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와 갱신

by phobbi posted Mar 11, 2026 Views 48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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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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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3. 11.

 

학문은 이미·공부여야 하며, 종교는 이미·갱신이어야 한다. 그러고서야 겨우 연대를 말할 수 있으니, 연대는 오직 운동체(運動體)들의 것이고 운동체의 존립과 운용이라면 적의 실체와 그 실재감을, 체제 밖의 희망을 향한 당파성을 놓쳐선 안 되기 때문이다.

 

가령 예수운동이 운동 주체들의 출가와 목숨을 요구했고 당대 체제의 일각을 뒤흔든 사건이었다는 사실은 아득히 잊혀졌다. 루터의 것이든 키에르케고르의 것이든, 그 알짬은 운동성이었는데, 운동성이란 일종의 총체적 진지함으로 생활양식에서부터 희망(혹은, 유토피아적 계기와 전망)에 이르기까지 공사(公私)를 잇는 일관성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시대 최고의 미덕일 수밖에 없는 일관성이 아닌 것, 그것이 곧 자본주의적 시장이자 소비자적 태도인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발밭고 샘바른 변덕과 눈치 보기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같은 자본제적 변덕 속에서 기독교도 일종의 문화적 상품으로서 다양하고 얕게 소비된다.

 

그것이 오늘날 도처에서 보는 도시 교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른바 문화적 기독교(cultural Christianity)’의 세속적 형태인데, 물론 여기에서 주의할 곳은 문화적 기독교는 문화신학과 같은 기독교의 문화적 변용과는 세세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텔레비전 설교자(TV evangelists)가 연예인이자 문화상품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만큼 신자들도 소비자이자 고독산업’(이기호)의 구매자로 변해간다. 교회가 사교와 친목의 문화적 형식으로 체제 속에 안주하고 있고,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 교양과 친목의 스터디 그룹이 되어 체제에 붙박여 있는 이상 연대는 헛된 일이다.

 

김영민,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한겨레출판, 2011. 2. 28. 초판 1쇄 발행), 1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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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학문은 늘 공부여야 하고, 종교는 늘 갱신이어야 한다.

학문은 갈고닦은 세월에서 무르익고

종교는 지금을 넘어서려는 초월의 발버둥에서 새롭게 된다.

 

둘 다 안주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종교는 초월 속에서 오히려 참된 안식을 누리는 역설의 감각이 있다.

안주하는 것은 타락이다.

 

- 향린 목회 493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