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25.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라고 아버지는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지 않은 그 말을 나는 들었고, 그 뜻을 이해했다. 나는 누구의 말을 들었을까? 내 안에 말을 넣어준 이는 누구였을까? 일어나기 힘든 어떤 대단한 일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다. 사랑은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요구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바치라는 요구를 받았다. 아들을 사랑해서 일어난 일이다. 신이 아버지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아버지를 사랑해서 일어난 일이다. 사랑 때문에 받은 이 요구는 사랑 때문에 이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랑하지 않거나 아주 많이 사랑하지 않았으면 받지 않았을 이 요구는 사랑하지 않거나 아주 많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행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요구이다. 아버지는 사흘 길을 걷는 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사흘 길을 걷는 동안 아버지에게 한마디 말을 걸 수 없었다. 아버지는 사흘 길을 걷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나는 사흘 길을 걷는 동안 아버지에게 먹을 것을 권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어둡고 주름지고 황량했다. 바치려고 가는 그의 얼굴은 이미 바쳐진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버지 주변에 줄이 쳐진 것 같았다. 줄 안으로 발을 들여놓거나 말을 집어넣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아버지는 가까이 있었지만 따로 있었다. 아버지는 나와 같이 걸었지만 나와 같은 땅을 밟고 걷는 것 같지 않았다. 사막이 그의 얼굴에 들어가 있었다. 신이 바치라고 지시한 산을 향해 걷고 있었지만 그때 그가 한 일은 단순한 걷기가 아니라 영혼의 고투였다. 그것이 사생결단의 고독한 몸부림, 즉 기도였음을 이제 나는 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 얼굴을 나는 그전에 본 적이 없다. 다른 데서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사랑 때문에 부여받았으나 사랑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혹은 하지 않기 위해 싸웠다. 나는 아버지 앞에 놓인 거대한, 불가항력의 두 개의 바위를 본다. 사랑 때문에 할 수 없는 그 일을 그는 또 사랑 때문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진 사람이었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일을 하지 않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바치는 것이 불가능했고, 바치지 않는 것도 불가능했다. 사랑은 그를 불가능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에서 어느 것 하나 가능하지 않은 세계로 사랑이 그를 밀어넣었다.
이승우, <사랑이 한 일>(문학동네, 2022. 12. 9. 1판 7쇄), 107-109.
===============================
하나님이 이 땅에 아들을 보내신 것도,
그를 십자가에 달리게 한 것도,
그때 아무 말을 하지 않은 것도,
사랑이 한 일이다.
높은 하늘을 박차고 낮은 이 땅에 온 것도,
이 땅에서 온갖 조롱과 수난을 당한 것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냐고 울부짖은 것도,
다 사랑이 한 일이다.
아주 가까이 있는 것도,
그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없이 계시고, 계시는 듯 부재(不在)하는 것도,
대답하는 것도, 침묵하는 것도,
모두가 사랑이 한 일이다.
2025년 성탄절을 맞이하며...
- 향린 목회 417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