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당신을 어루만질 때
(출 24:12-18, 벧후 1:16-21, 마 17:1-9)
2026.02.15. 주현절 여섯째주일/설주일
[현현과 고난 사이에서]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새날 아침, 예배의 자리에서 인사를 드립니다. 모두 주의 날을 평안히 보내고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주현절 기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현현을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감각하는 것은 단순히 성서에 나타난 그분의 자취를 살피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어두운 구석구석에 주님의 빛이 어떻게 스며들고 있는지를 묻는 성찰의 과정입니다.
어느덧 우리는 사흘 후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될 사순절의 길목에 서 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을 향한 여정이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자연스레 질문하게 됩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빛은 고난의 현장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우리는 그분의 고난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해야 하는가?” 오늘 하늘 뜻이 주님의 나타나심과 주님의 고난, 그 어간에서 갈팡질팡하는 우리에게 위로와 도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흔히 ‘변화산 사건’이라 이르는 일화입니다. 복음서에는 신비한 사건이 여럿 등장하지요. 우리에게 주로 익숙한 사건들은 치유, 축귀 등의 기적 사건입니다. 예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기적 사건에서는 예수의 능력이 강조되지요. 그러나 예수의 변모는 그와 성격이 다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어떤 능력의 행사라기보다, 예수의 존재 자체에서 드러나는 빛입니다. 예수의 변모는, 제자들이 예수 안에 비친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차리는’ 순간입니다.
변화산 사건이 출애굽기의 모세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마태복음서 곳곳에는 변화산 사건을 포함해 저자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모세와 예수의 연결 지점들이 나타납니다. 유대교에서 모세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정점의 인물이자, 대체 불가능한 권위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들은 중재자였고, 토라를 통해 이스라엘의 기초를 놓은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마태가 이 거룩한 풍경 한가운데 예수를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세와 예수를 반복해서 대비하는 마태의 서술은 단순히 유사성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가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를 이스라엘이 가장 권위 있게 전승해 온 계시의 자리, 곧 모세 전승의 중심에 위치시키며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합니다. 구름 속 음성은 예수를 “내 사랑하는 아들”로 선언하며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합니다.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긍휼과 사랑으로 성취해 가시는 분임을 마태는 증언합니다.
[닿을 수 없는 영광]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깊게 살펴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의 핵심은 모세와 예수의 대비, 곧 예수의 정체성에만 있지 않습니다. 변화산과 시내 산의 내러티브를 대비하며 읽어보면,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 나타내셨는지, 또 인간은 그 앞에서 어떠한 감정을 느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늘의 음성을 두려워한 이가 어디 예수의 제자들뿐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압도적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두려움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두려움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긴장을 형성하는지입니다.
오늘 출애굽기 본문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시내 산으로 오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기 24장이지만, 시내 산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는 19장부터 34장에 걸쳐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과 계명을 주시기 위해 시내 산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공동체 한가운데로 ‘내려오시는’ 분입니다.
다만, 누구나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은 산 주위로 경계를 치고, 백성들이 그 경계를 넘어 산에 오르지 말라고 말합니다. 경계선을 넘는 이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까지 경고하지요. 결국 산 위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던 이들은 모세나 아론, 또는 제사장 등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경험했을까요? 타오르는 불과 그를 가린 구름, 곧 표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신비로 나타나신 이유는, 그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을 인간이 감당할 수 없다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은 인간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격과 차원으로 경험되었기 때문입니다. 닿고 싶어도 차마 닿을 수가 없지요.
이 두려움은 시내 산 이야기의 다른 장면에서도 반복됩니다. 출애굽기 34장은 모세가 두 번째 돌판을 받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고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하나님을 직접 본 것도 아닌데도, 모세에게서 비쳐 나오는 빛조차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수건을 써야 했지요. 시내 산에서의 만남은 기쁨만이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과 거리감으로도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원초적인 공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지만, 전쟁과 폭력, 기후 재난, 그리고 혐오와 배제가 일상이 된 현실을 마주할 때 문득 깨닫습니다. 우리 역시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힘 앞에 놓인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시내 산 앞 이스라엘의 두려움이 ‘낯선 옛 이야기’가 아니라, 유한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조금은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격이 다른 존재로 경험되었습니다. 산에 경계가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 다가가려면 세세한 정결 예식이 필요했던 것도, 유한한 존재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남을 열어두려는 장치였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구분이 ‘누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가’를 가르는 기준으로 굳어질 위험 역시 존재했습니다. 기억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으로, 성막으로, 끊임없이 하강하는 이미지로 이스라엘 백성과 분명히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그 임재는 여전히 ‘넘지 말아야 할 선’과 함께 경험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사람에게 오셨지만, 사람은 두려움 속에서 거리를 배웠습니다.
[다가오는 영광]
그러나 복음서가 들려주는 변화산 이야기는 이 거리감을 단숨에 무너뜨립니다. 변화산 사건은 빛의 절정입니다. 예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처럼 희어지며, 구름이 덮고, 하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 빛을 통해 우리는 예수에게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지만, 우리의 시선이 단지 화려한 ‘현현’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예수의 영광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의 영광은 곧 시작될 십자가의 길 앞에서, 당신께서 ‘가야 할 곳’을 비추는 빛입니다.
