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2. 19.
희망은 ‘자기’ 안에서 힘을 만들지 않는다. 희망의 중심이 ‘자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희망하는 이는 타인을 향해 나아간다. 희망하는 이는 ‘자기’를 넘어서는 일을 신뢰한다. 따라서 희망은 믿음에 가깝다. 절대적인 절망 앞에서도 나를 세우고 심연 속에서 서 있는 힘을 주는 것은 초월성을 지닌 타자의 존재다. 희망하는 이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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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하는 이는 오히려 자신을 넘어 나아간다. ‘무언가를 믿고 가다’가 희망의 기본 공식이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나는 우리를 위해 너를 희망한다’라는 말로 ‘우리’를 향하여 ‘자기’를 초월하는 희망의 모든 차원을 강조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독일 소설가 아힘 폰 아르님(Achim von Arnim)은 이 셋을 ‘아름다운 세 자매’라고 불렀다. 이들은 모두 타인을 향해 있다. 희망하거나 믿거나 사랑하는 이는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주며 ‘자기’의 내부에 머무는 것을 초월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사유에 사랑과 믿음은 없다. 거기에는 타인의 차원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는 사랑하지도, 희망하지도 못한다.
한병철 지음/최지수 옮김, <불안사회>(다산북스, 2024. 11. 28.) 148, 15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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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넘어선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한계 안에서,
자기 경험 속에서 사유하고 선택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남이 내게 해 주는 이야기에 경청하여
자기에게 없던 것, 그래서 낯설고 때로 역겨운 것까지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기는 보지 못하고 남은 다 보는 맹점이 있다.
그 맹점에 대해서 말해 주는 사람은 귀한 사람이다.
나는 보지 못하고 남이 본 것, 그것을 잘 받아들여서 바꿀 수 있다면,
그렇다면 혹시 거기에서 극기(克己) 즉 자기 초월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실로 자기에게는 없는 것을 들을 때,
그것을 이해하고 수용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자기에게 존재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는 자기 안에서만 맴돌기 마련이고,
남이 해 주는 이야기도 자기식으로 듣고 판단하게 된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남이 하는 조언에 거부하고 역정을 내기도 한다.
그럴 때는 정말 어쩔 수가 없다.
이것이 평범한 우리들의 한계이고,
그래서 세상은 비극으로 가득하다.
인간에게조차도 열지 못하는 귀를 하나님께 어떻게 열겠는가!
- 향린 목회 473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