가 아닌) ‘생각’이다. 이는 비유하자면 산숲으로부터 다양한 지천이 흘러들어 마침내 강을 이루고, 이윽고 강들조차 하나의 바닷속으로 합류하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사상사의 공부는 맥락이 거쳐온 이력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하이데거를 비롯한 사상가들이 입을 모아 주장하는 것은, 새로운 사상의 창안은 이미 흔해 빠진 말처럼 타자와 외부성에 착안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속한 전통에 견결하게 뿌리내리는 일이며, 그 전통의 가능성을 힘껏 뚫어보는 일이다. 말하자면 법고(法古)의 텃밭에서라야만 창신(創新)의 묘맥이 생긴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이것은 이해(Verstehen)를,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정신이 그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가다머의 사유를 연상시킨다. 우리 일상에 범람하는 실로 많은 생각은 에고의 요동이자 변덕에 불과하다. 사상은 생각과 함께(mit) 시작되지만 온전히 생각으로부터(aus)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사상은 심리적 변덕과 역사적 요동을 뚫어내고 ‘길게’ 발효와 성숙을 계속해 온 정신 진화의 산물이다. 이것 역시 융이나 여타의 종교 지혜들이 말하는 것처럼, ‘천로역정’을 거치면서 ‘주체화(Individuation)’의 길에서 나서는 자기 변용(self-transfomation)의 노동과 닮았다.
김영민 지음, <한국적 교양의 실패와 여자들의 공부론>(글항아리, 2025. 11. 17. 초판발행), 22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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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서 어떻게 사상으로 나아갈 수 있나?
심리적 변덕과 역사적 요동을 뚫어내지 못하면 그저 생각에 그치고 말 텐데.
발효와 성숙이 되려면 그야말로 ‘길게’ 진화하는 시간을 견뎌야 하는데,
생존에 버거운 이들은 그럴 시간 자체를 낼 수가 없다.
학교나 강단의 세계도 자본주의에 포섭되어,
간신히 강의 자리 하나 얻기도 어려운 마당이기에
그저 하루살이에 시달리는 학자들로 가득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향린 목회 503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