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떨리는 마음
살인하지 못한다.(출애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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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이양연이라는 사람의 <백로(白鷺)>라는 시가 있습니다.
도롱이옷 풀빛과 뒤섞여 있어 백로가 시냇가로 내려앉았네.(蓑衣混草色, 白鷺下溪止)
놀라서 날아갈까 염려가 되어 일어날까 다시금 가만있었지.(或恐驚飛去, 欲起還不起)
도롱이를 입은 농부가 들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호미를 씻고 손발에 묻은 흙을 닦아내려고 냇가에서 고개를 숙이는데, 해오라기 한 마리가 도롱이를 풀더미로 알고 그 곁에 내려앉습니다. 농부는 난처해집니다. 일어서자니 백로가 놀라겠고, 그대로 있자니 저 녀석은 아예 마음을 턱 놓고 몇 시간이고 버틸 기세입니다. 일어설까? 농부는 고민에 빠집니다. 결국 농부는 살포시 앉습니다.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도롱이도 빗물에 젖어만 갑니다. 마침내 자옥한 안개 속에 백로도 도롱이도 지워져가는 한 폭의 그림을 우리는 이 시에서 볼 수 있습니다.(정민, 『새 문화사전』 (글항아리, 2014) 서설에서)
예수께서는 “살인하지 못한다.”라는 계명을 확대합니다. 형제나 이웃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으며, 얼간이나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모두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친구나 형제나 이웃이 생각나거든 먼저 그 사람과 화해하고 와서 예배하라고 말합니다(마태 5:22-24).
보통 살인은 증오와 분노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잠깐의 화를 참지 못해 실수로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살인하지 못한다는 계명은 너의 마음을 늘 온유하게 유지하라는 명령이며, 그 무엇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삼아 모든 것을 대상화한 근대 이후의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특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생명들에 대한 경외심, 즉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놓쳤습니다. 탐욕으로 인해 자족할 줄 모르는 인간은 늘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분노와 증오가 생기고, 순간의 잘못으로 살인에 이르게 됩니다.
6계명을 지키려는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많은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회구조의 문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게 하는 무관심과 냉대의 문화도 바꿀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생명을 얻고 더 넘치게 얻게 하려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기 때문입니다(요한 10:10).
기도: 참 생명의 하나님, 우리 모두는 생명을 얻고 생명을 넘겨줍니다. 그렇게 생명을 이어가며 우리들의 삶이 더욱 알차고 빛나기를 빕니다. 죽음의 문화를 바꿔 생명을 살리고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꿈꾸고 일구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