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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있어라 | 유영상 | 2025-12-21

by 유영상 posted Dec 21, 2025 Views 12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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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12-21

평화가 있어라

(사사기 16:23-30; 고린도전서 11:31-33; 누가복음서 24:36-48)

 

 

[평화의 의미]

 

우리가 읽은 복음서 말씀을 보면, 제자들은 모여서 엠마오 도상에 나타난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죽임당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

제자들은 매우 놀라고 무서워합니다. 당연히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던 예수님, 정말 엠마오 도상에 나타나셨냐, 아니냐 진위여부를 가리고 있을 때 나타나셨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래서 앞에 나타난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이 아니라 유령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손을 보이시고 내가 그 십자가에 죽임당한 예수임을 알리시지요. 그리고 허기지셨는지 먹을 것을 구합니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성경에 관한 이야기, 그리스도가 부활하고, 그의 이름으로 죄가 사라지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증인으로 삼으십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부활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마실 때 나타나신다는 성찬의 현재성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 엠마오 도상에 나타난 예수님의 이야기에 대한 반복, 영혼 불멸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와 다르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신체의 부활을 말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하지만 평화가 있어라”, 예수님께서 등장할 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에 걸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평화가 있어라”, “에이레네라고 인사하는 건 샬롬같은 유대 사회의 일상적인 인사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서 105절을 보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할 때 이 인사말을 꼭 하길 당부합니다. 이걸 시작으로 그 집에 머물며 주는 음식을 먹고,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음을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일종의 규칙을 알려준 것입니다. 

우선 이 인사말을 당부하게 된 경위가 독특합니다.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사람의 동네에서 배척당했을 때 그러했습니다. 누가복음 951절부터 56절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함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떠났고, 사마리아 사람의 동네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배척을 당하지요. 그러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몹시 화가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은 복수를 하려는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누가복음서 본문에는 드러나 있진 않지만 이런 경향은 잦았을 것입니다. 폭력과 응징이 난무한 시대였기에 아무래도 하나님 나라 운동이 지향하는 평화보다는 복수가 익숙했겠지요.

오늘 읽은 제1성서 말씀에서 봤듯이 삼손이 블레셋과 복수를 복수로 갚는 시절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요. 그렇지만 그것을 하나님 나라 운동과 본질적으로 다르기에 확실한 구분이 필요했습니다.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를 제자들에게 가르칩니다. 누가복음서 전체를 볼 때, 이 시점에 처음으로 이 인사말이 규범처럼 제시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게 추가된 시기가 절묘합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이 본질적으로 당시 운동들과 다르다는 일종의 슬로건이 아니었을까요?

1017절을 보면 제자들은 그것을 해내고 돌아와서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께 설명하는데, 그 방점이 사뭇 다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대니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차라리 무미건조하게 어떤 이의 집에 노크하자마자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라고 인사하고 이어서 음식을 얻어먹고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말했습니다라고 하던지, 소감을 말하든지 했으면 이상하다고 느끼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름을 대니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여기서 무엇이 어긋났음을 느끼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운동 조차도 이 사회와 똑같은 복종과 응징의 성격이 보이니 예수님께서 크게 실망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곧바로 예수님은 그런 것에 기뻐하지 말고 하늘에 기록되는 것에 기뻐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기록이 유효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너희의 주된 관심사여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칩니다.

안타깝게도 이 일이 있은 직후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말은 제자들의 입술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이 인사말의 부재만으로 이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곧바로 폭력적이라 단정할 순 없겠죠. 하지만 복수의 힘이 뻗치고 있는 내부를 새롭게 다잡고자 했던 그 새로운 시도가 내부의 원인에 의해 발견되지 못한 건 분명합니다. 제자들도, 일흔 사람도, 그 어떤 사람도 그 인사말을 다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당합니다.

