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1. 10.
내가 말하는 행복은, 첫째 소박하며, 둘째 사거나 지배할 수 없는 가치에 터해 있고, 셋째 어떤 삶의 일관성에 의해 부사적으로나마 재생산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소박한 행복’이란, 행복의 종류를 나누려는 게 아니라, 행복은 반드시 소박해야 한다는 뜻이다. 행복이 별스럽거나 남다른 성취에 얹혀 있다면, 그것은 행운의 기색을 띠거나 경쟁의 상급(賞給)처럼 여겨져 그 보편성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트주의 미학이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과 접속하듯이, 행복이 엘리티즘의 의상을 입게 되면 자폐적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소박이 ‘아우슈비츠’ 소각장의 창문 틈을 간신히 비집고 소생하는 민들레의 행복을 합리화하는 종류의 것이어서도 안된다. 말하자면, 삶의 소박을 이드거니 가꾸고 거기에서 행복의 거처를 마련하더라도, 그 소박과 행복이 탈정치화의 사사(私事) 속에서 기신하는 종류의 것이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행복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것은 아니지만, 멀게든 가깝게든 직입(直入)하든 에두르든 어떤 ‘정치적 실천’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못생긴 대추열매든 끌밋한 열매든 다들 대추나무에서 갈라져 나온 것처럼, 제아무리 소박한 행복의 실천에서라도 담론과 제도의 질서를 규제하는 체계는 엄연하다. 복자는 다만 그 체계와 타협하거나 아니면 창의적으로 불화할 수 있을 뿐이며, 혹은 이런저런 눈치를 살피면서 보신하거나 아니면 체계의 명령을 무시하면서 그 비용에 몸을 내맡길 수 있을 뿐이다.
김영민 지음, <봄날은 간다>(글항아리, 2012. 04. 23.), 170-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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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새와 들에 핀 한 송이 꽃에서도 행복을 누리던 예수는
십자가에 자기 몸을 맡겼고,
배움의 즐거움과 동지들의 방문에 기쁨을 누렸던 공자는
18년의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통해 세상을 바꿔보려고 했다.
거시적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지 않으면서도
미시적 세계 속에서 소박한 행복을 누릴 줄 알고,
존재의 깊이를 느끼고 누리면서도
고통의 현장에 응답하고 불의한 체제에 저항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 향린 목회 433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