이 빛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변화산 사건 직전의 장면을 떠올려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서 16장에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합니다. 베드로는 그 말을 납득하지 못하고, 예수를 붙들어 세우며 말리지요. 예수는 그런 그를 꾸짖고,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비장한 예고 직후에 변화산의 영광이 펼쳐집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순서이지요. 복음서의 저자는 이러한 치밀한 배치를 통해, 변화산의 영광이 고난을 우회하는 빛이 아니라, 고난을 관통하여 비추는 빛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산 위에서 놀라운 광경을 봅니다. 사랑하는 선생님에게서 빛이 나고, 율법과 예언의 상징인 모세와 엘리야가 곁에 섰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신비와 황홀경은 눈앞의 순간을 붙들고 싶은 욕망을 낳기 마련입니다. 베드로는 이 영광 속에 머물자며 예수께 제안합니다. 제 입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해 놓고서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엄중한 말씀은 그만 잊어버린 채 말입니다. 그때 하늘의 소리가 베드로의 말을 끊으며 선언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변화산의 모든 사건은 이미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제자들은 그 빛의 의미를 다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거룩한 위엄 앞에 압도되어 다만 땅에 엎드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두려움의 자리에서, 본문은 결정적인 장면을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으나 그곳에는 늘 ‘경계’가 있었습니다. 가까이 오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거리를 배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변화산에서는 두려움 한가운데로 예수가 먼저 다가옵니다. 산 위, 구름 속에서 불같은 영광으로 임하시던 하나님이 이제는 인간의 살과 손길이 되어 우리에게 닿으십니다. 낮은 곳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분명해진 것입니다. 닿을 수 없었던 영광이,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는 영광’이 됩니다.
저는 오늘 변화산의 이야기에서 ‘엎드린 제자’를 책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나 두려움에 엎드러질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맞닥뜨렸을 때, 옳다는 것을 알아도 차마 가기 싫은 길을 마주할 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이 무겁게 들려올 때 말입니다.
저는 다만 예수의 걸음과 손짓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엎드러진 자리로 예수가 오십니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 존재의 격을 넘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어루만지며 위로하십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두려움 속에 갇혀 있던 우리를 일으켜 세우신 그분의 손길은, 이제 우리를 산 위가 아닌 산 밑으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의 자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어둠 속을 비추는 등불]
그럼에도, 우리는 산 밑으로 가기가 두렵습니다. 산 위에서 잠깐 보았던 빛, 그때 느꼈던 확신이 내려가는 길에서는 금세 희미해질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그대로 남아 있고, 마음의 어둠은 여전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묻게 됩니다. “내가 본 빛은 대체 무엇이었나? 이 길에서 무엇을 붙들고 걸어야 하나?”
베드로의 이름으로 전해진 편지는, 변화산의 경험을 우리의 질문과 연결해 줍니다. 저자는 변화산을 “교묘히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 공동체를 지탱하는 ‘증언’이라고 말합니다. 변화산은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기억’입니다. 눈부신 장면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빛이 다가와 우리를 어루만진 기억이 우리를 예수의 길로, 십자가의 길로 움직입니다. 그 기억은 산 아래로 내려가 걸음을 내디딜 때 우리를 지탱하는 근거가 됩니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언의 말씀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다.” 우리는 흔히 ‘예언’을 미래를 맞히는 신비한 정보로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예언은 늘 현실 한복판을 향합니다. 억울한 이들의 탄식이 들리는 자리, 힘없는 이들이 밀려나는 자리, “원래 세상이 그렇다”는 말로 폭력이 정당화되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어디인지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예언의 빛은 언제나 어두운 곳을 향합니다. 예언은 우리가 외면하고 지나치기 쉬운 ‘산 밑’의 자리로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가 변화산의 빛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던 예수의 말씀을 등불처럼 들고, 칠흑 같은 산 밑으로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도 ‘산 밑’이 있습니다. 각자의 삶에서 두려움이 다시 고개를 드는 자리, 상처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자리가 바로 그곳입니다. 또한 우리 공동체에도 ‘산 밑’이 있습니다. ‘밖’으로 밀려나고, ‘기준’에서 탈락하며, 외로움 속에 남겨진 이들이 있는 자리 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창한 결심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그러했듯, 우리도 각오만으로는 일어서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다가오시는 빛의 손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 엎드린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손을 대시는 예수의 그 어루만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따뜻한 온기를 기억하며, 예언의 말씀을 등불 삼아 산 밑으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빛이 우리를 어루만질 때, 우리는 단순한 위로를 넘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얻습니다.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가고 계십니다.
[파송사]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기가 두려울 때, 당신의 살갗에 위로로 와닿는 빛을 감각하십시오.
주님의 다정한 온기가 우리를 산 밑으로, 십자가의 길로 이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