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1. 23.
<오디세이>의 일화를 묵시록적 관점에서 해석한 리온 포이히트방거(Lion Feuchtwanger)는,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 돼지로 변해 버린 선원들이 그 처지에 만족하여 오디세우스가 마법을 깨고 자신들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려 하자 이에 필사적으로 저항한다고 지적했다. 돼지로 변한 선원들은 오디세우스가 마업을 깨고 인간으로 돌아갈 약초를 발견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자신들을 구원하려는 열망에 찬 오디세우스가 도저히 따라잡지 못할 속도로 재빠르게 돼지우리로 도망을 간다. 오디세우스는 결국 돼지 무리 중 한 마리를 사로잡는 데 성공하는데, 기적의 약초로 한번 쓱 문지르니 억센 짐승가죽으로부터 엘페노르가 빠져나왔다. 포이히트방거가 주장하듯이, 그는 힘이 장사도 아니고 딱히 영리하지도 않은 ‘다른 이들과 똑같은’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선원이었다. ‘해방된’ 엘페노르는 자신이 구출된 데 고마워하기는커녕 그의 ‘해방자’를 사납게 공격한다.
“또 왔구나 나쁜 놈, 이 참견꾼 자식, 또 우리를 들볶고 못살게 굴고 싶어서, 또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심신이 고달픈 결정을 매번 하라고? 난 정말 행복했는데. 진흙탕에 뒹굴며 빛을 쬐고 꿀꿀 꽥꽥 내 멋대로 하면서 ‘이걸 해야 하나, 저걸 해야 하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따위의 생각과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왜 왔어? 예전에 살았던 그 끔찍한 삶에 나를 다시 처박으려고?”
해방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축복으로 위장한 저주인가 아니면 저주처럼 여겨지는 축복인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이일수 옮김, <액체 현대>(필로소픽, 2025. 8. 4. 초판 3쇄 발행), 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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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자유로운 삶을 찾는다지만 실제로 그러할까?
‘객관적 자유’와 ‘주관적 자유’를 구분하면서
자유처럼 느껴진 것이 실제로는 전혀 자유가 아니었을 가능성,
즉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이 ‘객관적’으로 결코 만족스럽지 않은 것임에도 이에 자족할 가능성,
노예제도 속에서 살면서도 자유롭게 느끼고 자신을 해방할 그 어떤 급박한 필요도 느끼지 않게 되어 참된 자유를 누릴 가능성을 저버리거나 박탈당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쟁점이 부각되었다.
이 가능성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제대로 판별하는 데 무능할 수도 있으므로, ‘객관적으로’ 자유로워지려는 욕구를 품고, 그 자유를 위해 싸우는 용기와 결의를 갖도록 하는 데는 강제 혹은 회유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가설이 생겨났다.
그런데 자유를 실행하는 데 야기될 법한 여러 곤경을 놓고 볼 때, 사람들은 그 자유를 즐겨 맞이할까? 아니면 자유로움 자체를 싫어하고 해방의 전망에 오히려 분노할까?
도마복음서 2장은 다음과 같다.
예수가 말씀하셨다. “찾는 자들은 찾을 때까지 찾기를 그치지 말아라. 찾았을 때 고통스러울 것이다. 고통스러우니 놀라 당황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Jesus said, "Those who seek should not stop seeking until they find. When they find, they will be disturbed. When they are disturbed, they will marvel, and will reign over all.)
아마도 도마복음서 2장에서 찾는 자들은 “자유”를 찾는 자들일 것이다.
- 향린 목회 446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