 

 

[불가능성 이면에 있는 불가피함을 발견하신 예수님]

 

그렇게 잊혀질 때 예수님은 그 누구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그 미완의 숙제를 부활하자마자 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 부활하시고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 처음으로 꺼낸 한 마디입니다.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친 제자들을 향한 비난도, 자신을 죽인 세상에 대한 복수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귀신이 복종하는 힘에 취해 잊어버렸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핵심을 다시금 선포합니다. 제자들은 실패했지만 스승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잊었지만, 스승은 잊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배척받았을 때 조건반사처럼 나오는 보복, 지난 주일에 담임목사님 하늘뜻펴기에서 나왔던 매우 현실적인 질문처럼, “우리는 왜 한 대를 맞으면 두 대를 때리고 싶은 걸까요?”와 같은 습성이 아주 현실적이고 마음에 와닿기 때문이지요. 폭력에 맞선다 해도, 모든 관계와 반응을 단번에 절연하듯 끊어낼 수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 나라 운동도 하나의 이름 알리기나 승리, 점령과 분간하기 어렵게 개인의 욕망과 기대에 취약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불가능한 여건 속에서 불가피하다는 걸 자각하고 죽임당한 이후에 부활하여 그것을 해냅니다. 불가능성 이면에 불가피함이 있다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역동을 예수님께서 말이 아니라 자신의 온 생애에 걸쳐서 증명한 순간입니다.

 

 

[부활의 신비와 그 의미]

 

다음으로 봐야 할 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서 그 하나님 나라 운동의 방향을 더 분명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 나라 운동의 방향은 그 나라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부활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임박함의 요건에 고난과 부활을 추가합니다. 어떤 뜻이 숨겨져 있을까요?

폭력의 시대에서 고난은 공통감각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부활은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고난을 이겨낸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고난을 움켜쥐게 한 그 권력이 무력하다는 반증이지도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부활은 그 사람을 죽인 그 세력이 무력하다는 진실, 그 권력이 무효하다는 선언과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죽임 당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누가 죽였습니까? 유대 권력과 로마제국입니다. 이렇게 강함과 약함, 고난과 무력함을 역전시킵니다.

최말자 씨를 아십니까? 지난 가을에 최말자 씨가 무죄 선고 받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1년 전인 1964년 최말자 씨는 성폭력에 저항했습니다. 자신의 존엄성과 목숨을 지킨 절박한 저항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부산지법은 가해 남성에게는 집행유예를, 오히려 최말자 씨에게 징역을 선고했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후, 최말자 씨는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며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그렇게 지난 9월 무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열사들,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이 수년, 수십년이 지나서야 무죄임이 입증되는 현실도 마찬가지이지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최말자 씨의 신원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법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엉터리였는지, 또 무력한지 직시하게 되죠.

예수님의 부활도 그렇습니다. 세상의 지혜와 권력의 무력함을 폭로합니다. 또 부활을 증언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복수를 끊고 폭력이 무력한 시대가 곧 온다는 걸 역설합니다. 이 진실을 깨달은 증인으로 자신을 본 제자들을 초대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익숙한 방식을 잊고 새로운 운동의 방향을 토대 삼아 증언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의 권면도 새롭게 느껴집니다. 사도 바울은 공동체가 모일 때 서로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앞선 이가 멈추고, 뒤처진 이를 남겨두지 않으며, 함께 먹기 위해 자신의 속도를 늦추라고 하지요. 어쩌면 이것이 부활을 믿는 공동체가 폭력을 끊어내는 가장 일상적인 방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다림은 패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운동이 선택한 다른 시간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돌아봄]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포기했던 무수히 많은 일들이 떠오릅니다. 그것이 유난히 마음에 걸리는 이유는, 어쩌면 그것들이 하면 좋았던 일이 아니라 해야만 했던 일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에는 너무 벅차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불가능해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 일만이 갈등을 멈추고, 사람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끝내 해내지 못한, 내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보복의 힘을 끊을 수 없어서, 그래서 실패로 보였던 그 길을 예수님은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 다시금 그 가능성을 여십니다. 그 하나님 나라 운동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지만, 사실은 포기할 수 없는 불가피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생애 전체로 증명하신 것입니다.

 

대림절 넷째 주일에 벌써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어떤가요. 실패는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듯, 불가능이 불가피를 생각하게 하듯, 죽음은 오히려 삶을 강력히 시사하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마디는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였습니다. 세상은 힘과 폭력이 강하다며 평화를 불가능한 꿈으로 치부하지만,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폭력의 무력함을 폭로하시고 평화가 하나님 나라의 불가피한 현실임을 확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잊었으나 스승은 포기하지 않으셨던 그 평화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희망이 되어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폭력의 시대 속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끊어내며 서로를 지켜내시겠습니까? 그 고단한 길 가운데 평화가 함께하길 빕니다.*

 

 

 

*파송사*

평화를 갈망하십시오, 사랑 안에서 자유하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평화를 비는 인사로 이 세상을 따뜻하게 끌어안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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