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2. 03.
오늘날의 긍정사회는 갈수록 더욱더 상처의 부정성을 축소시킨다. 이는 사랑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상처를 초래할 수 있는 큰 도박은 전부 회피된다. 성적 충동의 에너지는 파산을 막기 위해 자본 투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분산 투자된다. 지각 또한 부정성을 점점 더 회피한다. ‘좋아요’가 지각을 지배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미에서 본다는 것은 언제나 다르게 보는 것을, 다시 말해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를 피하고자 한다면 다르게 볼 수도 없다. 본다는 것은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동일한 것이 반복될 뿐이다. 감수성이란 상처 입을 수 있음을 뜻한다. 상처란 보기의 진리계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상처가 없으면 진리(Wahrheit)도, 나아가 지각(Wahr-nehmen)조차도 없다. 동일자의 지옥 안에는 진리가 없다.
『말테의 수기』에서 릴케는 본다는 것을 상처로 묘사한다.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이 내 자아의 미지의 영역 속으로 침범하도록 온전히 내버려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보기를 배우는 것은 전혀 적극적이지도, 의식적이지도 않은 과정이다. 오히려 그것은 내버려두기 혹은 어떤 사건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말한다. “나는 보기를 배운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이 내 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고, 평소에는 언제나 종착지였던 곳에서 멈추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던 내면을 가지고 있다. 지금 모든 것이 거기로 간다. 나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한병철 지음, <아름다움의 구원>(문학과지성사, 2016. 5. 25. 제1판 제1쇄), 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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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하게 굳어서 그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는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제대로 살아 있다면 끊임없는 상처 속에서도 역시 끊임없이 새살을 돋워 낸다.
나이가 들수록 여린 가슴, 부드러운 마음을 유지할 줄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세파에 시달려 굳은 마음 되지 않으며,
믿음을 지니고 내어 맡길 줄 알고,
모르고서도 살아내면서 감사할 줄 알면서
그렇게 매 순간을 지내야 한다.
그래야 나이가 들어도 늙지 않는 삶, 쇠락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 향린 목회 457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