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1. 20.
창세기 18장의 아브라함은 낮의 열기를 무릅쓰고 달려 나가 낯선 이를 맞이하고, 창세기 19장의 롯은 밤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방인을 지켜내며, 사사기 19장의 노인은 아무 연고 없는 나그네를 위해 자기 집을 개방합니다. 반면 소돔 사람들(그리고 베냐민 지파)은 외부인을 배척하고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려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진노하신 진정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예언자 에스겔과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비판한 ‘소돔의 죄’가 바로 이것이기도 합니다. 환대를 거부한 사회, 타인을 향해 문을 닫고 폭력을 정당화한 공동체는 스스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고발입니다.
~~
18-19장과 연속선상에서 보자면 창세기 20장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나안 사회에서 낯선 이가 얼마나 쉽게 위협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적 예시입니다. 낯선 이에게 자비가 아니라 폭력이 먼저 작동되는 구조, 외부인을 죽이고 그의 소유물(그의 가족을 포함하여)을 빼앗아도 아무런 법적, 도덕적 제재를 받지 않는 사회, 그것이 하나님의 법과 다스림이 없는 가나안 땅의 모습입니다. ~~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행위입니다. 가는 길에 어떠한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으며, 도착지에서 어떤 폭력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위험에 처했을 때 어디 하나 신고할 곳도 없습니다. 와서 도와줄 의무를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핸드폰과 CCTV, 경찰서와 법원이 없는 곳, 저 멀리 다가오는 사람이 나를 죽이고 내 소유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 매 순간을 살아가는 삶이 아브라함이 처했던 현실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처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파 놓은 우물을 쉽게 빼앗기는 곳이고, 지역의 토착 문화를 몰라 20년간 부당한 노동 착취를 당해도 하소연할 데가 없는 곳이며, 거짓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혀도 누구 하나 구해 주지 않는 곳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환대가 바로 이러한 삶의 환경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생존이 위협받는 현실에서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내어 주면서까지 지나가는 낯선 이를 대접하는 일은 고대 그리스의 ‘명예와 수치’ 문화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공동체 내 개인의 사회적 평판이나 인격 수준의 문제도 아닙니다.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해 공동체에서 배제되거나 도태되거나 조롱당하리라 걱정해서도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환대’란 자신의 생명을 극도의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입니다. 낯선 이를 받아들이는 행위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폭력의 문화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합니다. 그들이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믿음은 율법규정의 절대적 복종이나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확신 따위가 아닙니다. 삶의 도상에서 낯선 자와 마주쳤을 때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가 믿음의 사람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송민원 지음,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복있는 사람, 2025. 11. 4. 초판 2쇄 발행), 177-179.
==============================
타자에 대한 무제한적, 무조건적 환대야말로 기독교의 궁극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는 모든 이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모든 생명체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는 종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기를 열어 타자를 받아들이는 행위는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낯설고 어렵다.
생존의 위협을 느끼면 자동적인 투쟁-도피 반응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만나는 잘 모르는 타인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 않도록 진화하는 데만도 수만 년-이 걸렸다.
우리 인류는 얼마나 더 지나야 환대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을까?
- 향린 목회 443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