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1. 28.
루이스는 우정은 아니지만 우정의 모체가 될 만한 것들로 동료의식, 공동 활동, 공동의 비전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흔히 ‘친구’라고 말하는 동료는 우정의 모체이지만 우정은 아닙니다. 동료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동료 중 두 사람이 이상이 다른 동료에게는 없는 공통의 본능이나 관심사, 취향이 있음을 서로 발견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우정이 시작하지요. 따라서 서로의 신상에 대해서는 무심하고 각자 그저 자신일 뿐인 것이 우정입니다. 상대의 직업이나 계급, 수입, 인종, 과거사 등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우정은 그런 것들로부터 해방된 영혼의 만남이니까요. 각자 독립된 나라의 군주로서 서로의 배경을 떠나 중립적 입장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몸이 만나는 것이 애정이라면, 우정은 벌거벗은 인격이 만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정은 독단적이고 무책임하고, 의무와도 무관합니다. 나는 누구의 친구가 될 의무가 없고, 마찬가지로 이 세상 그 누구도 내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가 없습니다. 어떤 권리 주장도, 필연성도 없습니다. 우정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 가치를 갖지 않습니다. 생존을 가치 있게 만들 뿐이지요. 서로에게 사랑과 지식이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우정입니다. 연인들은 얼굴을 마주 보며 서로에게 빠져드는 반면, 친구들은 나란히 앉아 공통의 관심사에 빠져듭니다. 연인들은 서로 구속하지만, 친구들은 모두 자유인입니다. 우정은 본능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흔쾌히 떠맡는 것 외의 모든 의무로부터 자유롭고, 질투로부터도 거의 전적으로 자유롭습니다. 타인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친구들의 눈은 항상 앞을 향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친구를 원하는’ 한심한 사람들은 결코 친구를 사귀지 못합니다. 친구 외에 다른 원하는 바가 있을 때에 친구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서로 공통점이 드러나면 같은 방향으로 걷는 동행자로서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정은 보답을 바라지 않고 주어집니다. ~~ 진정한 우정은 자기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우정은 애정의 필요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완벽한 우정의 표시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준 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우정은 사랑 중에서 질투가 가장 적습니다. 새로 온 사람이 진정한 친구가 될 자격이 있다면, 두 친구는 세 번째 친구를, 세 친구는 네 번째 친구와 합류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친구들은 공통점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나머지 세계에 맞서 단결하기도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작은 주머니를 가지고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형제들의 사랑에만 관심을 갖고, 주변에 있는 이교도 사회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박홍규 지음, <우정이란 무엇인가>(도서출판 들녘, 2025. 04. 10. 초판 1쇄), 29-31
=======================================
C. S. 루이스는 “우정은 서로를 구속하는 본능적 애정이 아니라,
공통의 관심사를 향해 나란히 걷는 ‘벌거벗은 인격’들의 자유로운 연대”라고 말한다.
‘단순히 친구를 원하는 한심한 사람들은 결코 친구를 사귀지 못한다’는 말과
‘우정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 가치를 갖지 않고,
생존을 가치 있게 만들 뿐’이라는 말이 와 닿는다.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이들, 자기를 선생으로 부르는 이들을 친구라고 불렀고,
세상 사람들이 친구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과 친구가 되었다.
하나님 나라라는 공통의 비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야말로 친구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 향린 목회 451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