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3. 08.
고통의 부정성은 사유에 필수적이다. 사유를 계산 및 인공지능과 구별되게 하는 것은 고통이다. 지능이란 어떤 것들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inter-legere)를 말한다. 지능은 구별능력이다. 따라서 지능은 기존의 것들을 벗어나지 않는다. 지능은 완전히 다른 것을 산출하지 못한다. 이 점에서 지능은 정신과 다르다. 고통은 사유에 깊이를 부여한다. 그러나 깊은 계산이란 없다. 사유의 깊이란 무엇인가? 계산과 반대로 사유는 세계에 대한 완전히 다른 관점을, 나아가 다른 세계를 산출해낸다. 오직 살아 있는 것, 고통의 능력이 있는 삶만이 사유할 수 있다. 인공지능에는 바로 이 삶이 없다. “우리는 생각하는 개구리도 아니고, 내장이 차갑게 식은 객관화하는 기록 장치도 아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고통으로부터 우리의 생각을 출산해야 하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피, 심장, 열기, 쾌감, 정열, 고통, 양심, 운명, 숙명을 어머니처럼 생각에 제공해주어야 한다.” 인공지능은 계산장치일 뿐이다. 물론 인공지능은 학습능력이 있고 딥 러닝 능력도 있지만 경험을 하는 능력은 없다. 고통이 비로소 지능을 정신으로 변환시킨다. 고통의 알고리즘은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커다란 고통만이”, “충분한 시간을 갖는” “길고 느린 고통”만이 “정신의 마지막 해방자”다. 이런 고통은 “우리 철학자들로 하여금 우리 안의 가장 깊은 심연으로 파고들게 하고, 아마도 예전에는 우리의 인간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신뢰와 선량함, 은근함, 온유함, 평범함을 내 던지게 한다.”
한병철 지음/이재영 옮김, <고통 없는 사회>(김영사, 2021. 4. 15. 1판 1쇄 발행), 6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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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하는 지능과 사유하는 정신 사이에는 사회적 몸이 겪는 고통이 존재한다.
고통으로부터 사유의 깊이와 진정한 의미의 창조가 실현된다.
물리적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있다지만, 그것이 정말 생명체들이 느끼는 몸의 고통을 알까?
요한복음서는 말씀(Logos)이 살(sarx)이 되었다고 말한다.
옛 사람들은 이것을 도성인신(道成人身)이라고 말하곤 했다.
도(道)가 땅강아지에게 있어야(道在螻蟻. 『莊子』 「知北遊」) 진정한 도이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모든 피조물의 살이 되어야 진정한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계산하는 지능은 고통을 겪는 정신에서만 진정한 힘이 되는 것이다.
- 향린 목회 490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