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1. 16.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눈 어두운 것 또한 그것일세.
다시는 예경 주소 따질 것 없고 다시는 주역 괘사 연구할 것도 없어
평생 동안 문자에 대한 거리낌을 하루아침에 깨끗이 벗을 수 있네.
급고각 판본은 가증스럽기도 해라.
자디잔 글자를 티끌처럼 새겼는데 육경은 교외로 나갔거니와
재윤은 어느 때에 걸 것인고?
슬프다, 경문의 주석을 엿보건대 후인들은 옛사람 본만 따라서
송나라 이학 반박할 줄만 알고 한대의 오류 답습함은 수치로 안 여기네.
이젠 안개 속의 꽃처럼 눈이 흐리니
눈초리를 번거롭게 할 것 없고 옳고 그름도 이미 다 잊었는지라.
변난하는 일 또한 게을러졌으나
강호의 풍광과 청산의 빛으로도 또한 안계를 채우기에 충분하다오.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귀먹은 것이 또 그 다음일세.
세상 소리는 좋은 소리가 없고 모두가 다 시비 다툼뿐이나니
헛 칭찬은 하늘에까지 추어올리고 헛 모함은 구렁텅이로 떨어뜨리며
예약은 황무한 지 이미 오래이어라.
아, 약고 경박한 뭇 아이들이여
개미가 떼 지어 교룡을 침범하고 생쥐가 사자를 밟아 뭉개는구나.
그러나 귀막이 솜을 달지 않고도 천둥소리조차 점점 가늘게 들리고
그 나머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낙엽을 보고야 바람이 분 줄을 아니
파리가 윙윙대거나 지렁이가 울어 난동을 부린들 누가 다시 알리오?
겸하여 가장 노릇도 잘할 수 잇고 귀먹고 말 못해 대치가 되었으니
비록 자석탕 같은 약이 있더라도 크게 웃고 의원을 한번 꾸짖으리.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마구 씀일세.
어떤 운자(韻字)에도 얽매이지 않고 퇴고도 꼭 오래 할 것이 없네.
흥이 나면 곧 이리저리 생각하고 생각이 떠오르면 그대로 적는다네.
나는 바로 조선 사람인지라 즐거이 조선 시를 짓는다네.
누구나 자기 법을 쓰는 것이니 오활하다 비난할 자 그 누구리오.
그 구구한 시격이며 시율을 먼 데 사람이 어찌 알 수 있으리?
능가하기 좋아하는 이반룡은 우리를 동이라고 조롱했는데
원굉도는 오히려 설루를 쳤으나 천하에 아무도 다른 말이 없었네.
등 뒤에 활을 가진 자가 있거늘 어느 겨를에 매미를 엿보리오?
나는 산석의 시구를 사모하노니 여랑의 비웃음을 받을까 염려로세.
어찌 비통한 말을 꾸미기 위해 고통스레 애를 끓일 수 있으랴?
배와 귤은 맛이 각각 다르나니 오직 자신이 즐기고 기뻐하면 될 일이네.
박홍규 지음, <노년이란 무엇인가>(도서출판 들녘, 2025년 10월 2일 초판 1쇄), 25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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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이 70세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연작시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중
3, 4, 5수이다. 각 수가 제목처럼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으로 시작된다.
1수는 대머리가 된 것, 2수는 이가 모두 빠진 것, 3수는 눈이 어두운 것, 4수는 귀먹은 것,
5수는 마음 내키는 대로 미친 듯이 시를 쓰는 것, 6수는 이따금 친구들과 바둑을 두는 것을 노래한다.
노년에 생기는 불편함들을 결함이나 장애로 보지 않고, ‘유쾌한 일’로 보는 재치가 돋보인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생기는 변화에 그저 잘 적응해 갈 뿐!
노년을 추켜세우는 것도, 노년을 내리깎는 것도 다 부질없는 짓이다.
하루하루를 그저 잘 살면 된다.
- 향린 목회 439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